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번화한 리파리 중심가를 벗어나 조금만 올라가면 깊은 협곡을 피해 발달한 작고 아름다운 마을들과 포도밭, 레몬나무, 드문드문 서 있는 올리브나무 그리고 사이프러스를 만날 수 있다. 화산의 폭발로 만들어진 지형은 마치 판타지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쿠터를 타고 질주하는 순간의 달콤한 고독을 나는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스쿠터를 타고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자는 안과 밖이 통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풍경은 폐부로 바로 밀고 들어온다. 그 순간의 풍경은 오직 나만의 것이다. 저 아래 까마득한 해안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신중한 관광객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숙이고 절벽을 향해 달려나갈 때, 비로소 나를 이 섬에 데려온 이유, 여기 오기 전까지 자기 자신마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진짜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새 능선 위로 해가 넘어가고 사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스쿠터를 몰아 중턱에서 숨을 고르는 안개 속으로 몸을 던졌다. 상쾌한 습기가 얼굴에 감겨들었다. 안개를 뚫고 해발고도 제로의 아파트로 돌아오자 아내가 이제 오냐며 반색을 한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우리는 한 스쿠터에 앉아 같은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마치 낯선 사람처럼 서먹했다. 아내도 그렇게 느꼈는지 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산 위에 뭐가 있어?"

- 123~124쪽

 

   기대하지 않았던 책인데 잘 읽혀 신이 났다. 출퇴근 시간이 기다려지는 책을 만나는 건 귀중하니까. 이 부분을 다시 한번 읽고 옮겨 적는데 어느 순간이 떠올랐다. 영화 속 풍경이 마음에 남아 언젠가의 소망으로 간직하다 어느 날 긴 비행 끝에 도착한 여행지. 그곳에서 '달콤한 고독'을 느끼며 올라간 탑. 이 '순간의 풍경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고 느껴지던 순간. '여기 오기 전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진짜 이유'를 깨닫고 나도 모르게 흘렀던 눈물. 그 탑에 오르지 못한 사람도 있고, 그 탑에 오른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날, 그 순간 느낀 감정들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되었던, 그 여행. 누군가 "그 탑 위에 뭐가 있어?"라고 물어 자세히 설명한다고 해도 온전히 나만이 알 수 있는 그 날의 경험.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아주 작은 성장. 아, 이게 여행이구나 깨달음이 왔다. 나만의 아주 작은 성장점이 쌓여 실제의 나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그 먼 거리를 시간과 돈과 마음을 들여 떠나는 구나. 김영하 작가 역시.

 

    리파리에서 경험한 이 이별은 나로서는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행복이었고 그것은 그후로 이어질 힘든 여행을 달갑게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리파리를 떠난 지 한참이 되었지만 아직도 생선장수 프란체스코 할아버지가 눈물을 글썽이며 조심스레 내밀던 젖은 주먹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지고 다시 리파리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 132쪽

 

   (...) 왜였을까? 시칠리아에는 내가 상상하던 시칠리아 대신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도대체 뭘까? 내 마음을 이토록 잡아끄는 그것은 무엇일까? 시칠리아에서, 그리고 그곳을 떠나와서도 나는 가끔 그것을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칠리아에서 찍어온 화면들이 방영되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시칠리아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상상해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과 사이프러스 그리고 유쾌하고 친절한 사내들, 거대한 유적들과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들, 파랗고 잔잔한 지중해와 그것을 굽어보는 언덕 위의 올리브나무, 싸고 신선한 와인과 맛있는 파스타, 검은머리의 여성들과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 예전에 나는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 장사치들, 약삭빠른 도시인들과 척박한 삶, 테마파크를 닮은 번드르르한 대리석 건물들만 보았던 것이다. 내가 꿈꾸던 이탈리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저 영화나 관광엽서, 여행사의 팸플릿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아니, 그것들은 모두 시칠리아에 있었다. 나는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함께 팔레르모공항을 떠난 지 불과 다섯 달 만에 아내와 함께 다시 그 섬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 49~50쪽

 

    타오르미나의 그리스극장에서 나는 이천여 년 전에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익숙한 발성의 그리스어로, 그 배경을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당대의 관객들을 향해 자신 있게 연기했을 배우들을 떠올려본다. 모든 것을 바싹 말려버리는 햇볕과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숨막히는 열풍이 그 위세를 거두고 잠시 물러간 시칠리아의 여름밤, 최고의 배우들이 선보이는 멋진 드라마를 느긋한 마음으로 즐겼을 타오르미나의 관객들을 또한 상상해본다.

- 1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