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에 해당되는 글 6건

  1. 아이 필 프리티 (2) 2018.06.28
  2. 2018.06.20
  3. 오늘 뭐 먹지? 2018.06.14
  4. 다정한 사람에게 다녀왔습니다 2018.06.10
  5. 유월 (4) 2018.06.09

아이 필 프리티

from 극장에가다 2018.06.28 22:02


 

   극장에 가는 중이었다. 집에서 연신내까지는 걷고, 연신내에서 버스를 타고 은평몰까지 가기로 했다. 아직 초여름이고, 아침이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 커다란 나무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는데, 순간 엄청나게 행복해졌다. 나뭇잎들이 보이고, 그 나뭇잎들이 만들어낸 그늘이 보이고, 그 나뭇잎들을 흔들거렸던 바람이 내 얼굴에 닿는 것이 느껴지고. 어제까지의 나는 조금 불행했던 것 같은데, 오늘의 나는 무척 행복했다. "나는 나!" 얼마 전에 읽은 문구를 떠올렸다. 그래, 나는 나. 이렇게 초여름 아침 바람에 행복해지는 사람. 이 풍경에, 내가 그동안 겪었던 온갖 소소한 행복들이 줄줄이 떠올려지는 사람. 이런 나를 기억하자고, 이런 나를 생각하자고 다짐했다. 내가 행복해져야 함께 있는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다. 영화는 흠.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너무나 잘 알겠는데, 그걸 풀어내는 방식이 너무나 유치했다. 그래도 아침의 시간들이 있어 아깝진 않았다. 사실 웃으면서 잘 봤다;; 보경이와 덕수궁을 거니는데, 보경이가 그랬다. 무엇보다 내가 굳건해야 한다고. 내 마음과 의지가 든든하게 뿌리 내려 있어야 어떠한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내가 굳건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옳을 수 있다고. 정말 그런 것이다. 내가 단단하면 남들이 생각나는 나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유월에는 공휴일이 많았던 탓에, 평일휴일이 없는 저번주와 이번주는 너무나 더디게 가고 있지만, 내내 생각하고 있는 건 나의 뿌리, 나의 줄기, 나의 영양분, 나의 잎맥, 나의 생기. 그나저나 미셸 윌리암스는 왜 그 역할을 맡은걸까. 상암CGV가 없어지고 영화보는 시간이 현저하게 줄었다. 흑-





  1. 페이퍼 2018.06.30 08:46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정작 그 말을 한 사람은 부채같은 바람에도 흔들렸다고 한다. 큰 일에는 오히려 담담하고 대담한 마음을 먹고 티끌같은 일에는 사정없이 휩쓸렸다고 한다 ㅋㅋㅋㅋㅋㅋ
    요즘 나는 그 날 내가 언니한테 커피집에서 했던 얘기, 덕수궁에서 했던 얘기들을 나 자신에게 하고 있어. 어떤 날은 마음이 너무 평온하고 어떤 날은 걷잡을 수 없기도 해. 그런데 어제 전에 다니던 직장 동료들을 만났거든? 그 중에 한 친구가 내가 해주는 얘기에 막 웃더니 한참 후에 그런 얘길 하더라고. 나는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느껴본 지가 언젠지 모르겠다고. 언젠가부터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고. 행복해 보인다. 라고 얘기하는데 기분이 이상하더라? 나는 짜증나! 힘들어! 하고 얘기한 일인데 상대방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 조차 부럽다고 한다니. 얼마나 피곤하고 지쳐있는걸까 걱정도 되고 말야.
    언니가 쓴 글 처럼 결국 나인 것 같아. 어떤 상황이 온다 해도 나를 놓치지 않는게 제일 중요할테니 오늘도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ㅎㅎ

    언니가 선물해 준 책은 다음 독서 모임 책으로 정해졌어! 열심히 읽고 열심히 얘기 해 본 후에 또 언니랑도 책 얘길 하고 싶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상하게 여름이 오면 유럽에서 혼자 여행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진짜 더웠는데 지금 내가 이 거리를 걷고 있다는 현실이 믿기지않고 감격스럽고 아주 작은 풍경도 감동적이었던 그 날의 내 모습같은 거. 아직 남은 여름은 행복했던 여름의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이겨보자 ㅎㅎㅎ
    좋은 주말 보내 : )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7.01 09:17 신고 BlogIcon GoldSoul

      부채같은 바람에 흔들려서 더 인간적이었어! 흐흐-
      우리 뼛속까지 잘 알고 있으니, 나를 잘 일으키기 위해 매순간 노력하는 것이야.
      나도 부정적인 마음이 들 때마다 계속 생각해. 나는 나! 나를 굳건하게 만들자아.
      그치? 정말 그렇지? 여름의 열기가 후끈하게 느껴지면 나도 그때 혼자 걸었던 길들이 막 생각나. 그때는 많이 외로웠었는데, 이렇게 그리워하게 될 지 몰랐지 하고. 잘 보내자!
      책도 많이 읽구, 나를 굳건히 하고. 책 다 읽고 우리 또 만나요- :)

from 모퉁이다방 2018.06.20 22:23



   지난 주부터 아침 저녁 식단을 조절하고 있다. 대충 많이 먹던 것을 신경써서 적당히 먹으려고 노력 중이다. 퇴근하고 와서는 몸을 움직이려고 한다. 동생이 추천해 준 초보 홈트 영상을 보고 30분간 따라하거나, 집까지 11층을 걸어 올라오거나 하는 등. 체중을 줄이기 위한 몸부림(!)은 타의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진작부터 실천해야 하는 것이긴 했다. 지금까지의 엄청난 다이어트 실패들을 교훈 삼아, 이 식단과 운동을 오래오래 지속할 수 있도록 무리하지 않으려고 한다. 밥도 여러가지 만들어 보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친구집에서 이유식 책을 봤는데, 거기에 남은 이유식 재료로 만든 성인요리가 있었다. 두 가지를 유심히 봤는데, 계란오이볶음과 렌틸콩마늘볶음. 계란오이볶음은 해먹어 봤는데, 아주 맛났다. 얼른 렌틸콩을 사서 마늘과 볶아봐야지. 처음 홈트를 했을 때, 그간 불은 살들과 격렬한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생활로 인해 동작 하나하나 따라하는 게 무지 힘들었는데, 다음날 여기저기 뻐근해지니 기분이 좋았다. 다음날에는 같은 동작을 전날보다 아주 조금 쉽게 따라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쁘고. 살도 빠지고 체력도 좋아졌음 좋겠다. 오늘은 북소리가 백팔번 나오는 영상을 틀어놓고 절을 해봤다. 다 끝나니 땀이 비오듯 흘렀다. 계획했던 짧은 운동이 끝나면 중간에, 아니 초반에 포기하고 싶었는데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좋다. 포기하고 싶었던 것을 포기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음 좋겠다.




오늘 뭐 먹지?

from 서재를쌓다 2018.06.14 22:06




   홈플러스에서 야키소바면과 소스를 샀다. 면 세개와 소스 세개가 한 묶음이다. 순한맛과 매운맛이 있었는데, 고민하다 둘다 샀다. 두 번 해 먹었는데, 두 번 다 2인분이었다. 순한맛과 매운맛을 하나씩 섞었다. 마트에서 천원짜리 컷팅 양배추와 붉은색 초생강도 샀다. 컷팅 양배추는 딱딱한 것과 보슬보슬한 것 두 종류가 있었는데, 보슬보슬한 배추로 골랐다. 집 건너편에 야채가게가 생겼다. 자주 애용하는 역앞 가게보다 훨씬 싸다. 거기선 작은 당근 세 개를 샀는데, 역시 천원이었다. 좋아하는 정육점에서 대패삼겹살도 샀다. 대패삼겹살은 늘 이 집이다. 두 번 해 먹고 딱 한 번 더 해 먹을 만큼 남았다. 재료 준비는 끝. 이제부터는 간단하다. 야채는 모두 채썰어두고, 대패 삼겹살을 먹기 좋게 자른 뒤 기름을 두르지 않고 익힌다. 돼지기름이 살포시 나왔을 때 야채를 넣는다. 야채와 고기가 적당히 익었을 때 면과 소스를 넣고 면이 끊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뒤적거려 준다. 작은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가장자리가 바삭한 반숙 계란 후라이를 후다닥 만들어 둔다. 소스가 면과 야채에 잘 어우러지면 후라이를 얹고 맛나게 먹어주는 거다. 싱거우면 굴소스를 약간 넣어준다. 맥주도 빠질 수 없지. 맥주는 예쁜 유리잔에 따라 마신다. 


    히라마쓰 요코는 야키소바를 이렇게 표현했다. "해 질 녘 시원한 바람. 정원에 뿌리는 물. 땀띠분 냄새. 유카타의 촉감. 멀리서 축제의 북소리가 들려오면 귀를 기울인다. 또는 온 가족이 전철을 타고 나가 해수욕. 들뜬 마음에 수영을 너무 오래해 새파래진 입술을 햝으면 바닷물 맛이 나고, 목이 타고, 배는 등에 붙는다. 여름 축제도 해수욕도 야시장도 본오도리도 그리운 그 여름과 함께 떠오르는 맛, 그것이 야키소바다. 좋아했는데, 소스 야키소바. 건더기라곤 양배추와 숙주 정도, 몇가지 들어 있지 않아 오히려 파래와 빨간 생각절임이 주연을 맡는다. 드문드문 발견하는 튀김옷 부스러기가 기쁘다. 고소한 소스 뒤범벅의 야키소바는 이벤트 기분이 가득 들게 한다. 진하고 짠 소스의 맛과 향, 이것 또한 일본 여름의 맛이다."


   오늘 뭐 먹지? 제목에서 촌스러운 느낌이 마구마구 드는 이 책을 살 수밖에 없었다. 권여선과 안주니까. 이 책을 다 읽고, 더도 말고 딱 한 가지 요리를 정성껏 만들어서 맛난 맥주와 함께 먹고 싶어졌다. 대단한 것 같지 않지만, 실은 대단한 음식(이라고 쓰고 안주라 부른다)들이 이 책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들깨가 듬뿍 든 순댓국, 해장에 좋은 만둣국, 집필할 때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속을 각각 다르게 말아두는 김밥, 따끈따근할 때 바로 먹는 육전, 설명이 필요없는 누룽지와 명란달걀찜 (명란은 사랑입니다), 해장엔 또 이것이지 물냉면, 동해안의 싱싱한 물회, 여름에 쌈 싸먹기 좋은 땡초 가득 들어간 깡장, 여름나기에도 좋고 안주로도 좋은 밑반찬들, 혼자서 한 그릇 독차지 할 수 있는 찬바람 불기 시작할 때 먹으면 좋은 냄비우동, 문학관의 심심한 급식 탓에 급 마련된 두부와 김치제육볶음 안주 술자리, 단골 시장에서 사온, 단골이라 게다리까지 덤으로 받아와서 국까지 끓인, 쌀밥과 찰떡궁합 갈치조림, 추운 계절에 더 생각나는 칼칼한 감자탕, 손이 많이 가지만 그만큼 맛난 꼬막조림, 추운 겨울 동네 시장에서 먹는 어묵 한 꼬치와 짭조름한 국물 한 컵, "내가 앞으로 집밥을 좋아하게 될지 싫어하게 될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내 손에 달"린 집밥집밥, 마른오징어를 물에 불린 뒤 고소하게 튀겨먹는 오징어튀김, 쇼핑몰에서 두 상자를 잘못 배송해 그날 저녁에 조림도 해 먹고, 구워서도 먹은 고등어, 먹고 싶은 것만 해 먹는 부러운 명절상 (명절음식재료가 다 떨어지면 치맥을 시켜먹는다는!), 그리고 끝내 져버린 간짜장까지. 


    권여선은 소설도 잘 쓰고, 술도 잘 마시고, 요리도 잘하는 작가였던 것이다. 단식을 한 번 경험해 본 작가는 그 뒤 종종 단식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작가는 자의였고, 나는 타의였고, 작가는 여러번이지만, 나는 달랑 한번 뿐이지만. 입원을 하는 동안 며칠 단식을 하며 몸이 굉장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관장도 했겠다, 몸에서 나쁜 것은 모두 빠져나가고 정화되는 느낌. 그리고 못 먹는 탓에 예민해져 여러 생각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는데 (마음을 잡기 위해 먹고 싶은 음식들 목록을 적어보기도 했다), 결론은 오늘보다 나은 인간이 되자, 였다. 세상에 단식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오다니. 그리고 단식 후 먹게 되는 음식이 간이 일도 없는 흰죽일 지라도 엄청나게 맛있게 느껴지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미각이 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정말이지 놀라운 경험인 것이다. 아, 책의 제일 마지막에 작가가 좋아하는 중국집 에피소드가 있는데, 정말 읽다 빵- 터졌다. 이건 실제로 읽어 보아야 합니다. 하하하. 요리 귀차니즘에 빠져있는 나를 두 번이나 야키소바를 만들게 한, 이 책의 기억해둘만한 구절들도 옮겨본다. 정성껏 만들어서 맛나게 먹는 즐거움을 잊지 말자. 


-


    다만 내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혼자 순댓국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는 나이 든 여자를 향해 쏟아지는 다종 다기한 시선들이다. 내가 혼자 와인 바에서 샐러드에 와인을 마신다면 받지 않아도 좋을 그 시선들은 주로 순댓국집 단골인 늙은 남자들의 것이다. 때로는 호기심에서, 때로는 괘씸함에서 그들은 나를 흘끔거린다. 자기들은 해도 되지만 여자들이 하면 뭔가 수상쩍다는 그 불평등의 시선은 어쩌면 '여자들이 이 맛과 이 재미를 알면 큰일인데' 하는 귀여운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메롱이라도 한 기분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요절도 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반세기 가깝게 입맛을 키우고 넓혀온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니까.

- 26쪽


   첫 단식 이후로 나는 몇 년에 한 번씩은 단식을 한다. 단식을 하면서 내 속에 있는 오래된 서랍을 열어 이것저것 하나씩 꺼내 들여다본다. 내가 살아온 과거들은 차근차근 짚어보고, 지금 맺고 있는 관계들은 곰곰이 따져본다. 그러다 문득 달걀을 푼 라면이 먹고 싶어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행복한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면 그 꿈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젊은 날의 과오를 떠올리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 내 곁을 떠난 사람들 생각에 슬퍼하기도 한다. 열무김치에 고추장 넣고 맵게 비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극히 사소한 이유로 화가가 되지 못한 것에 서운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따위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기도 한다. 나는 이 모든 감정들이 쓸데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내 속에 웅크린 채 언젠가는 내가 한 번 뒤돌아 보아주고 쓰다듬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고아처럼 어리고 상처 입은 감정들이다. 내가 그렇게 해준 뒤에야 그것들은 비로소 조용히 잠이 든다. 

- 74-75쪽


   (...) 병치레를 많이 했던 내가 어렸을 때 몹시 앓고 난 후면 어머니는 부엌 처마 밑에 걸어두고 아끼던 굴비 두름에서 한 마리를 꺼내 연탄불에 구워 살을 발라내 밥숟가락 위에 얹어주시곤 했다. 연탄불에 구운 옛날 굴비의 맛이야 뭐라 말을 보태고 말고 할 필요도 없지만, 나는 특히 굴비 살을 따뜻한 밥 위에 얹어 먹는 게 좋았다. 유년에 먹던 그 맛과 방식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나는 밥 한 숟가락에 조린 무 한 점을 얹고 그 위에 갈치를 얹는다. 햅쌀밥과 가을무와 갈치 속살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삼단 조각케이크를 나는 한입에 넣는다. 따로 먹는 것과 같이 먹는 건 전혀 다른 맛이다. 정말 이렇게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밥과 무와 갈치가 어울려 내는 이 끝없이 달고 달고 다디단 가을의 무지개를. 마지막으로 게다리를 넣어 구수한 단맛이 도는 무된장국을 한술 떠먿는다. 그러면 내 혀는 단풍잎처럼 겸허한 행복으로 물든다. 

- 168-169쪽







   루나파크의 웹툰과 글을 열심히 보던 시기가 있었는데, 루나의 친구로 등장하는 노난이라는 특이한 별명의 사람이 이 노란 책을 출간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정한 사람에게 다녀왔습니다. 남유럽에서 열여덟 명의 사람을 여행한 기록. 표지 색깔이며, 길다란 제목이 따뜻한 책일 것 같았다. 바로 주문했다. 읽어보니 역시 따뜻한 책이었다. 노난이라는 별명을 가진 노윤주 씨는 따뜻하고, 용기 있고, 느긋하고, 삶의 순간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작가 소개에 의하면 네 번 회사를 옮겼고, 회사를 자주 그만둔 덕분에 길고 짧은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단다. 겁이 많지 않은 덕분에 낯선 사람들을 따라가 숨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단다. 가장 쓰고 싶은 것은 언제나 일기란다. 나는 이런 여행들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데, 이렇게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더랬다. 무척 잘 쓴 글은 아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마음들이 좋아서 잘 읽혔다. 편안한 글이다. 스페인에 가져가 여행 중 이 책을 읽은 동생에게 어땠냐고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며 물었다. 너무 미화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어, 라는 동생의 말에 우리의 여행이 우리의 추억 속에서 모두 미화되어 있지 않냐고, 그래서 온갖 일을 겪고 와서는 또다시 떠나는 꿈을 꾸지 않느냐고, 나도 모르게 말해 버렸다. 그녀가 지금까지처럼 용기 있고 느긋한 여행을 계속 해서, 그리하여 다정한 일기를 열심히 써서, 언젠가 또다른 다정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음 좋겠다. 



   "있잖아, 윤주. 나는 머릿속에 생각이 정말 많은데도 그 생각을 말하려고 하면 겁이 나. 덜덜 떨려. 이 수업이 너무 좋아서 매일 이 수업하는 날만 기다렸는데도 막상 수업에 가면 말하는 것이 힘들었어. 그래서 나는 네가 겁없이 혼자서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부러워.

   뭐든 하고 싶은데 소심하고 생각이 많고 착하고 여린 라우라에게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자 가장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추천했다.

  "<조르바>를 읽어, 라우라. 나는 <조르바>를 읽고 용기가 생겼어. 난 조르바처럼 살고 싶어."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좋아하는 라우라는 다른 책은 봤지만 아직 <조르바>를 못 봤다고 했다. 어떤 책이냐고 묻길래,

   "조르바는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틀이 없는 사람이야. 용감하고 동시에 다정한 사람이야. 하고자 하는 것을 해버리는 사람이야."

   라고 취기에 흥분해서 말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라우라가 대답했다.

   "윤주, 그게 조르바라면 넌 이미 나한테 조르바야."

- 36-37쪽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나도 좋은 사람인 척하며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 번째 좋은 살사람을 만나면 되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돌아다니다가 좋은 사람 '한 명'을 발견하게 되면, 그다음은 볕 좋은 날 목 좋은 곳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있는 것처럼 순조롭다. 

   좋은 사람 곁에는 약속한 듯이 좋은 사람들이 있기 떄문에, 첫 번째 좋은 사람을 슬쩍 당기는 노력만으로도 두 번째, 세 번째 좋은 사람들이 줄지어 매달려오는 것이다. '도대체 그 동안 다들 어디에 숨어있었던 거야?'라고 감탄하며 웃을 수 있게 된다. 기억해두자. 첫 번째 좋은 사람은 두 번째 좋은 사람을 몰고 온다. 

- 84쪽


   "윤주, 나는 다른 나라로, 아니 다른 도시로 여행을 해본 적이 거의 없어. 그래서 이렇게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걸 정말 좋아해. 사람들을 통해서 여행을 하는 거야. 나와 필립한테 너는 가장 멀리서 온 손님이니까 우리 둘은 오늘 가장 먼 나라로 여행을 간 거야. 우리는 네 덕분에 오늘 많이 행복했어."

- 108쪽




유월

from 모퉁이다방 2018.06.09 21:51




   유월이 되고, 저녁 바람이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일년 전 생각을 하고 있다. 일년 전 바르셀로나에서 두 주 가까이 혼자 지냈던 기억들을 이곳에 정리해놓아야겠다. 더 늦어지면 영영 꺼내놓지 못할 것 같다. <비긴 어게인 2>가 케이블에서 하면 채널을 돌리다가 멈추고 본다. 1시즌은 이소라 때문에 보았고, 2시즌의 처음 팀은 김윤아 때문에 보았다가, 역시나 로이킴에 푹 빠졌다. 이번 두번째 팀도 첫번째 팀에 이어 포르투갈. 첫번째 팀은 포르투에서 시작했고, 두번째 팀은 리스본에 있다. 저번에 본 방송에서 두번째 팀이 파두하우스에 갔는데, 파두는 '침묵'에서 비롯된 음악이라고 했다. 모두들 그 침묵에서 비롯된 음악을 경건하게 들었다. 아, 나는 내 유럽 여행의 시작이 포르투갈이어서 참 좋다. 오늘은 박정현이 라이브 바에서 '꿈에'를 불렀다. 박정현은 '꿈에'를 설명했다. 헤어진 연인이 꿈에 나온 적 있으세요? 그런 노래예요. 예전에 '꿈에'를 듣고 그 드라마틱한 선율과 가사에 푹 빠져 아주 슬펐던 기억이 있다. 격정적인 선율이 모두 지나간 후, 박정현은 나즈막하게 노래한다. 이제 다시 눈을 떴는데 가슴이 많이 시리네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난 괜찮아요. 다신오지 말아요. 지난 수요일에는 제주도에서 온 친구를 만나 함께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친구를 보내고 간만에 혼자 홍대로 영화를 보러 갔다. 엄마와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오디오북을 듣고 함께 눈물 짓는 첫 장면이 좋았다. 나무가 많은 한적한 동네를 오랜 세월 운전해 나가는 기분은 어떨까.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과, 떠나기를 간절히 꿈꾸다가 마침내 떠나며 늘 걸어다녔던 동네를 처음으로 운전해 보는 사람의 기분은? 올해는 꼭 면허를 따야지. 가까운 도시를 여행하고, 저축을 많이 해야지. 쓰기로 결심했던 글은 써야지. 모아놓기만 했던 책을 얼른 읽고 처분하거나 간직해야지. 오늘은 사전투표를 하고, 간만에 집에서 동생과 낮술을 했다. 저녁 즈음 빗소리가 났고 지금은 그쳤다. 공휴일과 주말이 2주동안 이어지니 무척 기쁘다.



  1. 에이프릴 2018.07.04 11:50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일에 쫓기는 가운데 잠시 모퉁이 다방에 들렀어요. 여전히 글이 참 좋아요. 고마워요. 이런 글을 쓰고 읽을 수 있게 해주어서:)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7.04 23:43 신고 BlogIcon GoldSoul

      아, 우리가 분명 인사를 나눴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지난 댓글을 검색해봤는데, 세상에 2010년 글이 나왔어요. 제가 서른 두살이 되었다고, 믿어지지 않는 나이들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 글이었어요. 세상에나. 그 나이는 아주 풋풋한 나이인데 말이에요. 뭐든지 할 수 있는! 뭔가 조금 슬퍼졌지만, 에이프릴 님이 이렇게 다시 흔적을 남겨주시고, 저도 계속 일상을 남기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보아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제 일상을 따뜻한 마음으로 들여다봐주셔서요. (하지만 역시 늙어버린 건 분명해요. 흑흑- 아, 서른 둘이여) 헤헤- 좋은 여름이 될 거예요. 감사해요. 또 언제고 흔적 남겨주세요. :-)

  2. 2018.07.12 06:5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7.12 17:07 신고 BlogIcon GoldSoul

      앗, 2013년이었어요! 그쵸그쵸. 에이프릴 만이 아니었어요. 우리 댓글로 꽤 얘길 나눴었어요. 알려주신대로 루빈으로 검색해보니 나왔어요!! 2013년에 고맙게도 단골집 같다고 이야기해주셨어요. 헤헤- 아직도 단골집 비슷한 거죠? 고마워라.
      그러게요. 제가 쌍둥이 자리인데, 호기심은 엄청나게 많은데 끈기가 없어서 뭘 제대로 하나 성공을 하질 못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나 오래 블로그를 유지하고 있으니, 어디서 이런 끈기가 나오나 모르겠어요. 흐흐- 계속계속 쓰고 싶어요. 지켜봐주세요-
      <가장 잔인한 달> 제게 보내주셨던 거 맞죠? 루빈으로 검색을 하니 하나하나 기억이 났어요. 와와- 본명을 부르고 싶지만, 왠지 원하지 않으실 수도 있으니.
      오늘 이런 문구를 봤어요. 마스다 미리가 그랬대요. "마흔은 자신을 믿어도 좋을 나이이다."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요즘 홈트를 그만두고, 헬스장에서 걷고 있는데, 순식간에 땀이 화-악 하고 나는 순간이 있는데, 그럴 때 좋은 것 같아요. 마흔을 앞둔 우리, 조금씩 꾸준히 운동해나가요. 화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