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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도일기
    서재를쌓다 2017. 11. 29. 22:48






        한나는 롤랑 바르트의 일을 겪었다고 했다. 몇달 만에 나타나 그동안 별일이 없었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말했다. 나는 힘들었겠다, 말했다. 눈가가 촉촉해진 한나가 이제 괜찮다고 했다. 십일월의 시옷의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였다. 십일월 시옷의 모임에, 우리는 셋이서 만났다가, 잠시 넷이 되었다가, 다시 셋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넷이 되었다. 셋일 때 책 이야기를 했는데, 둘이 하진이가 왜 이 책을 골랐을까 읽으면서 궁금했다고 했다. 나는 생각보다 책이 그렇게 우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나는 반쯤 읽었다고 했는데, 끝까지 롤랑 바르트가 이런 마음이냐고 물었다. 나는 극복하고 다시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해설에 있던 그의 죽음에 대해 말해줬다. "1980년 2월 25일 바르트는 작은 트럭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지만 심리적으로 치료를 거부했다. (...) 한 달 뒤인 3월 26일 바르트는 사망했다."


       이 책은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를 여의고 슬픔에 겨워 그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써내려간 작은 일기들이다. 1977년과 1979년의 기록들이다. 모임이 있기 전, 이번에 참석하지 못한 봄이와 소윤이는 읽고 있는데 너무 우울하다고 말했다. 한나는 자신의 경우, 힘들었지만 추스릴 수 있었다고 했다. 더 잘 살아나가야지 생각했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변함없는 그의 절망에 나도 생각했더랬다. 얼마나 사랑이 깊으면 이럴까. 왜 그는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는가. 기석이가 롤랑 바르트를 좋아했던 것 같아, 망원의 제주도 음식점 오라방에서 제주고기를 먹으며 말했다. 그리고 홍대로 옮겨 기석이를 만났고, 이야기해줬다. 롤랑 바르트에 대해. 그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이었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엄마에 대한 사랑이 얼만큼 깊었는지. 홍대 지하의 소굴에서 무알콜 칵테일을 마시며 그 이야기를 듣는데, 단번에 이해가 됐다. 그가 마주한 세상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그에게 어머니라는 존재가 어떠했을지. 어쩌면 어머니 만이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았을까 하고. 아, 그날 넷이 된 우리는 다시 셋이 되었다가, 둘이 되었다. 그리고 롤랑 바르트가 그러했듯,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결국 하나가 되었다. 




       이건 이 책을 읽으라 하고, 멀리 가버린 하진이가 궁금해한 나의 포스트잇들.


     10. 29

    애도의 한도에 대하여.

    (라루스 백과사전, 메멘토) :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18개월이 넘으면 안된다.

    - 29쪽


    10. 31

       나는 이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결국 문학이 되고 말까 봐 두렵기 때문에. 혹은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다름 아닌 문학이야말로 이런 진실들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 33쪽


    11. 1

       기분이 즐거워진 "방심" 상태들이 있다. 물론 정신은 여전히 말짱하지만. 그럴 때 나는 얘기를 하고, 어느 때는 농담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한 감정 상태에 빠진다. 눈물 흘리고 말 정도로.

    - 39쪽


    11. 4

       오후 여섯 시경 : 집 안은 따뜻하고, 편안하고, 밝고, 깨끗하다. 열심히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나는 집 안을 정리한다 (그러니까 나는 쓰라린 마음으로 즐긴다). 이제부터는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나는 나 자신의 어머니인 것이다.

    - 46쪽


    11. 11

       외로움=대화를 나눌 사람이 집에 없다는 것. 몇 시 쯤에 돌아오겠노라고, 또는 (전화로) 지금 집에 와 있어요, 라고 말할 사람이 더는 없다는 것.

    - 54쪽


    11. 30

       애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자. 그건 너무 정신분석학적이다. 나는 슬픔 속에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슬퍼하는 것이다.

    - 83쪽


    1978. 1. 22

       나는 외롭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외로움이 필요하다.

    - 101쪽


    1978. 5. 6

       오늘 - 내내 침울하던 중에 - 오후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의 순간. 너무도 아름다운 헨델의 오페라 <세멜레>(Semele, 3악장)를 듣다가 눈물을 터뜨리다. 마망이 말하던 단어("나의 롤랑, 나의 롤랑")

    - 130쪽


    1978. 5. 31

       내가 필요로 하는 건 홀로 있음이 아니다. 그건 (작업의) 익명성이다.

       나는 분석적 의미에서의 "작업"(애도 작업, 꿈 작업)을 진정한 "작업" 으로 완전히 바꾸려고 하고 있다 - 글쓰기 작업.

       그 이유는 :

      (사람들이 말하듯) 커다란 생의 위기(사랑, 애도)를 이겨내고자 하는 "작업"은 너무 급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 그런 작업은 나의 경우 글쓰기를 통해서만, 또 글쓰기 안에서만 비로소 완결될 수 있는 것이다.

    - 142쪽


    1978. 6. 9

       FW는 고통스러운 사랑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 있다. 그는 괴로움을 당한다. 언제나 침울하고, 메말라 있고, 그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등등. 하지만 그는 사실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 그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죽지 않았으니까 등등. 그의 곁에서, 그가 말하는 걸 귀 기울여 들으면서, 나는 침착한 표정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 주위를 기울이지만 그의 얘기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마치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일 같은 건 내게 일어난 적이 없는 것처럼.

    - 146쪽


    1978. 8. 18

       아직도 나는 마망과 "이야기를 한다"(현재형으로). 하지만 이 이야기는 마음 속에서 나누는 대화가 아니라(나는 마음속에서 그녀와 얘기를 해본 적이 없다), 살아가는 방식 안에서 존재하는 대화다 :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나는 그녀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려고 애를 쓴다 : 그녀가 했던 것처럼 식사를 하고, 집 안을 정리하면서. 윤리의 미학이 하나가 되는 삶, 비교 불가능한 생활양식, 그것이 그녀가 일상을 보내던 방식이었다. 그런데 여행 중에는 그런 일상의 가사들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별함"을 만날 수가 없다 - 그건 집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니까. 여행은 그래서 나를 그녀로부터 떨어져 있게 만드는 일일 뿐이다. 그녀가 곁에 없는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 그녀가 바로 가장 친숙한 일상이었으므로.

    - 200쪽


    1978. 10. 8

       마망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지금까지는 추상적이기만 했던 사실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없으므로, 이 논리를 따라서 나 또한 죽어야만 한다는 확신은 어쩐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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