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해당되는 글 8건

  1. 홀딩, 턴 2018.02.15
  2. 쇼코의 미소 (4) 2016.10.30
  3.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2015.03.29
  4. 반딧불 언덕 2015.02.25
  5. 스토너 (2) 2015.02.03

홀딩, 턴

from 서재를쌓다 2018.02.15 00:19



   책을 먼저 건넨 뒤, 친구는 내 얘길 가만히 듣더니 말했다. 그 책이 지금 너한테 좋을 것 같아. 잘 읽어 봐. 친구는 두 권을 사서 한 권에는 내 이름을, 다른 한 권에는 자기 이름을 적어달라고 했단다. 어떤 부분은 정말 설레였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친구가 한 말이 맞았다. 후반부는 좀 아쉬웠다. 후반부에 내가 한 생각은, 아, 소설이구나. 소설을 읽어도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 소설이 좋다. 지어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소설. 요즘 내가 계속 찾고 있는 소설. 마음에 툭툭 걸리는 문장들이 많았다. 우리가 함께 춤추는 순간들은 정말이지 행복했는데,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그렇지만 춤추는 순간들이 있었기에, 함께 한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 고 생각해 본다.



   남자는 여자에게 처음 만났을 때 부터의 마음에 대해 고백한다. 단둘이서 술을 마시게 된 봄밤에. 여자는 남자가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여자는 요새 직장 문제로 힘이 든다. 남자는 여자에게 MP3 플레이어에 음악을 담아 마음을 전하고, 일에 지친 여자는 플레이어를 내내 가지고 다니기만 하다 야근을 하던 어느 밤에 듣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만나기로 했는데, 여자가 야근 때문에 나가지 못하겠다고 하니, 남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말한 밤이다. 여자는 음악을 듣다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움직이고 설마 지금까지 기다리겠어, 생각하며 약속장소였던 카페로 간다. 남자가 있다. 여자가 들어온 지 모르는 남자는 컴퓨터를 하다 기다리는 사람이 오는 지 문쪽을 보고, 또 컴퓨터를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가지 않고 건너편에 앉아 남자를 가만히 지켜본다. 다음은 소설의 문장,


   영진이 빈 잔을 들었다 내려놓는 걸 보고 지원은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 대각선을 봐요.

   영진이 노트북 화면과 출입문을 차례로 본 뒤 지원을 쳐다보기까지 몇 분이 걸렸다. 마침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지원은 환하게 웃으려고 했으나 순간 울컥 눈물이 났다. 뜻밖의 상황에 영진과 지원 모두 당황했다. 영진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고 지원은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웃으려 애썼지만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회사 일에 지쳐서 몇 달 동안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빗장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영진이 지원의 등을 토닥이다가 팔을 둘러 가볍게 안았다. 지원은 영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 왜 울어요.

- 고마워서 그래요.

- 뭐가 고마워요.

- 기다릴 줄 몰랐어요. 

- 기다린다고 했잖아요. 늦게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주위 사람들의 시선, 카페 안에 흐르던 음악과 소음, 그들을 둘러싼 것들이 모두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둘만 남고 둘만 보일 때, 세계에서 분리된 두 사람이 서로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사랑한다는 고백뿐일 것이다. (142-143쪽)



그리고, 마음에 툭툭 걸렸던 문장들.


- 그때 우리도 일찍 와 있었잖아. 그런데 30분 내내 '사랑의 인사'가 흘러나오는 거야. 아, 결혼생활이 이렇다는 거구나. 제일 좋아하는 시디를 한 장 고른 다음 평생 들어야 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해가 쉽더라고.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메타포였던 거야. (10쪽)


   7년 전에 연애를 시작하면서 영진을 소개했을 때 이나는 착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인다고 했고 승아는 반듯하고 소신 있는 사람 같다고 했다. 언니는 순한 것 같지만 고집스러운 면이 느껴진다고 했다. 대체로 영진의 소탈함과 모범생 기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지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든 말이 모여 영진의 된다는 걸 알았다. (121쪽)


   취객들의 대화에 지원은 소리 내어 웃었다. 흩어지고 사라질 웃음이지만 위로가 되었다. 마음이 무너질 때 사람을 끝까지 지탱하고 보듬어주는 게 있다면 유머와 애정일 것 같았다. (123쪽)


   결혼생활 내내 지원은 누군가를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가, 생각했다. 한 사람은 수천 개의 갈래로 나뉘고 수많은 변수로 이루어진다. 그나 그녀를 잘 안다고 생각해도 그 앎 때문에 오히려 관계 속에서 자주 길을 잃고 좌절하게 된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보석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130쪽)


   나이가 먹어갈수록 호감이 반감으로 바뀌는 건 쉬워도 무감이나 비호감이 관심과 애정 쪽으로 돌아서기는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진에 대한 감정은 처음 손을 잡은 봄밤 이후로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싫은 건 아닌데 영진이 더 만나자고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건너편에 홀로 앉아 있는 영진의 허기와 고단함과 외로움이 이쪽으로 건너왔다. 오지 않아도 기다리겠다고 하는 마음과 실제로 기다리는 마음, 기약 없음을 견디는 마음이 어떨지 짐작해보았다. (141-142쪽)


   언니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인생의 어떤 순간에 접어들 때마다 그런 가정을 해봤다. 결론은 사는 게 심심했겠지, 인생의 많은 부분에 대해 모르고 지나갔을 거야, 로 모아졌다. 점점 더 언니가 있다는 게 행운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언니는 지원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현지인 가이드처럼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학년과 학교의 삶에 대해 알려주었고 선진 문물을 전수하듯 좋은 노래와 영화를 소개해주고 들려주고 보여주었다. 저만치 앞서가다가 가끔 뒤를 돌아보며 지원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인생에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게 축복이라는 걸 어른이 되면서 절실히 깨달았다. (162쪽)


... 시간과 물질과 감정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운 것인지 짐작조차 못했다. (164쪽)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와 자정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여름밤의 공기는 서늘했고 수박 냄새가 났다. 음악 잘 들었다고, 힘들었는데 위로가 됐다고 하자 영진은 말없이 웃었다. 오랜만에 지원은 자기 손이 아니라 맞잡은 영진의 손에 집중했다.

   그 뒤로 사귄다거나 애인이라고 말할 때 주저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 사람 사이는 좁아지고 틈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밀착되었다. 영진과 함께 있는 게 자연스럽고 제 옷을 입은 것처럼 편했다. (197-198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건 뭘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뭘까. 지원은 자주 영진에 대해, 영진을 사랑하게 된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 때면 사랑을 마법에 비유한 표현들에 수긍이 갔다. 그날 카페에서 영진을 만난 이후로도 일상은 똑같고 인생의 구성요소는 그대로인데 감정의 결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기 위해 일의 순서를 조정하고 먼 길을 달려가고 오래 기다렸다. 그런 장애들이 사랑의 방해물이 아니라 촉매제 역할을 해주었다. 별것 아닌 일도 상대에게 얘기하고 의견을 물어보고 반응을 기다렸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울어지고 그와 겹쳐졌다. 그동안 삶의 중심에 있던 것들이 영진의 바깥으로 밀려났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번에는 온도와 색채가 달랐다. (198-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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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from 서재를쌓다 2016.10.30 16:48





   마음이 가을 같다. 갑자기 스산해졌다. 계속 헤매고 있는데, 출구가 어딘지 모르겠다. 무리 속에 끼여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다가 헤어지면 마음이 더 가을 같아진다. 사실 무리 속에 있을 때도 온통 가을 일 때도 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어떻게 출구를 찾아야 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시월.


   목요일에는 회사 모임이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Y씨랑 백석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 아저씨가 창을 내려줬는데 밤바람이 시원했다. 내가 먼저 내렸다. Y씨는 택시를 계속 타고 갔다. 역 앞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데, 내 앞으로 양복을 입은 외국인이 걷고 있었다. 뽀글뽀글한 컬에 까만 피부를 가진 외국인이었다. 백팩을 메고 있었고, 한 손에 하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야식이거나 다음날 아침일 것이다.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새 구두인건지, 오늘 하루가 힘들었던건지 걸음이 조금 어긋나 있었다. 나는 그의 걸음걸이에 의지해서 걸었다. 어쩐지 우리가 같은 방향일 것 같았는데, 정말 그랬다. 그가 오피스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뒤따라오는 나를 보더니 유리문을 잡고 기다려줬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에게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어디서 왔는지, 한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결국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까딱이며 먼저 내렸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잡고 올라가는 짧은 시간동안에도 세심한 행동으로 나를 배려해줬다. 어쩌면 오래 보아오고, 오래 얘기해온 사람들보다 (얘기를 나누었다면) 그와의 대화가 요즘의 나를 더 위로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쇼코의 미소> 작가와의 만남 시간이 생각났다.


   시월의 어느 날, 나는 백석의 책방에 앉아 최은영 작가를 기다렸다. <쇼코의 미소>는 올해 내가 읽은 한국소설 중에 제일 좋았다. 최은영 작가는 쑥스럽고 긴장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연을 해야한다는 말을 듣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하지 못해 고민을 하다 써 왔다면서, 써온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종이에는 작가의 대학교 시절 이야기가 있었는데, 소심했고 자존감이 낮은 시절의 이야기였다. 작가가 써온 이야기를 모두 듣고, 책방에 온 독자들과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한 독자가 말했다. 다행이라고. 소설을 읽고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고, 방금 종이에 써온 이야기를 듣고나니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그러면서 작가에게 고맙다고 했다. 자신이 만나 본 작가 중에 소설과 다른 사람들이 많았다면서. 정말로 그녀는 자신의 소설을 닮은 사람이었다. 따뜻하고 배려심이 있는 사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좌절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믿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의 매력을 느끼는 사람,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 내가 그 날 받은 느낌이었다.

   나는 이 소설집에서 '한지와 영주'가 제일 좋았는데, 어떤 독자가 질문을 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보다 영어가 타국어이면서 영어로 소통하는 사람들이 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이해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작가는 실제로 그런 경험들을 해 보았다고 했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더 잘 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통하기 위해서 아주 유창할 필요도 없다고. 단순한 말이, 표정과 몸짓이, 가슴을 파고들었던 경험이 많았다고. 그리고 아는 척하면서 글을 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전경린의 말을 인용하며 내가 살아보지 않은 나이에 대해서 쓰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영주처럼 실제로 유럽의 수도원에서 2개월동안 생활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힘들었던 시절, 몰타에서 9개월을 생활했는데 그 시절이 자신을 버틸 수 있게 만들었다고 했다. 지금 책이 이렇게까지 잘 팔리는 일이, 기적과 같다고,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다고 했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 <최악의 하루>에서도 마지막 장면에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내내 불통했던 주인공이 가을이 만발한 남산의 밤길에서 아침에 잠깐 만났던 일본인 작가를 만나, 아주 간단한 말들로 소통하고 위로받는 장면. 어제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맥주를 마셨다. 누군가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라며 게임을 제안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나씩 돌아가며 말하는 것이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다고 말했고, 요리를 잘한다고 말했다. 끈기는 없지만 호기심이 많다고도 했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졸라 잘 부르며, 똑똑하다고 말했다. 고맙게도 어릴 때 부모님에게 사랑을 아주 많이 받았다고도 말했다. 취한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두번째 만나는 거였는데, 첫번째 수업 때 굉장히 사나워보이고 세 보였던 사람과 실제로 얘기해보니 다정한 사람이었다. 사람들과 헤어지고 버스를 탔는데, 술 기운에 살짝 조는 바람에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났다. 덕분에 추운 날씨에 몇 정거장을 걸었다. 그 길이 내 마음 같았다.

   아무래도 가을을 심하게 타고 있는 것 같다. 이번주에는 야근을 여러번 했고, 멀리서 여행 중인 친구의 엽서를 받고 스위스에 있는 도서관을 검색해봤다. 머리를 짧게 잘랐고,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틀어놓고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시월의 주말이 끝나지 않길 바라며 일요일을 조용히 보내고 있다. 다음 주에는 자주 걸어야겠다. 강아솔을 들어야겠다.





   한지와 우연히 마주치면 배와 등의 피부가 따끔따끔했고 피가 머리쪽으로 쏠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고, 자꾸 말을 더듬게 됐다. 한지가 멀리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종아리부터 목뒤에까지 불이 번지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지질시대 구분표를 생각했다.
   나는 중학교 일학년 때 선물로 받은 지질시대 구분표를 벽에 붙여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려가길 좋아했었다. 나중에는 당시 살았던 생물들의 이름을 시대별로 차례대로 외웠고, 고등학교에 입할할 때쯤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할 수 있었다.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는 분명 존재했던 것들의 이름이 소중하게 느껴져서였다.
   원시지구.
   원시지구에는 어떤 생물도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검은 칠판을 상상했다.
   시생대.
   박테리아와 남조류, 고세균류가 등장했다. 백묵의 끝으로 그린 작은 점들.
   원생대.
   해파리가 나타났다. 몸속이 환히 보이는 투명한 해파리들.
   캄브리아기.
   조개와 산호, 삼엽충.
   오르도비스기.
   불가사리와 바다전갈로 불리는 생물, 사라져버린 코노돈트.
   실루리아기.
   달팽이, 대합, 홍합, 턱이 없는 어류들.
   나는 기도문을 외우듯이 그것들의 이름을 나열할 수 있었다. 턱이 있는 어류, 페어, 육지 달팽이, 해백합, 파충류 같은 포유류, 소철류, 시조새, 원시 현화식물. 그 이름들을 속으로 외울 때면 바깥 세계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고, 내 안의 생각과 느낌들이 무뎌졌으며, 나라는 존재가 조금은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어디에서든, 어느 시간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슬플 때, 불안할 때, 화가 날 때, 누군가가 내 마음을 쥐고 흔들 때, 나는 그 이름들을 그저 간절하게 불렀고,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현실의 고통에서 나를 분리시켜줬다. '원시지구'로 시작해서 '여러 종류의 발굽이 있는 동물'까지 중얼거리고 나면,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의 이름을 불러준 것 같았다. 그럴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 '한지와 영주' p. 157~159




  1. 2016.10.30 21:3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6.10.31 20:47 신고 BlogIcon GoldSoul

      역시. 새봄씨도 좋았죠?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도 했더랬어요. 요즘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세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는 이야기요. 저는 다른 공간이고, 다른 사람이고, 다른 시간이지만 언젠가 내가 꼭 한번 해봤던 생각과 고민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좋았어요.
      아, 시월은 좀 힘들었어요. 흑흑- 십일월은 좀 괜찮아지길! 힘내기로요! 항상, 고마워요. :-)

  2. BlogIcon wonjakga 2016.11.01 19:23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발빠짐 주의를 내려다 보고 있노라면
    늘 맘빠짐 주의라고 읽혀요. 그렇게 읽힘과 동시에 숭덩숭덩 맘이 빠져가고 있음을 느끼죠.
    금령님이 잘 하시는 것 또 있어요.
    글을 잘 쓰세요.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글을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6.11.07 20:54 신고 BlogIcon GoldSoul

      따뜻한 현정씨- 고마워요고마워요! :-D
      잘 지내고 있어요? 발도, 마음도 빠지지 않게 조심해요.
      저는 요즘 평일에는 늘 그렇듯 회사-집을 오가고, 토요일에는 맥주를 배우러 가요. 좋아해서 마시기만 하던 것을 기초적인 것이지만 공부하니 꽤 재미나요. 현정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에드가 말했다.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죽으면 우리의 영혼이 여행을 떠난다고 믿었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려면 삼천년이 걸리는데 돌아왔을 때 자신의 몸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남아 있어야 영혼이 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보존이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그 정도로 보존에 신경을 쓰진 않아요."

   염색체도, 미토콘드리아도 없는.

   "삼천년이라, 그리고 돌아온다고요." 그녀가 말했다.

   "그들에 따르자면 그렇죠." 그가 빈잔을 내려놓고 이제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고마워요." 니나가 말했다. 그리고 서둘러서 물어보았다. "영혼같은 걸 믿나요?"

   그는 손으로 식탁을 누르며 잠시 서 있었다. 작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젓더니 그는 "그래요." 라고 대답했다.

- p.210 '위안' 中

 

*

 

   그녀 혹은 그가 있다. 그가 길을 걷고 있다. 군데군데 크고 작은 웅덩이들이 있었지만, 나쁜 길은 아니었다. 길을 걷던 그녀 앞으로 갑자기 커다란 비바람이 몰아친다.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그녀의 몸이 흔들릴 정도다. 그녀는 길가의 작은 나무 아래 몸을 기댔다. 나무 아래였지만 비바람을 온전히 피할 수 없었다. 그는 흠뻑 젖었다. 몸이 오돌오돌 떨렸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비바람이었다. 그녀는 작은 나무에 기대어 몸을 잔뜩 숙이고 비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리고 비바람이 지나갔다. 멈춘 게 아니라 지나갔다. 사라진 게 아니라, 커다란 회오리를 만들며 그가 지나왔던 길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비바람이 지나고 이내 햇볕이 나타났다. 그녀는 길을 계속 걸었다. 그녀의 몸 여기저기서 가느다란 수증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시간이 지난 후, 그 혹은 그녀는 기억했다. 어마어마한 바람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고. 따듯한 무엇이었다고. 그리고 그녀 혹은 그는 생각했다. 사라지지 않은 그것이 언제고 자신을 다시 찾아올 거라고.

 

    2014년 9월 12일 직인이 찍힌 엽서에 소설의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앨리스 먼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글은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이 있어 읽어볼 생각을 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그 문장들에 반해 책을 구입했다. 두꺼운 책이라 오래 걸렸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고 덮어버렸고, 몇 개월 뒤에 다시 펼쳤다.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를 끝내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그 이야기가 끝나니, 그 다음 이야기는 그 전 이야기보다 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니 위와 같은 풍경이 머릿 속에 그려졌다. 소설 속에 나오는 비바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소설들이 그랬다. 무슨 커다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는데, 결국 벌어지지 않았다. 조용히 마무리됐다. 어떤 이는 마음을 여미고, 어떤 이는 서서히 누군가를 잊어갔다. 그런 결말들이 쓸쓸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해서 마음에 들었다.

 

 

반딧불 언덕

from 서재를쌓다 2015.02.25 23:50

 

 

    지난 도쿄 여행 때 산겐자야에 다녀오질 못했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산겐자야가 <수박>을 촬영한 지역이라는 걸 알았다. 가고 싶었지만, 여러 계획들이 있어 가질 못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나왔을 때, 앗! 산겐자야다! 했다. 이 전에 시리즈가 두 권이나 출간되어 있었는데, 산겐자야가 배경인 줄 몰랐다. 하긴 그때는 <수박>의 배경이 산겐자야인 지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바로 구입해서 읽었는데, 마음에 들었다. 미스터리물인데 세지 않다. 잔잔한 미스터리물이다. 그리고 매 단편마다 맛있는 요리가 나온다. 맥주도 나온다. 이야기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 갖춘 셈. 이야기들은 조금씩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소소하고 따뜻해서 정이 갔다.

 

    그러니까, 도쿄 산겐자야 한적한 곳에 맥주바가 있다. 조용한 바다. 하지만 단골손님들이 가득 찰 때도 있으니, 매번 조용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 곳의 마스터, 구도 데쓰야.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맥주바 가나리야에 찾아오고 네 가지 도수의 맥주 중에 알맞은 맥주를 시킨다. 원하는 안주를 말하기도 하고, 마스터가 눈치껏 알맞은 안주를 만들어 내어오기도 한다. 그러면 손님들은 모두 만족한다. 세상살이 쉽지 않으니 다들 하나 둘씩 문제나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고, 손님들은 마스터나 단골손님에게 그 문제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한다. 이 구도 데쓰야라는 마스터는 조용하고 용-하다. 손님이 말하지 않아도 그 고민을 다 안다. 그리고 해결책이 될 수 있는 힌트를 넌지시 건넨다.

 

    이런 문장들에는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곧 벚꽃이 필테니까.

 

   도부이세사키 선 아사쿠사 역을 빠져나와 걸어서 아즈마 다리를 건너 상류를 따라 2백 미터쯤 거슬러 올라간 곳에 스미다 공원이 있는데, 벚꽃 피는 계절이 되면 꽃구경을 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명소다. (...)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잠들어 있다고 하면 퇴폐적인 낭만이 느껴지지만, 그 방수 시트를 보는 순간 갑자기 시트에 둘둘 말아 놓은 부패한 시체의 이미지가 떠올라서 흥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적어도 돗자리 정도는 마련할 수 있는 거 아니나며 괜히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벚꽃은 떨어질 때가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평일의 한낮이라면 더욱. 취객도 없고 시퍼런 방수 시트도 없고, 그저 혼자서 벚나무 아래 앉아 있는 게 무엇보다 바람직하다.

   "그것이 가능한 지금은 의외로... 아니, 아니야."

   손에 든 캔 맥주의 마개를 당기자 성대한 하얀 거품이 쏟아져 나오며 흘러넘쳤다. 서둘러 입술을 가져다 대려다가 그러고 있는 자신이 싫어져서 관뒀다.

    바람은 바람인 채로 좋다. 아, 평일의 한낮.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마음껏 벚꽃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이름 있는 좋은 술 약간과 백화점 지하에서 산 고급스러운 안주 같은 걸 옆에 두고서 먹고사는 데 급급하기만 한 세상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벚꽃을 상찬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사치는 없다. 하지만 현실의 내 모습을 보면 결국은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살아가기 위해 내 한 몸 보전하느라 급급하다. 그러니 바람은 영원히 바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p. 124

 

    이 문장들을 읽고는, 진정 가나리야에 가고 싶었다.

 

   가나리야는 결코 젠체하는 가게가 아니다. 각 요리의 양도 충분하게 제공된다. 가시와기는 마지막 하나를 다 먹고서 혀끝에 남은 환상적인 맛을 맥주로 씻어 낼 때까지 시간 감각을 아예 잃었다. 가게 밖에서 부스럭 하는 작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알 바 아니다. 맛있는 안주와 맛있는 술. 이 세상에 근심거리는 수없이 많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잠시 모든 것을 잊으련다.

p. 131

 

   이 소설에 더 마음이 갔던 것은 작가의 이력 때문이기도 했다. 기타모리 고. 서른 다섯에 데뷔해 마흔여덟에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30편 이상의 작품을 발표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발표한 가나리야 시리즈는 모두 네 권. 나는 이제 한 권을 읽었으니 세 권의 책을 더 읽으면 가나리야 맥주바에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이 이유 때문에 이 소설이 더 애틋해졌다. 그래서 현재 출간되어 있는 두 권을 빨리 읽고 싶기도 하고, 더 묵혀두고 싶기도 하다.

 

 

 

스토너

from 서재를쌓다 2015.02.03 22:09

 

 

   사실 나는 이 책의 보도자료에 반했다. 책을 소개하는 보도자료를 읽고 나는 내가 아는 한 남자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이 책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첫 문장을 읽기도 전에. 친구에게 함께 읽자고 책을 보내면서 이 책이 우리의 2015년 최고의 책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먼저 책을 다 읽은 친구와 맥주를 마시는 저녁에, 내가 물었다. 어땠어? 친구가 말했다. 진짜 있는 사람 같앴어. 스토너. 그리고 생각했어. 이 사람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은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로 끝난다. 이 책은 윌리엄 스토너라는 남자의 한 일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톰 행크스의 추천글. "이것은 그저 대학에 가서 교수가 된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매혹적인 이야기이다." 정말 그렇다. 부모님의 일손을 돕기 위해 농과대학에 진학한 한 남자가 영문학 교양과목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만나게 되고, 문학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남자는 교수가 되지만 성공한 교수는 아니었다. 남자는 첫눈에 반한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은 지독하게 불행했다. 사랑하는 딸도 있었지만, 딸과 남자는 서로 마음껏 사랑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친구의 말대로, 이 사람처럼 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는 사랑에 빠진 대상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문학에 빠졌고, 문학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내를 사랑했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했다. 딸 아이도 마찬가지. 그리고 단 한 번, 그에게 진정한 사랑이 찾아왔고, 그는 그녀 안에서 행복을 만끽했다. 함께 책을 읽고, 문학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을 나눴다. 다만 그는 투쟁하거나 싸우지 않았다. 밀물처럼 몰려온 행복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그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행복을. 밀물의 기억이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체념하는 사람. 내가 읽은 스토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책 뒤표지에 있던 "슬프고 고독한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위안"이라는 문장이 정말 잘 어울리는 소설.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50년 후에야 빛을 발한 소설. 작가는 스토너를 허구의 인물임을 분명히 했지만, 친구의 말처럼 어디선가 열심히 살다 죽었을 것만 같은 소설. 그게 당신같기도 한 소설. 그래서 내가 마음이 아픈 소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 소설.

 

    이 책에서 가장 신났던 부분이다. 159페이지부터 160페이지. 아내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오랜 기간 부재 중일 때, 스토너는 딸과 함께 일상을 산다. 그 일상은 소소하고, 평온했으며, 평화로웠다. 그는 그 시간 동안 딸을 더욱더 사랑했으며, 문학에 더욱더 깊이 빠졌다. 그리고 경험하게 되는 어느 순간에 대한 묘사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지만 자신이 성장했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순간의 스토너.

 

    그는 이 새로운 발견에 슬프면서도 기운이 났다. 자신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학생들과 자신을 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기계적인 단계들을 반복적으로 밟으며 그의 강의를 끈기 있게 버텨내던 학생들이 당혹감과 분노를 안고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반면 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없는 학생들은 그의 강의에 참석하고, 복도에서 만나면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그의 말투에 자신감이 붙었고, 그의 내면에서는 따스하면서도 단단한 엄격함이 힘을 얻었다. 10년이나 늦기는 했지만, 이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자신은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기도 하고 더 못나기도 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교육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책에 적은 내용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어리석음이나 약점이나 무능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예술의 위엄을 얻은 사람. 그가 이런 깨달음을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 p. 159-160

 

   160페이지의 스토너를 꿈꾸며.

 

 

 

Tag // 소설, 스토너,
  1. BlogIcon 534 2015.04.16 19:24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스토너 글 때문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스토너 글 남기신 걸 보고 저와 책 취향이 비슷하실 듯 하다 싶어 이리저리 둘러보니 정말 그래서 여러 이야기 즐겁게 읽고 갑니다^^ 앞으로도 종종 놀러오게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책에 대한 이야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5.04.19 14:33 신고 BlogIcon GoldSou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스토너 쓸쓸하고도 충만한 느낌이 드는 책이었어요.
      저 그런 느낌 좋아하거든요. 책이든 영화든 사람이든간에요.
      헤헤- 자주 뵈어요. 저도 놀러갈게요.
      비 내리는 일요일, 충만하게 마무리 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