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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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잘 먹는 것서재를쌓다 2018. 1. 4. 23:23
집에도 바람의 길이 있다. 창문을 연다. 현관을 연다. 그러면 바람의 움직임이 생긴다. 조용히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진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떨 때는 살랑살랑 가늘게, 어떨 때는 두껍게, 가끔은 몰래, 또는 세차게 다양한 바람이 지나간다. 거기 어디쯤 장소를 정해서 가늘게 자른 무, 푸른 잎, 배를 가른 생선, 작은 베리류, 고깃덩어리 등등 생각나는 대로 뭐든지 말린다. 요즘은 배추꼬랑이에 푹 빠져 있다. 채에 펼쳐서 며칠 동안 말린 다음 그것을 잘게 채 쳐서 된장국에 넣으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 43-45쪽 어른들의 여름이라면 역시 아이스케키가 아니라 하이볼이다. 땅거미가 지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긴자의 바 '록피시'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바텐더인 마구치 씨가 직접 만든 하이볼이야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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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 다녀왔습니다서재를쌓다 2018. 1. 3. 09:01
출근을 하지 않고, 점심 전에 충무로에 가는 일정이 있는 아침. 새벽에 일어났는데 침이 잘 넘어가지 않아 목감기가 오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동생이 구워준 부침개와 두부와 우유를 넣고 갈아만든 콩물을 아침으로 먹었다. 보이차는 다 떨어져 어젯밤에 티백과 찻잎을 함께 주문했다. 이불을 개고, 바닥의 먼지를 돌돌이 테이프로 훔치고, 간밤의 온기가 사라지지 않게 얇은 이불을 덮어뒀다. 이제 씻어야 하는데 영 귀찮네. 친구가 오늘도 많이 추우니 따뜻하게 입고 다녀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줬다. 책장 앞에서 새해 첫 책을 신중하게 고르고, 작년에 읽은 책 한 권을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겨울나그네님이 추천해 주신 이병우의 음악과 어제 나온 우효의 새 노래를 가만히 듣는 아침이다. - 어떤 사람들에겐 가게를 연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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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킬로그램의 삶서재를쌓다 2017. 12. 29. 00:22
요즘에는 집에 오면 물부터 끓인다. 최근 우리집에서 제일 열일하는 전기포트. 가을에 사둔 보이차가 바닥을 보인다. 뚜껑을 잃어버린 주전자 모양의 옥색 다기에 꽁꽁 뭉쳐진 보이찻잎을 넣고 뜨끈한 물을 붓는다. 첫물은 재빨리 따라 버리라던데, 적합한 시기를 모르겠다. 어떤 날은 따라 버리고, 어떤 날은 찻잎에 묻은 먼지 따위, 하면서 그대로 우려 마신다. 우려내는 찻물이 투명해질 정도로 옅어지면 비로소 안심이 된다. 오늘치의 물을 마셨다고. 덕분에 화장실을 자주 가지만, 가벼운 것이 들어가고 가벼운 것이 빠져나간다는 생각에 즐거운 마음이다. 다만 차의 카페인 때문인지 10시에 잠들었던 취침 시간이 갈수록 늦어지고 있다. 막내는 가을부터 연애를 시작했는데, 우리가 '아프리카'라고 부르는 남자아이가 벌써 두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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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빼기의 기술서재를쌓다 2017. 11. 28. 22:45
짜증나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면,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 사람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떻게 이 상황을 넘겼을까. 내가 상상하게 되는 '그 사람'은 내게 없는 장점들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이것 따위! 하고 힘든 생각들을 냅다 내다버릴 수 있는 담대함, 무한한 긍정적 기운. 최근에 책도 읽고, 팟캐스트도 듣고 해서인지 긍정 기운을 생각하며 김하나 씨를 생각한 적도 있다. 김하나 씨는 의 김민철 씨 인스타에서 처음 얼굴을 뵈었는데, 술을 마시고 찍은 사진들이었다. 포즈들이 굉장히 역동적이고, 코믹하기도 하고, 힘찼다. 긍정 기운이 그득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고, 책을 읽고 난 뒤에는 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둥실 둥실, 두둥실. 올해의 남은 날들은 힘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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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 중에 잼을 졸이다서재를쌓다 2017. 11. 19. 08:59
퇴근길에 깐밤을 만원 어치 샀다. 오천원 어치씩 포장이 되어 있어서 하나를 살까, 둘을 살까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하나는 부족한 거 같아 두 개를 샀다. 집에 꿀도 있고, 우유도 있다. 며칠동안 생각한 밤잼을 만들어 보았다. 깐밤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한번 끓였다. 드문드문 붙어 있는 밤 껍질을 정리해 주고 으깼다. 살짝 식힌 뒤에 우유를 넣고 믹서기에 갈았다. 밤이 퍽퍽해서 잘 갈려지지 않더라. 그렇게 간 밤우유를 냄비에 다시 넣고 끓였다. 꿀을 듬뿍 넣었다. 오래 끓일수록 냄비 밖으로 밤꿀우유가 튀여서 뚜껑을 덮어 뒀다. 그러다 타지 않나 뚜껑을 살짝만 열고 주걱으로 바닥을 뒤적거려 줬다. 또 덮어 두고, 또 뒤적거려 줬다. 잼을 만드는 것은 이 일의 반복이구나 생각했다. 그 시간이 은근히 길어서 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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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완전하게서재를쌓다 2017. 11. 18. 10:07
혼자 여행가 있을 때, 동생이 돌아오면 읽어보라고 했던 책을 이제서야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천둥번개도 치고, 지진도 났다. 세상은 불완전하다. 이 책으로 일상에 제법 힘을 얻었다. 읽으면서 생각한 건, 내가 나 자신을 불완전하게 생각하는 건 남들과 비교를 해서라는 것. 비교하게 될 때, 나는 내가 부족한 걸 계속 떠올리는 거다. 그렇지만 내겐 남들에게 없는 것들도 있는 걸. 불완전하다고 느낄 때마다 그것들을 끊임없이 떠올려야지. 다 읽은 책을 세가지 색 스티커로 분류해 놓는 방법은 정말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소장할 책, 누군가에게 줄 책, 누군가를 주지도 못하겠다 그냥 버릴 책. 이렇게 세가지 색으로 책을 분류해 놓고, 처분을 한다는 것. 나는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일단 사두고 책장에 꽂아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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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한 순간들극장에가다 2017. 11. 12. 22:01
그러고 보니 십일월 첫날이었네. 충무로에서 영화 을 보았다. 조림이는 니카라과로 가기 전에 롤랑 바르트의 를 함께 읽자고 했다. 조림이는 소설보다 에세이를 좋아하고, 특히 일기를 좋아한다. 영화를 볼 때에는 책을 다 읽은 후였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책 생각이 났다. 는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날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이다. 일기는 2년 뒤에 끝났고, 6개월 뒤 롤랑 바르트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한 달 뒤 사망한다. 그는 일기에 생전 어머니를 떠올리고, 그리워하고, 그녀가 이제 곁에 없음을 슬퍼했다. 영화 은 미래의 이야기이다. 인공지능이 죽은 이의 모습을 하고 앉아 있다. 남은 이는 이제는 세상에 없는 이의 모습을 마주하고, 과거에 함께한 이야기를 나눈다. 남은 자는 죽은 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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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서재를쌓다 2017. 11. 11. 08:28
며칠 전, 예스24와 비씨카드가 만든 '책읽아웃' 팟캐스트를 들었다. 팟캐스트는 주로 불광천 길을 걸으면서 듣는다.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다. 김하나와 김동영이 번갈아서 진행을 하는데, 김동영 편에 뮤지션 오지은이 나왔다. 둘이서 앞으로 나올 책 이야기를 하는데, 오지은이 말했다. 내 식대로 요약을 하자면 이렇다. 왜 나는 여행을 가서도 마냥 행복하지 않은가, 그런 감정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고, 쓰고 있다고 했다. 지금 글이 잘 진행되지 않아 괴롭다고 했는데, 방송을 듣고 이 책을 기다리게 되었다. 저도 그래요, 왜 그런가요, 알려주세요, 오지은님, 이런 심정이랄까. 김동영도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두 사람이 친해서 그런지 이야기하는 게 꽤 재밌었다. 지난 추석에는 이 책을 재미나게 읽었다. 한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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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를 찾아요서재를쌓다 2017. 10. 24. 22:30
한밤중의 SNS 탐독은 위험하다. 그곳에는 넘치게 잘 사는 사람들 뿐이고, 한밤중의 나는 부족하고 부족한 사람이 된다. 의 김민철 SNS에 올려진 책 추천글을 보고, 저자의 SNS로 넘어갔다. 그곳엔 고운 아내와 귀여운 딸, 자상한 남편, 아름다운 집이 있었다. 모두 따뜻한 사진들에 담겨 있었다. 다음날 그 분위기를 계속 떠올리다가 결국 책을 주문했다. 제목이 . 언젠가부터 현실적인 이유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없어져 버린 오후. 그 오후를 온전히 찾을 수 있었던 여행지에서의 이야기이다. 여행지에서 경험한 이야기가 좀더 많았으면 싶었고, 눈이 엄청나게 쌓인 한겨울의 시라카와고에 가고 싶어졌다. 중간중간 멈칫, 하게 되는 문장들이 있었다. - ... 어제부터 아빠와 따로 살게 되었다고 털어놓던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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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병든 자서재를쌓다 2015. 3. 16. 07:21
시인은 인도에 갔다. 시인의 꿈이었다. 인도에 가는 일이. 시인은 인도에 가서 보고, 생각하고, 보고, 생각했다. 지난 일들에 대해 생각했고, 지금의 일들도 생각했고, 때로는 앞으로의 일들도 생각했다. 시인은 돌아왔고, 얼마 뒤 다시 인도에 왔다. 시인은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한 해 만에 다시 인도에 왔다." 김연수의 추천글을 읽고, 출간되었을 때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책인데, 어느 날 다른 책들과 함께 주문해 놓고는 가만히 책장에 꽂아두었었다. 2015년 겨울 어느 날, 가만히 꽂혀 있는 하얀 책등을 보게 됐고, 읽을 때라고 생각했다. 기승전결의 여행기를 계속 읽다가, 기승전결이 없는 시인의 여행기를 읽고 있으니 처음에는 어지러웠다. 무슨 풍경인지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러다 삼분의 일 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