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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서적 흙수저와 정서적 금수저 (14) 2018.05.08



   망원의 벨로주에서 친구와 나란히 본 정밀아 공연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곡은 '심술꽃잎'이다. 정밀아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집안에 사정이 있어 형제 중 자신만 잠시 시골 할머니집에 맡겨졌는데, 그때 서럽고 슬펐던 것이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생각이 났다고 한다. 이 아이를 잘 달래서 노래로 만들어 잘 보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심술꽃잎'은 그렇게 만든 노래라고 했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큰 나무, 풀잎, 바람 모두 실제의 것이니, 노래를 들을 때 그것들을 직접 눈앞에 그려보라고 했다.


    노동절에는 혼자 광화문에 가 와인영화를 봤다.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와인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마지막까지 다 보니 아버지와의 어긋난 관계로 집을 떠나 이곳 저곳을 떠돌던 주인공이 집에 돌아와 돌아가신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어린시절의 자신을 껴안는 이야기였다. 어린시절의 자신을 잘 보듬아 준 다음에야 주인공은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어린시절의 주인공과 현재의 주인공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런 장면이 늘 뭉클하다. 


   그리고 어느 목요일에는 그 사람 집 앞 커피집에서 이 책을 읽었다. 정말이지 나는 이 연애를 잘 하고 싶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나오는 어떤 고약한 부분이 있다. 지난 연애에서도 그랬었다. 그게 상대방을 슬프게 하고, 지치게 하고, 결국에는 외면하게까지 만들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다잡고 다잡지만 어느 순간 그 아이가 불쑥 튀어나오는 거다. 그러다 이 책에 대한 짧은 글을 봤다. 책을 다 읽은 사람이 다음 독자에게 남긴 말이었다.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과 잘 되지 않았는데, 헤어지면서 자신은 불안형 애착을, 상대방은 회피형 애착을 가졌다는 걸 알았다고. 자신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자신 안의 어린아이를 인정하는 단계부터 차차 성장해나가 건강한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그리하여 좋은 엄마도 되고 싶다는 글이었다. 


   중간쯤 읽다 잘 읽히지 않아 덮어뒀었다. 그러다 다시 생각이 나 책을 들고 전철을 오랫동안 타고 집 앞까지 갔다. 야근이 언제 끝나는지 모르지만 놀래켜 주려고 몰래 커피집에 자리를 잡았다. 야근이 늦어지고 늦어져서 결국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이 책의 후반부에 성인의 애착 유형에 관한 설명이 있다. 200페이지부터 202페이지까지, 거기에 내가 남녀 관계에서 하는 그릇된 행동들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그 페이지들을 읽어나가는데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런 아이였구나.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결국 자정 넘게 야근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는 동안 가슴이 벅찼다. 


    시옷의 모임에 가기 전, 나는 지금보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였던 것 같다. 늘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겸손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누군가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해주면, 언젠가 이 사람이 나의 구석구석을 알게 되어 결국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네, 생각해버릴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도 이 페이지에 있었다. 그런데 그 착하고 어린 아이들이 이 언니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그렇지 않다고, 더 알게 되어도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하다고 자꾸자꾸 얘기해줬다. 그리고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시간이 지난 뒤에 계속계속 얘기해줬다. 그것들이 나의 못난 면을 치유해 주고 있었다는 것 역시 이 페이지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247페이지에 이런 문장이 있었거든. "치료와 성장은 일생 어느 시기에도 가능합니다." 고마운 사람들.


    나는 내 안에 있는 이 아이를 잘 달래고 오래 들여다 볼 것이다. 보듬아주고, 손잡아주고, 괜찮아 질 때까지 곁에 있어줄 거다. 그 사람에게도 그런 아이가 있다면 힘들었지, 고생했지, 무섭고 쓸쓸하지는 않았니, 말 걸어 주고 싶다. 그리고 괜찮다고, 이것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안아 줄 거다. 어른이 되어보니 알겠지만 다들 실수는 하는 거라고, 그러니 너무 원망하지 말자고 다독여 줄 것이다. 상처는 누구에게든 있다고, 그 상처를 어떻게 아물게 하는 지가 중요한 거라고. 우리는 상처를 잘 아물게 할 수 있다고. 보경이의 말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튼튼하고도 단단한 애착 상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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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착의 핵심은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달려와주고 내 편이 되어줄 거라는 믿음과 기대입니다. 아기는 혼자 상황을 이해하거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양육자의 돌봄과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상호 간의 연대감 없이는 애착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즉, 돌봄을 주고받는 사람이 서로 즐겁고 행복감을 느껴야 애착이 잘 형성됩니다. - 105쪽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일은 자신의 애착 도식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애착 회복을 위해 노력하면서 놀라운 치유와 성장이 일어나는 것을 저는 심리 치료 중에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본인이 긍정적 변화를 원하는 것과, 상담자와 함께 자신의 변화와 성장에 대해 실존적 책임을 지는 것이 정서적 금수저로 거듭나는 관건입니다. - 207쪽



  1. 2018.05.09 01:2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09 18:38 신고 BlogIcon GoldSoul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앤셜리가 진짜진짜 상담공부를 했음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전에도 쭉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이 책을 읽고서 앤셜리는 정말 좋은 상담사가 될 거라고 확신했거든. 천천히 준비해서 좋은 상담사가 되어줘. 응응. 나의 다정한 동반자가 되어주고. 내가 큰 나무가 되어줄게. 그러자, 죽을 때까지 재미나고 따뜻하게, 그렇게 서로를 지켜봐주고 격려해주자. 고마워, 앤셜리 (하트 뿅뿅) :-D

  2. 2018.05.09 19:0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09 19:20 신고 BlogIcon GoldSoul

      이렇게 긴 댓글을 남겨주시다니. ㅎㅎ 여긴 저의 솔직한 마음들이 담긴 곳이라 (누군가는 일기를 왜 일기장에 안쓰고 인터넷에 쓰냐고 놀려댔지만 흐흐) 그때의 제 마음도 남겨두고 싶었어요. 비단 연애 뿐만이 아니라 관계에서 제가 조금씩 움츠렸던 부분을 이 책을 통해 나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두려운 게 아니라 더 튼튼해졌어요! 헤헤 사실 저 막 내지르는 스타일이거든요. 좋은 관계들을 쭉 이어나가고 싶고, 그들에게 좋은 기운을 받고, 좋은 기운을 주고 싶어요. 제 안의 그 아이는 모른척 할 게 아니라 더 잘 어루만져주다 내보내고 싶어요. 그 아이도 저의 한 부분이지만, 더 긍정적인 부분을 오래 기억하고 있어요. 조언, 감사합니다! 이렇게 써 놓았지만, 여전히 바야흐로 봄이랍니다. 헤헤- 좋은 밤 보내세요.

      아, 꽃검색 기능은 예전에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님 보고 알고는 있었어요. 정말 신기하고도 똘똘한 세상이에요! 좋아진 거...겠죠? 하하

  3. BlogIcon wonjakga 2018.05.11 21:45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 글 읽고 오늘 이 책 대출했어요. 잘 지내시죠? 벌써 오월이네요. 잘 지내시리라 믿으면서 오랜만에 인사하고 가요. 사실 자주 들어오긴 하지만요 헤헷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18 23:22 신고 BlogIcon GoldSoul

      헤헤- 잘 지내고 있어요. 현정씨도 잘 지내죠? :)
      벌써 5월 중순이 지나가고 있어요. 흑흑-
      이 책, 현정씨한테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괜찮았음 좋겠어요!

  4. 새봄 2018.05.13 11:11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이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제 속에는 어떤 고약한 아이가 있어서 이 모양인지!
    저도 오랜만에 인사하고 갑니다:) 잘 지내시죠?! 너무 좋은 계절이에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18 23:25 신고 BlogIcon GoldSoul

      진짜요. 먼지랑 일교차만 빼면요. 흐흐-
      저도 가끔씩 올라오는 새봄씨 일상 잘 보고 있답니다.
      기운 내고 있는 거죠? 화이팅이에요! 아자아자

  5. 2018.05.16 18:0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18 23:34 신고 BlogIcon GoldSoul

      썬님이 회피형이라니. 번쩍!
      잘 모르지만, 이렇게나 멀리 있지만, 왠지 요즘 좋아보였다구. 상처 받지 않으려는 노력보다 상처 주지 않으려는 노력. 이 노력 좋다아. 나도 노력하겠어! 길고 다정한 조언 고마와. 그러니까, 정말 언니는 30년도 (흑흑) 훨씬 넘는 시간을 타인으로, 서로의 존재도 모르고 지내왔는데 말이야. 몇 개월 만나고서 감정의 소용돌이에나 빠지고 말이야. 반성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육두문자는 줄이도록 하자 ㅋㅋㅋㅋㅋㅋ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많은 커플. 고마워요, 썬님. :-D

  6. 2018.05.17 16:1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18 23:41 신고 BlogIcon GoldSoul

      요 며칠 이곳은 비가 요란하게 왔는데, 그곳도 그랬죠?
      빗소리가 시원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막 그랬어요.
      저도 잘 읽지 않는 류의 책인데, 그 평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어요. 완전 마음에 든건 아니지만, 제게 깨달음을 주어서 고마운 마음이랍니다. 헤헤- 그리고 다음에 산 책도 같은 애착에 관한 책인데 마음에 들어요. 아직 초반이라 끝까지 읽어봐야 알겠지만요. 다 읽으면 또 얘기 풀어놓아볼게요. :)

  7. BlogIcon 시몽 2018.07.25 12:09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안녕하세요, 누군가의 블로그를 통해서- 한번 들렸고, 책검색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또 들르게 되었네요. 네이버 블로그가 아니라 더 다정한 공간이기도 하고, 단번에 기억이 되살아나네요 Gold soul. 나중에 귀국해서 기회가된다면 독서모임에 꼭 참가해보고 싶어요. 그럼 오늘도 좋은하루 보내셔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7.26 21:16 신고 BlogIcon GoldSoul

      앗, 외국에 계신가봐요. 반갑습니다!
      기억해주셔서 감사해요. :)
      그곳도 많이 더운가요?
      블로그에 들렀다가 사진도 글도 좋아서 이웃 추가했더랬어요. 헤헤- 자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