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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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극장에가다 2018. 10. 29. 21:21
영화를 보고 나서 핸드폰으로 '라무네 사이다'를 검색했다. 당장 마셔보고 싶었는데, 지에스 편의점에서 최근 판매를 하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영화 속에서 이 사이다를 엄마와 아들이 함께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지만,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엄마가 된, 그렇지만 엄마라고 부르지는 않는, 그걸 개의치 않는 '엄마'. 파칭코 주차장 차 안에 혼자 방치되어 있다가 지금의 '엄마', '아빠'에게 발견되어 지금의 가족들과 소소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기 시작한 '아들'. 두 사람은 역시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할머니'의 연금을 인출한 뒤 이 라무네 사이다를 하나씩 사들고 시장 거리를 걷는다. 어떤 상인이 '엄마'에게 아이의 엄마라는 호칭을 써 신기해하고 좋아라 하면서. 마지막 모금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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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모퉁이다방 2018. 10. 25. 21:38
언제 고백을 했더라. 열렬한 야구덕후라고. 뭐라고 고백을 했더라. 시작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시즌이 시작되면 첫 경기는 꼭 보러 가자고 했던 말은 생각난다. 고척에서 하는데, 돔구장이라 미세먼지도 없고, 춥지도 않다고. 물론 생맥주도 있다고. (야호) 내가 예매를 했는데, 야구장 좌석을 잘 몰라서 엄청난 중간 자리로 했더니 들어갈 때 고생해서 살짝 얼굴을 찡그린 것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맥주덕후인 내게 더 곤혹인 자리였다. 맥주를 마시면 화장실이 가고 싶은데, 나 화장실 가자고 옆 사람들을 다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 뒤로 좌석 예매는 그 아이 전담.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거다. 몇 년째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자신은 한화 팬이라고. 어릴 때부터 줄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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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시옷모퉁이다방 2018. 10. 23. 22:31
봄이가 충무로로 이사를 갔고, 시월에는 충무로에서 모였다. 우리는 골목길에 있는,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들이 자주 올 법한 술집에 들어가서 먹고 싶은 안주들을 잔뜩 시켰다. 낙지떡볶이, 두부김치, 계란말이, 김치전. 낙지떡볶이에는 공기밥을 시켜 밥을 비벼 먹었다. 맥주도 마시고, 소주도 마시고, 소맥도 마셨다. 테이블에서 떨어지고 있던 소주병을 잽빠르게 잡아내고 박수를 받았다. 하하하. 최은영의 새 소설집을 읽고 만나기로 했는데, 반 밖에 못 읽었다. 요새 왜 그런지 소설을 읽는 게 쉽지 않다. 읽은 소설 중에 자매의 이야기가 제일 좋았다. 행복하지 않았던 청소년기를 함께 보낸 뒤 대면대면해진 자매가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이야기였는데, 읽으면서 눈물이 났다. 겪은 일도 아니면서, 겪은 것 마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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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서재를쌓다 2018. 10. 18. 22:59
이번 책은 유럽기차여행 이야기라고 했다. 여름의 홋카이도를 보통열차를 타고 여행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읽었던 지라 이번 책도 기대했더랬다. 내게 오지은은 전과 후로 나뉘는 것 같다. 아직까지는. 새빨간 마릴린 먼로 원피스를 입고 널 보고 있으면 널 갈아 먹고 싶다고 노래하던 오지은이 전의 오지은이고, 완연한 봄을 앞에 두고 자꾸만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마주하는 오지은이 후의 오지은이다. 이 책도 후의 오지은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깊은 밤, 오지은은 우물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싫어 검색을 한다. 유럽, 베스트, 기차, 경치. 기차덕후 오지은은 비수기 겨울에 론리플래닛이 선정한 유럽 최고의 기차 풍경 베스트에 속하는 몇몇 구간들을 혼자 여행해 보기로 한다. 잘 쉬고 싶고, 신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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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여행을가다 2018. 10. 14. 21:19
창밖으로 나무가 보이는 숙소성애자인 나는 어디선가 강원도 홍천에 있다는 근사한 숙소 사진을 보고 언젠가 가봐야지 생각을 했더랬다. 칠월이었고, 둘다 금요일 연차를 냈다. 출발 전, 숙소에서 먹을 음식을 사러 마트에 들렀는데 아마도 장마를 앞두고 하는 할인 행사를 보고 마음이 동해 세차장에 갔다가 나름 거금이 드는 서비스를 받았더랬다. 몇 시간 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좁은 산길을 달릴 줄도 모르고. 차에 나뭇잎들이 닿을 때마다 안타까워하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홍천의 깊은 산 속 숙소에 도착했다. 층층이 단독 복층 건물이 있었다. 제일 꼭대기 층에는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통유리로 된 휴식공간이 있었다. 도착했다는 전화를 하니, 인상 좋게 생기신 아저씨가 달려오셨다. 오늘 예약한 사람이 우리 뿐이라고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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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드리프트 : 우리가 함께한 바다극장에가다 2018. 10. 6. 17:40
이 영화에 반전이 있는 줄 몰랐다. 그러니 이 글은 영화의 반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마시길. 여자는 쌍안경을 이용해 먼 곳을 보았다. 한번 확인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다시 한번 더 확인을 했다. 아마 아주 여러 번 확인을 했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타히티 섬에서 만났다. 고갱이 행복한 그림을 많이 그렸던 타히티 섬. 남자와 여자는 이 곳에서 만나 첫눈에 반했다. 남자가 직접 만든 배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는데, 서로가 잘 어울리는 연인이 될 거란 걸 그 밤을 보내면서 알았다. 여자는 남자가 살아온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남자는 배를 타고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었다. 남자는 높은 절벽에서 거침없이 풍덩 뛰어드는 여자를 보고, 당신은 내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여자야, 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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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모퉁이다방 2018. 10. 1. 20:27
지난주는 좋지 않았다. 놓쳐버릴까 조마조마한 순간이 있었다. 지난주의 끝, 다짐했다. 시월에는 좋은 시간만 보내겠다고. 단단한 것을 굳게 믿고, 좋은 것들을 많이 보고, 서늘한 길을 오래 걷겠다고. 시월이 되고 공기가 차가워지니 살 것 같다. 이제 코끝이 바알갛게 시려지는 계절이 오겠지. 두터운 목도리도 하고. 토요일에는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울적해하는 내게 평소에는 하지 않던 이야기들을 해줬다. 모든 건 장단점이 있어. 그 이야기들은 내 태도를 바꿔주고, 마음의 여유를 주었다. 우리는 짙은 파란색 두툼한 목도리를 함께 봤다. 추석에 만난 숙모는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마음이 무척 괴로울 때 하던 일을 멈추고 곧장 부엌으로 가서 이것저것 재료를 꺼내 칼질을 하고 불을 지피고 음식들을 볶아내다보면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