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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르셀로나, 도착
    여행을가다 2017. 6. 22. 07:52


       정말이지 긴긴 비행이었다. 사실 혼자 이렇게 비행기 오래 타기 싫어서 멀리 있는 여행지를 생각하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좀이 쑤셔서 잠도 자지 못하고 영화도 제대로 보지 못한 몇몇 시간들만 제외하면 그래도 잘 보냈다. 책을 조금 읽었고, 영화는 <히든 피겨스>를 온전히 봤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다른 몇몇 영화를 졸다 보다 졸다 보다를 반복했다. 아직 배가 꺼지지 않았는데 싶었지만, 기내식이 나오면 꼬박꼬박 먹었다. 맥주는 첫 기내식에 같이 먹었는데, 왠지 몸이 안 받는 거 같아 더 마시지 않다가 간식에 새우깡이 있길래 한 캔 더 달라고 해서 마셨다. 몸이 영 이상해 더이상 마시진 않았다. 원래 앉으려고 예약해뒀던 자리는 옆자리 할머니가 간곡하게 부탁하시는 바람에 바꿔주었다. 바꾼 자리도 나쁘진 않았지만, 예약자리가 좀더 좋았는데. 옆에 앉은 청년은 정말 열심히 영화를 보고, 기내식을 먹었다. 승객 때문에 1시간 늦게 출발했는데, 도착은 10분 늦었다.

       입국심사대에서 소심하게 인사를 시도해보았다. 올라. 그냥 도장만 쾅하고 찍어줬다. 그라시아스. 아무 말도 없는 무표정한 직원을 뒤로 하고 바르셀로나에 입성했다. 공항에서 유심을 사려고 했는데, 줄이 너무 길었다. 여자아이가 너무나 꼼꼼하게 가격과 사양을 체크하고, 뒤에 있는 한국 사람에게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냐는 등 동의를 구하고 있어서 나와 버렸다. 레이크 체크인이라 돈을 더 내야 하는데, 10시까지 간다고 얘기해뒀더랬다. 숙소에서 추천해준대로 버스 대신 택시를 탔다. 택시 안내하는 분이 한 사람이냐고 묻더니 보통보다 좀더 큰 택시를 가리켜서 돈이 더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택시비는 바가지를 쓴다고 해도 그냥 다 내자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기사분에게 프린트해온 숙소 약도와 직접 적은 주소를 보여주면서 여기에 저를 내려줄 수 있나요? 물었는데 기사분이 주소의 숫자를 물어봤다. 내가 7이라고 적었는데, 이게 무슨 숫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7은 이렇게 쓰는 것이라며 웃으면서 볼펜으로 적어 보여줬다. 그러니까 앞머리가 없는 7의 중간에 선을 쫙 그어줘야 된다는 것.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기분 좋은 바르셀로나 하늘이 펼쳐졌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도저히 호텔같지 않아 보이는 길에 나를 내려다줬다. 정말 여기가 맞냐고 물었다. 맞다면서 가리킨 곳에 숙소의 이름이 아주 조그맣게 써져 있었다. 그라시아스. 아저씨가 씩 웃더니 유유히 떠났다.

       그러니까 이 숙소로 말하자면, 흠. 이야기가 긴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쓰고 보니 이것도 기네. 하지만 더 길게 말할 수 있다는. 흐흐-) 나는 이번 바르셀로나 숙소를 알아보면서 내가 창문성애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친구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며 니네집 창문을 보라고 했다. 우리집은 한 면이 모두 다 창문이다. 게다가 밖으로 나무가 보이는 창문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나는 그러한 숙소를 계속 알아봤는데, 비싸거나, 냉장고가 없거나, 체크인이 까다롭거나, 마음에 걸리는 후기가 드문드문 있는 곳들이었다. 내가 숙소 욕심이 있다는 걸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또 알게 됐다. 아무튼 제일 처음 본 숙소가 있었는데, 비싸지 않았고, 공원 옆이라 창문으로 나무가 보였다. 작은 호텔이었는데, 친절하고 1층 레스토랑 음식도 맛있다며 후기가 좋았다. 그런데 냉장고가 없었다. 나는 시원한 맥주를 마셔야 하는데. 일단 예약해두고 몇몇 숙소의 예약과 취소를 반복했다. 주말내내 숙소를 정하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자 스트레스가 쌓여 결심했다. 그래, 첫번째 숙소인 거야! 냉장고가 혹시 프런트에 있냐고 물어보려고 메일을 쓰려는데, 잘 안 쓰는 계정으로 한 달 전에 취소 메일이 와 있었다. 내가 카드 번호를 잘못 입력했었나보다. 호텔에서는 카드 정보를 다시 알려주면 예약을 할 수 있다고 답장을 보내왔지만 메일로 번호를 보내는 게 영 찜찜했다. 결국 나는 이전에는 꼼꼼하게 따졌던 무료취소도 되지 않고, 가격도 이 정도는 좀 비싸다 싶은 방을 예약했다. 몇주동안 이 시기 바르셀로나 방값이 비싸다는 걸 확인했고, 9년만에 주어진 긴 휴가인데 근사한 곳에서 묵고 싶었다. 이곳은 아침을 주는데, 각 방의 바구니에 넣어서 준다고 했다.

       근사한 발코니가 있는 오래된 건물 앞에서 어떻게 들어가야 하나 쩔쩔 매고 있었다. 벨이 있는데, 여러 개이고 이건가 싶은 벨은 눌러도 응답이 없었다. 어쩌나. 예약해두고 못 들어가는 거 아닌가 싶었다. 안 되겠다 싶어 전화를 했다. 문장으로 말하자는 처음의 다짐은 온데간데 없고 당황해서 단어밖에 생각이 안 났다. 내 이름은 이금령이에요. 예약했어요. 지금, 문. 문앞. 그러자 당황하지 않은 상대편이 웃으면서 1-1을 누르라고 했다. 1-1이요? 누르니 여자목소리가 나왔다. 아, 1-1이었어! 고맙다고 말하고 끊었다. 숙소에서 투숙을 하는 것 같은 아저씨가 마침 나타나서 열쇠를 돌려 문을 열어줬다. 그라시아스. 2층에 캐리어를 들고 낑낑거리며 올라가자 예쁘고 착하게 생긴 아가씨가 나를 맞아줬다. 환영합니다. 좋은 여행이었나요? 그 뒤 알아듣기 힘든 말들이 나오자 나는 금새 고백해 버렸다. 아이 캔트 스피치 잉글리시 베리 웰. 아가씨는 왠지 모르지만 조금 긴장되는 목소리로 영어를 잘 못하는 나를 위해 천천히, 그리고 쉬운 단어로만 이야기해줬다. 일단 남은 금액과 레이트 체크인 비용을 결제했고, 부엌을 소개해줬다. '내' 냉장고도 알려줬다. 그리고 아침으로 차를 먹을건지, 커피를 먹을건지 물어봤다. 그리고 숙소 안내 종이를 펼쳐 와이파이 비번과 근처 관광지를 소개해줬다. 어떻게 갈지, 몇번 버스를 탈지도 알려줬다. 쇼핑거리도 알려줬는데, 어떤 거리를 가리키면서 샤넬 같은 거 파는 비싼 거리라고 인상을 찌푸렸다. 물어볼 거 없냐고 해서 없다고 했더니, 언제든 뭐든지 질문하라며 방으로 안내해줬다. 한국어로 땡큐를 어떻게 말하는지 물어보더니, 귀엽게 따라하더라. 그뒤 아리가또, 를 말해서 아가씨도 나도 당황했는데, 덕분에 일본인 손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101호에서 열 두 밤을 잘 거다. 오래된 건물을 리뉴얼한 거라 문이 정확하게 맞지 않고, 문소리도 삐걱삐걱 난다. 나는 여기가 꽤 마음에 든다.


    바르셀로나, 첫째날.  오늘의 행복했던 일 : 바르셀로나 무사히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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