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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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발코니서재를쌓다 2018. 3. 29. 21:24
추운 날이었다. 우리는 광화문에서 만났다. 전날만 해도 따뜻했는데, 약속한 날에 칼바람이 불어댔다. 보경이는 수요미식회에 나온 적이 있는 곳이라며 근사한 레스토랑 분위기의 밥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들깨가 들어간 국물과 아삭아삭 채소가 들어간 비빔밥을 먹었다. 실내는 빛이 들어오질 않아 어두웠다. 너무 추워 멀리 못가고, 근처 커피집에 들어가 따뜻한 라떼를 한 잔씩 마셨다. 달달한 케잌은 거의 남겼다. 커피집에서 보경이가 말했다. 인터넷에서 누군가가 쓴 문장을 봤는데,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그 책이 읽고 싶어졌다고. 사서 매일 조금씩 읽었다고. 작가 소개가 있긴 했는데,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언니가 좋아할 지 모르겠다. 언니는 멋낸 문장 안 좋아하잖아. 처음과 똑같은 마음으로 읽어내진 못했다.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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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기분서재를쌓다 2018. 3. 26. 22:23
읽으면서 생각했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매개체를 통해서든 드러나는구나. 차의 이야기이지만, 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차를 마시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 글들이 짧은데, 결코 짧지 않다. 차를 마시듯 한 모금, 한 모금 그렇게 책장을 넘기며 봤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차를 마셔온 사람으로서, 커피나 여타 음료를 마셔온 사람보다는, 차에 더 가까운 정서를 갖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정서가 알게 모르게 글에 묻어났기를 기대한다. 나는 차를 마시는 사람이고, 차를 마시면서 몸도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고 자신한다. 당신도 나처럼 그랬으면. 나는 이제 심지어 와인보다 차를 더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와인을 약간 더 좋아하고, 차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표현이 올바를 것이다. - 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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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모퉁이다방 2018. 3. 13. 23:53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달큰하게 취한 니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일주일 뒤에 너는, 사실 그 말은 참고 참은 말이라고, 그날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고 했다. 나는 너의 머리카락을 뒤적거리다 흰머리들을 발견하고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흰머리가 나버린 뒤에 만났네. 친구를 만날 때나, 혼자 영화를 볼 때, 곁에 있던 니가 훅하고 납작해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친구와 헤어지고, 영화가 끝났을 때, 니가 훅하고 자라는데 이렇게 되어버린 내 마음이 신기하다.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녹초가 되어 테이블 위에 불편하게 엎드려 자는 모습을 두 번 사진으로 찍어뒀다. 보고 싶다는 말이 무척 애틋한 말임을 새삼 깨닫고 있는 날들. 항상 어딘가를 같이 가자고, 누군가를 같이 만나자고 말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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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극장에가다 2018. 3. 4. 21:51
예상과 달리, 한국영화가 일본영화보다 좋았다. 일본영화에서는 엄마의 존재랄까, 역할이 희미했는데 한국영화에서는 뚜렷해서 좋았다. 그래서 제일 좋았던 장면은 엄마 문소리와 딸 김태리가 함께 나무 아래서 각자의 토마토를 베어먹는 여름. 너무 덥다는 김태리에게 문소리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덥지 않다고, 바람이 솔솔 분다고 말해주는 장면이 좋았다. 일본영화를 보았을 때는 이것저것 직접 요리해 먹고 싶었는데, 한국영화는 보고나니 요리를 하기보다 그냥 잘 살아내고 싶어졌다. 다가올 봄과 여름, 훗날의 가을 겨울도. 우리 좌석 주위에 앉은 어르신들이 시골 풍경이 나올 때마다, 요리가 만들어질 때마다 소리내서 추임새를 넣으셨는데, 그 소리도 나쁘지 않았던 삼일절의 영화였다. 보고나서 동생이랑 동네 초밥집에 가서 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