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에 해당되는 글 5건

  1. (6) 2018.02.26
  2. 삼척 2018.02.18
  3. 홀딩, 턴 2018.02.15
  4. 빈센트 반 고흐 (2) 2018.02.08
  5. 월요일 (2) 2018.02.01

from 모퉁이다방 2018.02.26 22:28



   지난 목요일의 일. 보경언니가 강연을 함께 듣자고 했다. 오랜만에 셋이 만나서 맥주도 마시자고 했다. 엄마 찬스를 쓴다고 했다. 한때 우리 셋은 한달에 세 번 이상은 맥주잔을 부딪치는 사이였는데 (한때는, 이 말을 요즘 자주하네) 이제는 반년에 한번 모이기도 힘들게 됐다. 요즘 사무실이 너무 건조해서 가끔 속이 미식거리는데, 이날이 유독 심했다. 나는 늦어서 강연은 못 듣겠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넓직한 테라로사로 갔다. 넓직한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핸드폰도 하면서 저녁시간을 보냈다. 평일 저녁 테라로사는 제법 한가하더라. 한 시간이 넘자 언니에게 전화가 와서 케이티 건물 앞에서 만났다. 강연이 별로였다고 했다. 친구는 언니가 설문지를 내러 가서 패널 선정이 잘못된 거 아니냐고 항의를 하고 있던 모습을 봤다고 말해줬다. 역시 언니답다, 고 이야기하며 광화문 한복판에서 크게 웃었다. 


    간만에 거성호프에 가서 카레가루가 들어간 통닭을 시켜 생맥주와 함께 먹었다. 친구가 옆 테이블의 골뱅이 무침이 맛있어 보인다며 같이 시키자고 했다. 셋이 메뉴판을 올려다보며 물가가 많이 올랐다고 걱정을 했다. 거성호프의 치킨은 예전의 그 맛도, 그 양도 아니더라. 생맥 오백을 각자 두 갠가 세 갠가 마셨다. 지금의 이야기도 하고, 예전의 이야기도 했다. 예전의 이야기는 셋이 함께 대게를 먹으러 일박이일 여행을 간 이야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실패했던 추억들을 더 신나게 이야기한다. 처음 도착해서 먹었던 맛난 대게 한 상보다 노상의 할머니에게 손녀 뻘인데 내가 속이겠소, 말을 들으며 산, 앙상하고 너무 짜 소금덩어리 같았던 대게와 라면에 넣어 먹으려고 샀는데 내장이 하나도 없었던 대게가 더 기억에 남아 매번 이야기한다. 역시 여행은 실패가 제 맛. 다시는 그때 그 시간으로, 그 공간으로, 그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지금도 좋지만, 그때도 좋았다.


   차가 끊기기 전에 일어났는데, 밖으로 나오니 눈이 시작되고 있었다. 버스가 있을 줄 알고 전철을 타는 언니, 친구와 헤어졌는데 정류장에 가보니 막차가 끊겨 있더라. 전철을 타려고 역으로 걷는데, 눈이 순식간에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와와, 혼자서 소리를 내며 걸었다. 역에 가보니 전철도 중간에 끊기길래 다시 나와 택시를 기다렸다. 그래, 이 시간 광화문에 택시가 잡힐리가 없지. 이 날씨에. 어쩔 수 없이 걸었다. 조금 걸으면 왠지 잡힐 것 같아서. 눈은 점점 많이 오고, 우산 따위 없는 나는 점점 눈사람이 되어 갔다. 눈이 발 밑으로도 쌓이고, 코트 위로도 쌓이고, 머리 위로도 쌓였다. 그러면 엄청 추워야 하는데, 바로 전철을 타지 않은 걸 후회해야 하는데 (처음엔 했다), 가만히 그렇게 걷고 있으니 신기하게 따뜻해지더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근사한 풍경을 지금 길 위여서, 방금 좋아하는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고 나와서, 아직 자고 있지 않아서 볼 수 있어서. <사랑니>의 대사처럼.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아줬다. 그래서 눈길을 함께 걸을 수 있었다. 


   얼마 안 가 오르막길의 병원에서 내려오는 빈 택시가 보여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는 응암으로 간다는 말을 듣더니 잠시 망설였다. 에이, 타세요, 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맙다고 몇 번을 말하고 문을 닫았다. 택시 안으로 내가 가지고 들어온 눈이 우르르 떨어졌다. 택시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눈밤을 천천히 나아갔다. 한밤의 라디오 음악도 좋았다. 이게 다 보경언니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 별로였던 강연 덕분이었다. 잘 가고 있는지 두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언니는 눈 내리는 모습을 벌써 보았고, 친구는 지하라 아직 못 보았다고 했다. 걸으면 눈사람이 될 정도야, 라고 말하니 친구는 믿질 못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눈사람이 되어 엘리베이터에 탄 사진을 찍어 보냈다. 다음엔 정종이랑 오뎅을 먹자고 했는데, 목련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밤이어도 좋겠다 생각했다. 




  1. 2018.02.27 10:2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3.04 13:26 신고 BlogIcon GoldSoul

      헤- 다가오는 봄이, 좋은 봄이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정말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게 느껴져요.
      새봄씨도 좋은 봄이 될 거예요. 새봄씨도 감기 조심이요! :)

  2. 2018.02.28 08:5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3.04 21:07 신고 BlogIcon GoldSoul

      오늘도 비가 오네요. 오늘이야말로 진짜 봄비같아요. 봄이 정말 가까이 왔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따듯했어요.
      그럼요. 고약한 말의 경험은 여러번 있는 걸요. 그로 인해 관계가 꼬이거나 끊어져 버린 경우도 있는 걸요. 어떤 관계는 굉장히 소중한 관계였거든요. 사과조차 소용없었던 경우는 정말 괴로웠어요. 그냥 시간이 지나고 점점 그 고약한 말을 덜 생각하게 되었어요. 말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데, 왜 결국 또 실수를 해버리고 마는 걸까요? 아, 이러면서 오늘의 말들을 되돌아보게 되네요. 겨울나그네님의 되돌아오기까지 한 그 말은 결국 어떻게 되었나요?
      아, 맞다. 알고 계세요? 마쓰이에 마사시의 새 소설이 나왔어요!! :-)

  3. 2018.03.06 12:5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3.07 22:38 신고 BlogIcon GoldSoul

      오늘 다시 비예요!
      영화보고 나왔는데, 보슬보슬 봄비가.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고약한 마음 다 쓸어버리세요. :)

삼척

from 모퉁이다방 2018.02.18 21:18


   사촌동생은 일월 첫째주 주말에 삼척에서 결혼식을 했다. 덕분에 밤버스를 타고 삼척에 갔고, 쏴아쏴아 소리가 커다랬던 삼척바다를 다시 보았고, 바다를 곁에 두고 하룻밤을 잤다. 졸린 눈을 비비고 아침 해도 봤다. 사촌동생은 내내 싱글벙글이었는데, 이번 설에 보니 살이 두둑하게 올라 있더라. 선물이라고 건네주는 와인 두병을 그 자리에서 땄다. 새식구와 함께 두런두런 앉아 와인을 나눠 마시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내가 물었다. 뭐가 좋아요? 사촌동생의 아내가 된 새식구는 방긋 웃더니 말로 딱 나열할 순 없는데 그냥 좋아요, 라고 우문현답을 했다. 사촌동생에게도 똑같이 물었는데, 사촌동생이 엄청난 대답을 했다. 모두 그 자리에서는 막 놀렸는데, 그 말을 각자 곱씹어보고 곱씹어봤다. 동생은 새식구가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사람, 이라고 말했다. 이어지는 멘트들은 더 달콤했는데, 평소 경상도 남자 특유의 묵직함을 지니고 있던 동생이어서 더 그랬다. 결혼이 이렇게 좋은 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할 걸 그랬다, 늘 집에 가면 불이 꺼져 있었는데 불 켜진 집에서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무척 좋더라 등등의 말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곁에서 집안일을 하며 가만히 듣고 있던 숙모는 나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말을 무척 아끼는 무뚝뚝한 아들이었는데, 연애를 하면서 뭔가 조금씩 변하는 게 느껴지더라고. 아주 천천히. 조금씩 다정한 말을 건네기도 하고, 살갑게 다가오는 게 느껴지더라고. 그게 건조한 생활을 하고 있던 숙모에게도 긍정적인 기운을 불어 넣어줬다고. 좋은 연애는 이렇게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퍼져나가 주위 사람들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변화시켜주는 구나. 삼촌은 새식구에게 메시지가 오면 식사를 하시다가도 중단을 하고 20여 분 정도 답장을 하신단다. 사촌동생의 '나 답게' 말을 오래 곱씹어 보던 동생은 나중에 내게 말했다. 사촌동생이 그동안 장손의 무게를 무겁게 지고 있었는데, 새식구는 그걸 잊어버리게 만들어 준 것 같다고. 사촌동생이 사촌동생 그대로 일 수 있게 만들어 준 것 같다고. 세심하고 배려 깊은 사촌동생은 내 작은 변화를 알아차린 유일한 사람. 엄청나게 잘 살, 나의 착한 동생. 


















홀딩, 턴

from 서재를쌓다 2018.02.15 00:19



   책을 먼저 건넨 뒤, 친구는 내 얘길 가만히 듣더니 말했다. 그 책이 지금 너한테 좋을 것 같아. 잘 읽어 봐. 친구는 두 권을 사서 한 권에는 내 이름을, 다른 한 권에는 자기 이름을 적어달라고 했단다. 어떤 부분은 정말 설레였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친구가 한 말이 맞았다. 후반부는 좀 아쉬웠다. 후반부에 내가 한 생각은, 아, 소설이구나. 소설을 읽어도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 소설이 좋다. 지어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소설. 요즘 내가 계속 찾고 있는 소설. 마음에 툭툭 걸리는 문장들이 많았다. 우리가 함께 춤추는 순간들은 정말이지 행복했는데,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그렇지만 춤추는 순간들이 있었기에, 함께 한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 고 생각해 본다.



   남자는 여자에게 처음 만났을 때 부터의 마음에 대해 고백한다. 단둘이서 술을 마시게 된 봄밤에. 여자는 남자가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여자는 요새 직장 문제로 힘이 든다. 남자는 여자에게 MP3 플레이어에 음악을 담아 마음을 전하고, 일에 지친 여자는 플레이어를 내내 가지고 다니기만 하다 야근을 하던 어느 밤에 듣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만나기로 했는데, 여자가 야근 때문에 나가지 못하겠다고 하니, 남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말한 밤이다. 여자는 음악을 듣다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움직이고 설마 지금까지 기다리겠어, 생각하며 약속장소였던 카페로 간다. 남자가 있다. 여자가 들어온 지 모르는 남자는 컴퓨터를 하다 기다리는 사람이 오는 지 문쪽을 보고, 또 컴퓨터를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가지 않고 건너편에 앉아 남자를 가만히 지켜본다. 다음은 소설의 문장,


   영진이 빈 잔을 들었다 내려놓는 걸 보고 지원은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 대각선을 봐요.

   영진이 노트북 화면과 출입문을 차례로 본 뒤 지원을 쳐다보기까지 몇 분이 걸렸다. 마침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지원은 환하게 웃으려고 했으나 순간 울컥 눈물이 났다. 뜻밖의 상황에 영진과 지원 모두 당황했다. 영진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고 지원은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웃으려 애썼지만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회사 일에 지쳐서 몇 달 동안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빗장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영진이 지원의 등을 토닥이다가 팔을 둘러 가볍게 안았다. 지원은 영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 왜 울어요.

- 고마워서 그래요.

- 뭐가 고마워요.

- 기다릴 줄 몰랐어요. 

- 기다린다고 했잖아요. 늦게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주위 사람들의 시선, 카페 안에 흐르던 음악과 소음, 그들을 둘러싼 것들이 모두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둘만 남고 둘만 보일 때, 세계에서 분리된 두 사람이 서로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사랑한다는 고백뿐일 것이다. (142-143쪽)



그리고, 마음에 툭툭 걸렸던 문장들.


- 그때 우리도 일찍 와 있었잖아. 그런데 30분 내내 '사랑의 인사'가 흘러나오는 거야. 아, 결혼생활이 이렇다는 거구나. 제일 좋아하는 시디를 한 장 고른 다음 평생 들어야 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해가 쉽더라고.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메타포였던 거야. (10쪽)


   7년 전에 연애를 시작하면서 영진을 소개했을 때 이나는 착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인다고 했고 승아는 반듯하고 소신 있는 사람 같다고 했다. 언니는 순한 것 같지만 고집스러운 면이 느껴진다고 했다. 대체로 영진의 소탈함과 모범생 기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지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든 말이 모여 영진의 된다는 걸 알았다. (121쪽)


   취객들의 대화에 지원은 소리 내어 웃었다. 흩어지고 사라질 웃음이지만 위로가 되었다. 마음이 무너질 때 사람을 끝까지 지탱하고 보듬어주는 게 있다면 유머와 애정일 것 같았다. (123쪽)


   결혼생활 내내 지원은 누군가를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가, 생각했다. 한 사람은 수천 개의 갈래로 나뉘고 수많은 변수로 이루어진다. 그나 그녀를 잘 안다고 생각해도 그 앎 때문에 오히려 관계 속에서 자주 길을 잃고 좌절하게 된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보석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130쪽)


   나이가 먹어갈수록 호감이 반감으로 바뀌는 건 쉬워도 무감이나 비호감이 관심과 애정 쪽으로 돌아서기는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진에 대한 감정은 처음 손을 잡은 봄밤 이후로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싫은 건 아닌데 영진이 더 만나자고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건너편에 홀로 앉아 있는 영진의 허기와 고단함과 외로움이 이쪽으로 건너왔다. 오지 않아도 기다리겠다고 하는 마음과 실제로 기다리는 마음, 기약 없음을 견디는 마음이 어떨지 짐작해보았다. (141-142쪽)


   언니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인생의 어떤 순간에 접어들 때마다 그런 가정을 해봤다. 결론은 사는 게 심심했겠지, 인생의 많은 부분에 대해 모르고 지나갔을 거야, 로 모아졌다. 점점 더 언니가 있다는 게 행운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언니는 지원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현지인 가이드처럼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학년과 학교의 삶에 대해 알려주었고 선진 문물을 전수하듯 좋은 노래와 영화를 소개해주고 들려주고 보여주었다. 저만치 앞서가다가 가끔 뒤를 돌아보며 지원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인생에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게 축복이라는 걸 어른이 되면서 절실히 깨달았다. (162쪽)


... 시간과 물질과 감정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운 것인지 짐작조차 못했다. (164쪽)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와 자정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여름밤의 공기는 서늘했고 수박 냄새가 났다. 음악 잘 들었다고, 힘들었는데 위로가 됐다고 하자 영진은 말없이 웃었다. 오랜만에 지원은 자기 손이 아니라 맞잡은 영진의 손에 집중했다.

   그 뒤로 사귄다거나 애인이라고 말할 때 주저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 사람 사이는 좁아지고 틈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밀착되었다. 영진과 함께 있는 게 자연스럽고 제 옷을 입은 것처럼 편했다. (197-198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건 뭘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뭘까. 지원은 자주 영진에 대해, 영진을 사랑하게 된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 때면 사랑을 마법에 비유한 표현들에 수긍이 갔다. 그날 카페에서 영진을 만난 이후로도 일상은 똑같고 인생의 구성요소는 그대로인데 감정의 결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기 위해 일의 순서를 조정하고 먼 길을 달려가고 오래 기다렸다. 그런 장애들이 사랑의 방해물이 아니라 촉매제 역할을 해주었다. 별것 아닌 일도 상대에게 얘기하고 의견을 물어보고 반응을 기다렸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울어지고 그와 겹쳐졌다. 그동안 삶의 중심에 있던 것들이 영진의 바깥으로 밀려났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번에는 온도와 색채가 달랐다. (198-199쪽)



Tag // 소설, 홀딩턴

빈센트 반 고흐

from 무대를보다 2018.02.08 21:24

    


   2017년 마지막 날, 남희언니를 만났다. 우리는 한때 사무실에서 매일 보는 사이였는데, 이제는 일년에 두세번씩만 보고 있네. 그래도 작년에는 세 번 봤다. 원래 마지막 날 만나 이소라 공연을 보려고 했는데, 늦장을 부리다 좌석을 놓치고 말았다. 매진이 된 이소라 공연을 뒤로 하고, 뭔가 함께 볼 수 있는 공연을 찾다가 선우정아가 음악감독이고, 고흐 이야기니까 좋을 것 같았다. 언니와 신당동에서 만나 떡볶이를 먹었다. 언니가 맥주 할래? 라고 물었고, 나는 지금 못 마셔요, 라고 했다. 그동안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말에도 생명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말들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 말을 한 사람, 그때의 장소, 그때 공기의 흐름, 그 사람의 표정. 시간이 지날수록 울림이 커지기도 한다. 얼마 전 B의 말도 그랬다. 이제 집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 되었다는 말. 나는 그 말을 곱씹고 곱씹었다. 혼자 있을 때도 그 말을 떠올리고 혼자서 고개를 몇번이나 끄덕였다. 2017년 마지막 날, 언니는 이런 말을 했다. 이런 말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덕분에 힘이 난다고. 공연값을 물어보는 언니에게 나는, 공연값은 됐다고, 지난 한해 열심히 살아온 언니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라고, 말해줬다. 언니에게 나의 그 말이 깊게, 그리고 넓게 퍼졌으면 좋겠다. 언니가 예전만큼 강하게 빛났으면 좋겠다. 


   언니는 선물이라며 고흐의 자화상이 그려진 검은색 에코백을 사줬다. 두 개 사서 하나씩 메고 다니자고 했다. 우리는 공연 전에 마주보고 커피를 마셨다. 내가 요즘 에스토니아 맥주가 유행인 모양이라고, 탈린에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언니는 지난 핀란드 여행 때 갔었다며 사진들을 보여줬다. 언니가 보여준 사진에 중세를 그대로 재현한 맥주집의 결코 맛있어 보이지 않은 뭉툭한 맥주잔이 있었다. 맛있었어요? 라고 물어보니, 역시나 언니의 대답은 아니. 언니의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탈린에 더 가고 싶어졌다. 언니는 내게 사람을 그냥 있는 그대로, 너무 체크하지 말고 만나보라고 했다. 아,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공연을 보고 (사실 조금 졸았다. 나는 요즘 회사에서도 자주 꿈뻑하고 졸아서 깜짝 놀란다), 고흐의 밤이 새겨진 마스킹테이프랑 고흐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선물할 책갈피를 샀다. 언니는 마스킹테이프는 뭐할 때 쓰는 거니? 하고 물었다. 언니는 무슨 말을 하든 먼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준다. 편지봉투에도 붙이고, 장식하고 그런 데에 쓴다고 말하고, 새해엔 언니의 새 집에 꼭 편지를 써야지 생각했다. 언니는 5분도 걸리지 않는 신당역까지 나를 데려다줬다. 한때 우리 둘은 이 차를 타고 파주까지 가서 클래식 음악을 들었는데. 그때 언니는 초보 딱지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다는 생각을 했다. 


   서른 아홉이나 마흔이나 체감하기에 비슷한 것 같아요, 나의 말에 절대 다르다며 어른들이 왜 자기 나이를 몇학년 몇반으로 말하는 지 이해할 수 있겠다고 언니는 말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창문 너머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먼저 살아보고 마흔이 어떤지 말해줘요.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마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언니가 그래, 하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능숙하게 운전을 하며 내게서 멀어졌다. 언니의 마흔은 괜찮을 것이다. 아니, 좋을 것이다. 많이 좋을 것이다. 고흐가 살아보지 못한 서른아홉과 마흔을 우리는 산다.




  1. 2018.02.14 11:0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2.15 00:05 신고 BlogIcon GoldSoul

      아, 좋으네요! 새로운 시야. 빛. blur.
      너무 어른이 될 필요는 없겠죠?
      지금 이대로에서 조금 더 은은해지면 되는 거겠죠?
      라고 마흔이 지난 선배에게 여쭤봅니다. :)
      마흔을 잘 시작하고 있을 언니에게 곧 엽서를 쓸 건데, 겨울나그네님께서 해준 얘기 적어 보낼게요. 저도 그런 마흔을 준비하고요.
      오늘도, 감사의 인사 전해요. 헤헤-

월요일

from 모퉁이다방 2018.02.01 17:04

 

 

 

 

   영화 <초행>에는 남자와 여자가 차 앞좌석에 앉아 있는 장면이 자주, 그리고 오래 나온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서울인가 경기도 어딘가의 여자의 집에 가고, 강원도에 있는 남자의 집에도 간다. 여자는 남자에게 네비게이션이 말해주는 길을 알려주고, 남자는 이 길이 정말 맞는지 여자에게 물어보곤 한다. 마지막 장면에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광화문 광장을 걷는다.

 

   Y씨의 차에 처음 탄 건 강변에서 영화를 보고 근처 역에 내려준다고 하길래. Y씨는 의정부 쪽에 있는 동생네 집에 가는 길이어서 강변역에서 헤어지는 게 맞았는데, 그냥 탔다. Y씨가 말했다. 이 차 앞자리에 처음 탄 여자야. 얼마 전에 고모를 태웠는데, 그건 뒷자리였다고 했다. 그 밤, Y씨는 결국 응암까지 데려다 줬다. 강변에서 응암까지 가는 길이 근사했다. 주위는 칠흙같이 어두운데, 도심의 불빛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Y씨가 걸그룹 노래들을 좋아해 함께 들었다. 그 뒤, 금요일밤 상암에서 심야영화를 보고 집에 갈 때, 일산으로 백숙을 먹으러 갈 때, 화성으로 배구 경기를 보러 갈 때, Y씨의 차를 탔다. 나는 <초행>의 여자처럼 내비게이션은 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Y씨는 화성으로 가는 길에 저기가 내가 살던 동네, 여기가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라고 말해줬다. 나는 가리킨 곳을 스윽 봤다. 안양은 처음이지만 낯설진 않았다. 돌아오는 길엔 그때 데려가고 싶었던 백숙집이라면서 컴컴한 호수길을 한바퀴 돌았다. 

 

   토요일이었다. 친해지는 속도가 더디어 설 연휴 지나면 마시려고 했던 술을 당겨서 마셨다. Y씨가 월요일 이야기를 했다. 매번 연락을 먼저 하는 건 Y씨 쪽이었다. 출근 잘 하고 있는지, 점심은 맛있게 먹었는지, 퇴근은 했는지, 집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그 날은 월요일이었는데 잠들기 직전까지 Y씨에게 연락 한 통이 없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기도 해서 연락을 할까 망설이다가 그냥 잠들었다. 다음 날 Y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을 했다. 어제 아주 늦게까지 일을 했다고, 출근은 잘 하고 있는지, 점심은 맛있게 먹었는지, 퇴근은 했는지, 집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토요일날 함께 술을 마실 때, Y씨는 사실은 그 월요일에 일이 많아 너무 힘들었고, 내 연락이 한 통도 없어 힘이 무척 빠졌다고 했다. 늦게까지 시험실에 들어가 있었고, 핸드폰 밧데리도 없었고, 거의 밤을 샐 뻔 했다고 했다. 새벽 2시가 지나 집에 들어와 핸드폰을 켰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고 했다. 나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는 월요일 새벽 2시 Y씨의 마음을 생각해봤다. 갑자기 울컥했다. 간만에 술을 마셔 그런 거라 생각을 했는데, 어디선가 마음 움직이는 소리가 딸칵하고 들렸다.

 

 

 

  1. BlogIcon wonjakga 2018.02.03 17:38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딸칵! 마음에 불이 켜지는 소리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