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에 해당되는 글 4건

  1. 안부 (3) 2018.04.25
  2.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2) 2018.04.10
  3. 주문진 (2) 2018.04.04
  4. 잘 먹고 갑니다 2018.04.02

안부

from 모퉁이다방 2018.04.25 21:32



   월요일 저녁에는 소윤이에게 전화가 왔다. 요가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고 했다. 집까지 30분 정도 걸린다며, 생각이 나 전화를 했다고 했다. 서로 별일이 없는지 안부를 물었고, 최근의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셔틀을 타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니까 어둠이 가볍게 깔린 그 시간의 시내 버스 풍경을 근래에 떠올려 본 적이 없는데, 소윤이 덕분에 그려 봤다. 소도시의 한적한 저녁 버스. 창밖으로 펼쳐지는 느긋한 풍경.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 있는 버스 좌석. 운동을 끝내고 봄바람에 가만히 내 생각이 났을 아이. 그렇게 조곤조곤 마음으로 이어진 서울과 전주. 소윤이는 버스를 잘못 탔다고, 내려서 다시 잘 탔다고 했다. 서로 월요일 하루 수고했다고 인사를 하고 통화를 끝냈는데, 마음이 고요하고 따스해졌다. 정말로 월요일 하루를 아주 잘 보낸 것 같았다.


   화요일 아침, 아니 화요일 새벽에는 은하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는 두달 동안 포르투갈어를 함께 배웠다고 하기는 좀 그렇고, 학원을 같이 다녔는데, 그때 내 이름은 루시였다. 언니 이름을 잊어버렸네. 너무 오래된 일이다. 결국 인사말 정도만 외운 채 우리의 수업은 끝났다. 학원에서 첫 인사를 하다보니 우리 둘다 포르투갈어에 뜻이 있다기 보다는 새해라서 뭐라도 하고 싶어서 학원을 찾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 뒤로 나는 포르투갈에, 언니는 브라질에 다녀왔다. 간간이 소식을 전하다 어느 순간 꽤 길게 연락이 되질 않았는데, 언니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며 지금 다시 브라질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언니는 브라질의 쨍한 하늘을 보내줬다. 여기 하늘만 가지고 한국에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매일매일 좋은 하늘이라고. 나는 언니에게 우리 이제 연락 끊기지 말자고, 그곳의 좋은 기운을 보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언니는 내가 한참동안 까먹고 있던 포르투갈어 인사를 건넸다. 봉지아. 


   시간이 자꾸자꾸 간다. 뒤돌아 보면 좋은 추억들 투성이다. 물론 기억하고 싶지 않고, 바보 같은 순간들도 무척 많지만. 나이가 들수록 나도 모르게 좋은 것만 기억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이렇게 글을 쓸 때는 늘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현실에서는 또 화를 내고 말았지만. 그래서 자주 글을 써야 하는데. 말을 멈추고, 나쁜 생각도 멈추고,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사월이 가고 있다, 는 말 대신 오월이 오고 있다, 라고 써본다. 오월에는 좋아하는 날들이 있다. 오월이 가진 계절의 온도도 좋고, 그 끝의 바람도 좋고. 오월이 오기 전에 저 멀리 있지만 왠지 무척 가까이 있는 것 같은 조림이에게 엽서를 써야지. 저번처럼 벌써 썼는데, 중간에서 분실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기다려라, 장조림. 사월의 기운 듬뿍 담아 보낼게.





  1. 2018.04.26 13:4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4.26 21:45 신고 BlogIcon GoldSoul

      못 봤어요. 요 영화도 기억해둘게요-
      오늘은 카레를 만들어 두고 자요.
      내일 더 맛있어지길 바라며. 어제보다 책을 한장이라도 더 읽고 잘 수 있길.
      요즘 영화도 책도 통 못 보고 있어요. 흑-
      내일은 금요일이에요! 너무나 좋은 것! 헤헤-
      좋은 꿈 꾸셔요. :-D

  2. 2018.04.26 22:0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무척 좋아서 기대했는데, 흠. 이 작가의 소설을 두 권 밖에 읽지 않았지만, 아마도 꽤 오랫동안 베스트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 소개에 의하면, "마흔여덟살, 이혼 후 다시 독신이 된 남자 주인공이 새 동네, 새 집에서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이야기. 내내 동경하던 단독주택에서의 우아한 삶, 그리고 옛 연인과의 오랜만의 해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늙은 뒤에 혼자 혹은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모두가 일찍 세상을 뜨지 않는 한, 언젠가는 늙으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노년의 삶일까, 하는 생각. 어쨌든 소설 속 주인공처럼, 주인공이 세 들어 사는 주인집 할머니처럼, 우아하고 여유있게 살지는 못할 거다. 주인공의 여자친구처럼 병이 들었을 때 헌신적인 자식도 없을 거다. 그렇지만 간소하면서도 행복할 방법이 있을 거다. 그때의 나는 누구와 함께 살까. 어떤 요리를 해 먹고, 어떤 책을 보고, 어떤 영화를 보게 될까. 어떤 생각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까. 그때도 지금처럼 아주 풍요롭진 않아도 소소한 즐거움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맥주 브랜드가 있는 할머니가 되어야지. 그나저나 마쓰이에 마사시의 다음 소설에도 건축 이야기가 나올까.



   나는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 

   일 관계로 인터뷰한 노인은 무수히 많다. 소설가, 철학자, 피아노 조율사, 요리 연구가, 조각가, 양조 장인, 조산사, 성서 연구가, 외과의, 전당업자 등등. 일부를 제외하면 경험의 총량과 이야기의 재미는 비례한다. 정년을 앞둔 점잖은 남자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사락사락 내리는 눈 같은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다면 나 같으면 분명히 듣는다. 금세 잠이 들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다. 

- 15쪽


   "이혼했다죠?"

   "네."

   나는 황급히 차를 마셨다. 달고 맛있다.

   "혼자 사는 거 쉽지 않아요."

   "네에."

   "쓸쓸하거든, 마음은 편하지만." 소노다 씨는 쿡 웃고 말을 이었다. "애니웨이, 웰컴 투 아워 킹덤 어브 소로."

- 21-22쪽


   꼭 빗나간 추론도 아니다.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하루새 쌓인 앙금이 잡념이 되어 되살아나 차츰 안개처럼 흩어진다. 회사에서 다른 사람과 있었던 일, 불쾌한 사건, 정산하지 못한 영수증 다발, 직원 식당의 삼색 덮밥, 오늘도 쓰지 못한 저자에게 보내는 편지,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굳었던 어깨도 풀린다. 호흡이 깊어진다. 하루의 끝에 목욕을 하면 자신이 조금은 맑아진 기분이 든다. 착각이라 해도 고맙다. 목욕은 위대하도다.

- 76쪽


   내 입사 동기인 영원부원이 사내 결혼을 했을 때 사쿠라자키 씨가 중매인 역할을 했다. 나는 피로연 사회를 맡았다. 신랑신부의 소개 글을 읽는 사쿠라자키 씨의 손이 떨려 종이가 바스락바스락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나는 그때부터 내심 사쿠라자키 씨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됐다. 

- 77쪽


   가나와 함께 살게 된 아버지는 아침 일찍 청소와 빨래를 시작해 오전 중으로 집을 구석구석 깨끗이 치우고 나면, 전철을 갈아 타고 경로 우대 할인이 되는 영화를 보거나 백화점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거나(가나를 우연히 만난 국숫집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라고 한다) 공원을 산책하고 그 김에 동물원에 가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거나 가나가 부탁한 장을 보거나 한다. 저녁이 되면 마음에 든 동네 주점에서 가볍게 요기하고 가볍게 마시고, 가나가 집에 올 즈음에는 직접 물을 받아 목욕하고 NHK의 <뉴스워치 9>를 보고 나서 취침. 이렇게 규칙적으로 생활했던 모양이다. 가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 했고 간섭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딸이라기보다 셰어하우스의 주민 같은, 어딘지 모르게 담백한 관계였다. 
- 103쪽

   아들에게도 언젠가 배우자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은 이제 새로운 만남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연히 호감 가는 여자가 나타난다 해도 그 뒤 식사에 초대하고, 두 사람의 개인사며 취향, 사고방식, 라이프스타일을 맞춰보고, 메일 등등을 주고받으며 호의를 전할 생각을 하면 다소 귀찮다. 타인과 한 지붕 밑에서 살아갈 자신도 별로 없다. 나는 가족이 아니라 좋은 집을 원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 120쪽



  1. 2018.04.12 16:3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4.21 12:51 신고 BlogIcon GoldSoul

      그렇죠? 40대의 연애에 관한 부분은 정말. 그런데 저 동상이몽 프로를 가끔 보는데, 최근의 노사연 부부를 보니 나이에 무관하게 인간이란 언제나 사랑받고 싶고, 확인받고 싶고, 사랑 앞에서 여리디 여린 존재란 생각을 했더랬어요. 30대가 그 전보다 성숙하고 여유롭고 너그러울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경험해보니, 작가가 표현한 40대 후반의 연애도 그렇게 소설적인 게 아닐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도 해 보았어요. 헤헤
      겨울나그네님의 말씀대로 마음이 맞는 벤치와 마음이 통하는 친구, 목이 따끔할 정도로 시원한 맥주!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거 꿈꿔 보아요. :)

주문진

from 여행을가다 2018.04.04 21:47

​​



   주문진에 다녀와서 대게와 홍게보다 더 생각이 났던 건, 파래전이었다. 심심하게 생긴 전이 기본반찬으로 나왔는데, 무심히 먹다 바삭한 것이 너무 맛나 사장님께 무슨 전이냐고 물어봤다. 츤데레 스타일의 사장님이 말씀하시길, 파래전이래요. 파래로 전도 만드는 구나. 맛나게 먹고 한 장 더 달라고 했다. 두 장째 먹는 데도 맛있더라. 주문진에서 하룻밤 자고 인천으로 왔는데, 인천의 해물찜 식당 티비에서 파래전 부치는 장면이 나왔다. 돌아와서 파래전 만드는 법을 검색해봤다. 별 게 없었다. 파래를 씻어서 다른 재료들과 섞어 전을 부치면 됐다. 인터넷 속 파래전의 재료들은 화려했는데, 주문진에서 먹은 건 파래와 옥수수 딱 두 가지만 들어갔다.

 

   몇 주 뒤에 만나서 무언가를 먹다가 아, 파래전 생각난다, 라고 말했다. 진짜 맛있었지, 라고 해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또 놀러 가서 먹으면 되지, 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치, 그 맛을 여기서는 느낄 수 없지. 그 파래전에는 파래와 옥수수만 들어간 게 아니지. 주문진까지 가는 길에 본 높은 산에 둘러쌓인 눈꽃들과 쌓인 눈이 날리던 풍광, 실패한 스팸무스비, 산을 넘으니 한겨울에서 늦겨울로 바뀌던 온도, 크지 않은 바닷가 마을의 짠내, 8층 높이에서 올려다보고 내려다보았던 구름낀 하늘과 잔잔해보이던 바다, 함께 걸었던 복작복작했던 수산물 시장과 아무도 없던 항구, 해일 때문에 출입 통제되었던 등대까지. 이 많은 것이 파래전의 바삭함을 만들어 냈지.


   인천의 숙소가 훨씬 비싸고 좋은 곳이었는데, 나는 주문진의 숙소가 정말 좋았다. 모텔을 리모델링했다는데 깔끔하고, 조용했다. 창문성애자, 테라스성애자인 나를 쏙 만족시켰다. 방은 작았는데, 사실 클 필요도 없지. 화장실도 깔끔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몇 발자국 안 가 커튼을 치면 주문진 동해 바다가 보였다. 유리문을 열고 자그마한 테라스로 나가면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저녁으로 대게를 먹고 걸어서 숙소로 왔다. 오는 길에 아직 문이 열려있던 건어물 가게에서 황태 껍질을 사고, 편의점에서 캔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샀다. 테라스에 가지고 온 캠핑 의자를 폈다. 깜깜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실은 바다가 있는, 그곳을 보면서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셨다. 커튼을 닫지 않고 잠을 잤는데, 아침이 되자 누운 자리에서 선명한 일출이 보였다. 바로 앞에 생선구이 맛집이 있어 아침도 든든히 먹었다. 


    아빠는 언젠가 삼촌들, 고모와 함께 한, 몇 밤을 잔 여행에서 돌아와서 심한 후유증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가슴이 실제로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아팠다고 했다. 너무 아파서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단다. 너도 그러냐고 물어봤단다. 고모가 오빠 며칠만 지나면 괜찮아 질 거예요, 했단다. 그 말을 시간이 지난 후에 아빠에게 전해 듣고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마음이 아팠는데, 주문진을 다녀오고 몇 주 후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또 가면 되지, 라고 심드렁하게 이야기했지만, 그 말이 고마웠다.




  1. 2018.04.10 14:2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4.10 21:26 신고 BlogIcon GoldSoul

      저도 광화문의 극장에서 <더 포스트>를 봤더랬어요. 좋았어요. 보고선 친구랑 정동길을 걸어서 둘둘치킨을 먹으러 갔답니다. 창밖에선 엄청난 바람소리가 들려오고, 잔잔한 좋은 영화가 생각나는 밤이에요. :)

잘 먹고 갑니다

from 서재를쌓다 2018.04.02 22:47



    '잘'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난해 수술을 하면서 알았다. 수술을 하기 전에 몸을 가볍게 한다고 덜 먹고, 하기 직전에 몸 속의 것들을 모두 빼내고 금식을 하고, 입원을 하면서 먹은 푸짐하고 건강했던 세끼 병원밥, 수술 후에 시간을 들여 챙겨먹은 단백질과 채소와 과일들, 그리고 한동안의 금주, 쉴새 없이 마셔댔던 물과 차. 지금 또 다른 의미로 '잘' 먹고 있으면서 그때 내가 얼마나 건강하고 가벼웠는지 새삼 깨닫고 있다. 그래서 이번주부터 조금씩 그날들로 돌아가려고 걷고, 건강한 저녁을 가볍게 챙겨먹었다. 


   <잘 먹고 갑니다>는 병규가 정한 시옷의 책인데, 모임이 미뤄지고 늦어진 탓에 한겨울에 읽었던 책을 저번주에서야 모임을 가졌다. (손꼽아 기다렸지만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나 ㅠ) 병규가 이 책을 한다고 했을 때, 많은 부분 공감하며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수술과 입원의 날들이 없었다면 그렇지 못했을 거다. 병원에서의 밥 한 끼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밥의 힘이라는 게 얼마나 커다란지 책에 나오는 분들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다행이 내가 있었던 병원은 책 속 병원 만큼은 아니지만 밥에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이었다. 


    호스피스 병원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들이 개별적으로 원하는, 추억이 담긴 음식을 주문하는 '요청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환자들은 이 특별한 요청식을 입으로 먹기만 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꼭꼭 씹어먹으며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한다. 슬프기도 했지만 따스했다. 따뜻한 밥 한 끼, 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그런 식사들. 



   잡지 편집자 시절, 복잡한 시가지의 정취나 지친 마음을 달래는 요리처럼 '바쁜 일상을 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것들을 가르쳐준 선배가 있었다. 업무상 직속 선배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가끔 나를 데리고 나가 유쾌하게 먹고 마시기를 즐겼다. 선배는 언제나 그런 즐거움을 다른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애쓴 사람이었다. 나비넥타이로 멋을 낸 차림새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늘 과도하리만치 서비스 정신과 위트가 넘쳤다. 

- 6쪽


   "맛있다. 맛있어. 고마워."

   선배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빙긋 웃더니 다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그리고 나중에 천천히 즐기고 싶다며 보온병을 자기 곁에 소중하게 놓아두었다. 선배는 양식점 '알래스카'의 콩소메 스프가 어떤 노력과 시간을 들여 만들어지는지부터 시작해서 풋내기 시절 주방에서 혼났던 이야기, 젊을 때 '진국'이라 불리는 사람과 물건과 요리를 만나는 일이 앞으로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건강했을 때와 비슷한 성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훌륭한 어조였다.

- 9-10쪽


   건조시킨 잔새우를 물에 담가두면 좋은 육수가 되지. 소면 국물은 그거랑 표고버섯으로 육수를 내는 거야. 주변 사람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국물은 항상 많이 만들었어. 한번은 조카 집에 그 집 시어머니가 오시게 되었는데 밥은 무얼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더라고. 마침 여름이라 소면이 좋다고 했지. 국물을 만들어서 커다란 병에 넣은 다음 톳도 삶아서 함께 내라면서. 톳을 싫어하는 노인은 없잖아. 그 다음은 구운 연어의 살을 발라서 갓 지은 밥에 섞은 연어 밥을 권했지. 그 위에 구워서 잘게 자른 달걀지단하고 김 가루를 뿌리면 충분히 맛있어 보이거든. 

- 52-53쪽


   내 성격이 시원시원하다고? 그건 말이지. 젠체하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고, 좋은 건 좋은 대로 싫은 건 싫은 대로 자연스럽게 살아서 그런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 56쪽


... 환자는 식사를 입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해요. 그 마음에 다가서는 일이 중요하지요."

- 61쪽


... 먹을 수 있으면 기분이 차분해지고 자연히 몸도 좋아지는 기분이 들어요. 병문안을 온 사람이 안색이 좋다고 말해줬어요.

- 73쪽


히로오 씨 : 때마침 중국 쑤저우 투어에 참가했었는데 아주 즐거웠어요. 투어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 부부로 참가했던 유치원 선생님이 "이렇게 같이 와서 즐거웠으니 앞으로 또 함께 가요"라며 모두의 연락처를 수첩에 적었어요. 집에 돌아온 다음 날에 벌써 엽서가 도착했더군요. 그 이후 20년 동안 알고 지냈어요. 

아사코 씨 : 그중에 의사분이 계셨는데 12월 28일까지는 병원 문을 열고 싶다고 하셔서, 매년 29일부터 1월 5일까지 6일 동안만 여행을 다녔어요. 캐나다, 하와이, 발리 섬, 대만... 매년 같은 멤버로요. 스위스가 참 좋았어요. 하와이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히로오 씨 : 그랬구먼. 허허.

아사코 씨 : 모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잘 맞아서 서로 집도 오가고 밖에서 식사 모임도 하고 그랬어요. 하지만 서로의 영역에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여행을 거듭하면 공통 추억이 생기잖아요. 예전에 저 사람이 바다에서 배가 거꾸로 뒤집혀서 큰일 날 뻔한 적도 있었어요. 호호. 항상 그런 일이 화제의 중심이라 모임이 오래 지속되었는지도 몰라요. 

- 108-110쪽


    호스피스 의료 종사자도 아니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당사자도, 그 가족도 아닌 내가 이 책에서 전달하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렇게 자문하면서 환자의 곁에 왕래하고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말을 문자로 남기는 의미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이 맺음말을 쓰면서 '여기에 마지막까지 살아갔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 그 외에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 197-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