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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밤
    모퉁이다방 2020. 4. 18. 14:16

     

        어제는 외식을 하기로 했다. 역에서 내려 마을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짧은 나무 길이 있는데, 그 옆으로 약국이 있고 치킨집이 있고 초밥집이 있다. 길과 가게 사이에는 작은 화단이 있는데 초밥집은 간이 테이블을 화단 너머 길가에 놓아놓고 회와 초밥을 포장해서 내놓고 팔고 있었다. 평소 지나가면서 맛집일 거라는 생각을 못했는데 어느 날 남편이 초밥집 얘길 꺼냈다. 너 걸어오는 길에 초밥집 있지? 거기 회사 사람들이랑 갔는데 꽤 맛있더라고. 언제 한번 가자.

     

       들어가보니 정말 작은 가게였다. 작은 테이블이 세 개 있고 한쪽 벽에 1인석 바가 있었다. 메뉴도 단촐했다. 회와 초밥, 산낙지 같은 국물 없는 메뉴들. 숙성회를 파는 가게였다. 작지만 천장이 높아 그리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방장이자 사장님이신 나이가 꽤 많으신 남자 분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깔끔하게 흰색의 요리복과 모자를 쓰고 계셨다. 초밥 열피스 하나, 이만원짜리 모듬 회, 테라 한 병, 후레쉬 한 병. 사장님이 우리가 시킨 메뉴를 기분 좋게 한 번씩 소리내서 말했다. 잘 오셨어, 느낌이 드는 톤이었다. 미소장국이 나왔고 초록콩이 나왔다. 동그랗고 투명한 접시에 예쁘게 담긴 숙성회가 나왔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초밥 열 피스가 나왔다. 우리는 소맥을 말았다. 사장님이 보시더니 소맥, 좋지요, 말씀하셨다.

     

       남편은 이제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에 대해 조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한다. 처음 그걸 내게 말했을 때 만취한 상태에서 아주 많이 서럽게 울면서 이야기를 했었다. 그뒤로도 어두운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했었다. 어른이 왜 그랬을까. 나는 아무 잘못한 게 없는데.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많았다고 했다. 시골집에 가면 할머니도 고모님들도 아버님도 남편이 어릴 때부터 아주아주 착했다고, 순하고 뭐든 얘기하면 그대로 잘 따랐다고 칭찬을 많이 하신다. 어느 날 남편은 내게 왜 그랬는지 아냐고,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자신도 마냥 착한 아이라서 그랬던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성질 부리는 나를 마냥 받아주지 않고 이따금씩 자신도 성질을 부릴 때 고맙다. 그래, 너도 성질 내. 마냥 착하게만 굴지 말고. 이제 나도 남편의 상처에 대해 조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한다. 어제도 그랬다. 아직도 왜 그랬을까 많이 생각한다고. 그러면 나는 괜찮어, 보이지 않지만 모두의 집에 각자의 문제들이 있어, 너만 그랬던 게 아니야. 우리집을 봐. 남편은 그래도 그건 너무 큰 상처였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이어나가다가 술잔을 부딪힌다. 잘 살아보자고 다짐하면서. 그것 역시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

     

       사장님은 다 듣고 있었을 거다. 워낙 작은 가게이고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으니까. 정말 놀라웠던 건 밖에 내놓은 간이테이블 위의 회를 누가 사가나, 사가기나 할까 싶었는데 가게 안에 앉아 있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회를 사갔다. 사장님은 단골들이 있다고 했다. 한번 맛본 사람들은 착한 가격에 맛도 좋아 꼭 다시 온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다시 와야지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뭔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우리만의 아지트가 생긴 기분이었다. 사장님은 우리에게 보기 좋아 보인다고, 남편에게 아내를 잘 얻은 것 같다고 인상이 좋다고 말해주셨다. 고맙게도. 우리는 회도 초밥도 정말 맛있다고 다시 또 올거라고 말했다. 사장님이 회를 뜨는 곳에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가만 보니 사장님의 아주 젊은 시절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잘 생기셨다. 내가 사장님이냐고 물었고, 사장님은 맞다면서 자신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줄곧 이 일을 했다고 했다. 장인이라는 게 따로 있겠냐면서 제주도의 큰 가게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자신의 간식으로 싸온 자그마한 고구마도 두 개 챙겨주셨다. 연세가 많아 보였는데 중학교이나 고등학생 즈음인 아들이 있었다. 아들에게 어딘가로 배달을 시키는 것 같았는데, 갔다오면 아빠랑 같이 저녁 먹자, 라고 말씀하셨다. 아빠. 아빠. 나도 늘 부르는 호칭인데 나이가 지긋하신 사장님이 말하니 뭔가 더 의지가 되는 느낌이었다. 무척이나 다정하게 들렸다.

     

       또 가야지. 화원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있는 그 곳. 가서 또 천천히 금밤을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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