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킬로그램의 삶 2017.12.29
  2. 교토와 독일할머니 (2) 2017.12.26
  3. 탕국 2017.12.23
  4. 닷새 (12) 2017.12.22
  5. 초행 2017.12.17

20킬로그램의 삶

from 서재를쌓다 2017.12.29 00:22



   요즘에는 집에 오면 물부터 끓인다. 최근 우리집에서 제일 열일하는 전기포트. 가을에 사둔 보이차가 바닥을 보인다. 뚜껑을 잃어버린 주전자 모양의 옥색 다기에 꽁꽁 뭉쳐진 보이찻잎을 넣고 뜨끈한 물을 붓는다. 첫물은 재빨리 따라 버리라던데, 적합한 시기를 모르겠다. 어떤 날은 따라 버리고, 어떤 날은 찻잎에 묻은 먼지 따위, 하면서 그대로 우려 마신다. 우려내는 찻물이 투명해질 정도로 옅어지면 비로소 안심이 된다. 오늘치의 물을 마셨다고. 덕분에 화장실을 자주 가지만, 가벼운 것이 들어가고 가벼운 것이 빠져나간다는 생각에 즐거운 마음이다. 다만 차의 카페인 때문인지 10시에 잠들었던 취침 시간이 갈수록 늦어지고 있다. 막내는 가을부터 연애를 시작했는데, 우리가 '아프리카'라고 부르는 남자아이가 벌써 두번이나 근사한 꽃을 선물해줬다. 첫번째 꽃다발은 내가 물컵에 담아줬다. 아끼는 녹색컵에 물을 담고 꽃다발을 포장했던 포장지가 아까워 그대로 둘둘 말아 리본을 묶어줬다. 컵의 물을 몇번 갈아주고 시들시들해지는 것 같아 그대로 두었는데, 물이 마르고, 꽃들도 마르면서 그대로 근사한 드라이 플라워가 되었다. 오늘밤에 또 근사한 생일 꽃다발을 받아왔더라. 잘 마른 꽃은 리본으로 묶어 벽에 걸어뒀다. 새 꽃은 새로운 포장지를 컵에 두르고 물을 가득 담아 꽂아뒀다. 꽃들은 투명한 테이프와 노란 고무줄로 군데군데 꽁꽁 감겨 있었는데, 가위로 재빨리 잘라 주었다. 줄기들이 아, 이제 살 것 같다, 라고 말하는 듯 했다. (요즘 피천득 수필을 읽고 있어서. 하하)


   그러니까 이 밤 결론은, 오늘치의 물을 마시고 과다 카페인 섭취로 잠이 오지 않으니 지난주에 읽은 구절들을 옮겨둔다는 것.


-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가방을 들어 올리던 손의 감각을 그리워할 때가 있다. 외국에선 방 하나가 나의 '집'이라 쉬웠는데, 방이 두 개 있는 아파트에 사는 지금은 쉽지 않다. 혼자 사는 것도 아니라 온전히 마음대로 살 수도 없다. 하지만 침실만큼은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꾸리고 있다. 매트리스, 스탠드, 피아노, 기타 외에는 아무것도 놓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작은 집'을 꾸릴 연습을 해나간다. 언젠가 가진 옷도 거의 다 버리고 싶다. 계절별로 세 벌 정도씩만 있으면 좋겠고, 신발도 몇 켤레 없길 바란다. 몇 안 되는 가구나 물건을 아끼며 오래 쓰고 싶다. 이런 얘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면 가난하게 살고 싶은 것이냐고 묻는데, 그것과는 무관하다. 오래 좋아할 수 있는 것엔 그에 대한 값을 지급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손이 두툼한 목수가 만든 나무 책상과 의자, 오래 누워도 허리가 편한 침대, 수십 년을 입어도 가치가 변하지 않을 옷... 사고 버리기를 반복하며 머지않은 내일엔 그런 것만 남기고 싶다.

   이런 걸 얘기하자면 밤새도록 얘기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려 놓았다기보다는 꿈이라서 그렇다. 걷거나 자면서 꾸는 꿈이라, 상상하며 히죽거리면 한도 끝도 없이 흘러나온다.

- 12-13쪽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

- 피천득, '인연' 중에서

- 14쪽


추위를 잊고 비행기를 구경한다.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니 돌아갈 길이 막막해진다. 길로 보이는 곳을 따라 걷고 걸어 겨우 도로를 찾았다. 더 쉬운 방법이 있다는 걸 먼 거리로 돌아온 뒤에야 깨달았지만 억울하진 않았다. 길을 돌아오면서 본 것들이 있었기에.

- 26쪽


   단잠을 깨운 것은 알람 소리가 아니라 빛이었다. 창호지를 뚫고 은은한 빛이 들어왔다. 알람이 울릴 때까지 누워서 그 빛을 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매일 듣는 익숙한 알람 소리가 울렸고, 친구는 "출근하자!"라고 외쳤다.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했고 친구는 지하철, 나는 버스를 타고 헤어졌다. 어제의 시간을 되짚으며 웃다가, 그동안 잘 지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밥도 잘 먹고 회사도 잘 다니고 잠도 잘 잤지만, 무엇인가 빠져있었다.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 어김없이 행복한 기분이 든다.

- 38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 최신판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에 들렀다. 예상했지만 새로 나온 책은 모두 대출 중이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대기자 예약을 해놓으려다, 1988년에 나온 <노르웨이의 숲>을 발견하게 되었다. 빈손으로 들어가기 아쉬워 청구기호를 손등에 옮겨 적었다. '813.32촌51' 책은 더러웠다.

- 61쪽


별다른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그 아이를 다시 만날 기회는 없을 것 같다. 세상엔 그런 관계도 있는 거겠지. 둘밖에 없는 것처럼 한때를 보냈지만, 결코 다시 볼 수는 없는 사이. 가끔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꼭 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 115쪽


   아까워서 잠시 주저했었는데 공항에 도착해 떨리는 것을 보니 그 돈을 주고 살 만한 설렘이었다. 여행 경험이 많은 친구에게 내가 가장 먼저 물은 것은 "기내식, 먹어볼 수 있겠지?"였다. "아마 두 번은 먹을걸?"이라는 답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비행기에 탑승하자 친구는 능숙한 솜씨로 승무원에게 안대, 담요, 수면 양말을 부탁했다. 비닐에 곱게 쌓인 것이 친구에게 건네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도 주세요..."라고 소심하게 말했다. 친구는 밥이 와도 깨우지 말라며 잠에 빠졌고, 나는 혼자 열네 시간짜리 여행에 빠져들었다. 담요를 꺼내 무릎에 얹어놓고 책을 꺼냈다. 흥분되어 책이 읽히지 않았다. '촌스럽게 처음 비행기 타는 티 내지 말자!'라고 호기롭게 다짐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티가 나도 여러 번 났을 거다. 몇 번씩 두리번거리며 화장실을 오갔고, 의자에 달린 리모컨을 누르며 나도 모르게 "와." 라는 소리를 냈다. 기내식 사진을 찍는다고 플래시를 여러 번 터뜨리기도 했다. 열네 시간을 지루한 줄 모르고 보냈다. 수첩을 꺼내 항공권값을 시급으로 나눠보며 '그렇게 일해서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 감상을 일기장에 끄적거렸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우리 앨런 영화 두 편을 보며 여행을 기다렸다.

- 119-121쪽


미리 준비하지 않아 가고 싶은 곳에 못 가도 낙담하지 않고 카페나 공원에서 시간을 보낸다. 천천히 걷고 어딘가에 앉아 낯선 것을 보는 정도로 만족하는 어설픈 여행자.

- 138쪽


   여행 다닐 땐, 똑딱이 카메라 두 대를 갖고 간다. 하나는 필름카메라고 다른 것은 디지털카메라다. 여행을 다녀와 사진을 보여준 적은 있지만, 내가 어떻게 사진을 찍는지 엄마는 본 적이 없다. 여느 여행과 다름없이 천천히 걷다가, 바라보다가, 멍하게 있다가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옆을 보면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있었다. 영 낯선 것을 발견한 표정으로.

   잠들기 전, 엄마는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말없이 사진을 보다가 "카메라를 하나 살까?"라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작년 언젠가도 같은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좋은 생각이 났다. "엄마, 이번 여행 동안 디지털카메라를 빌려줄게. 여기에 엄마가 본 걸 담아. 돌아가면 몽골 여행으로 글을 하나 써야 하는데, 그때 엄마 사진을 실을게." 그 후, 엄마는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내가 찍은 것 좀 봐봐. 잡지에 실릴 만한 것 같아? 괜찮아?"라고 자꾸 묻기에 "걱정하지 마, 못 나와도 책임지고 엄마 사진은 꼭 실을게."라고 놀리듯 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엄마가 잘 때 몰래 훔쳐본 카메라 속의 사진은 아름다웠다.

- 154-155쪽


지난 일이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려고 애쓰지만, 혼자 가만히 생각하면 뼈 안쪽이 저릿하다.

- 158쪽






   연휴 이틀 동안 XTM에서 <또 오해영>을 연속방송해줬다. 일요일에 우연히 발견하고 종일 보고 있었다. 케이블이라 광고가 길어서 광고 할 동안 마트에 다녀오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했다. 다시 봐도 좋더라. 오해영이 잔디밭에 가만히 앉아 울적한 마음을 지워보려 애쓰는 장면. 해영이는 주문을 왼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행복한 것을 떠올려보아요." 에릭이 여자 혼자 사는 티 내지 말라며 현관 앞에 자신의 커다란 구두를 무심하게 가져다 놓던 어떤 밤의 기억. 오늘 나는 오해영의 주문을 생각해냈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행복한 것을 떠올려보아요. 커다란 구두 같은 로맨틱한 기억은 최근에 없으므로, 어제 오후 친구와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 오후를 떠올렸다. 우리는 이대역에서 만났다. 반대 방향으로 타는 바람에 걸어가도 충분한 거리에 오천원 넘는 택시비를 지불했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해 담백하고 건강한 두부요리를 따뜻하게 먹었다. 나는 그간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줬는데, 친구가 재미있어 해서 기분이 좋았다. 두부집에서 오래 있었고, 같이 많이 웃었다. 합정까지 전철을 타고 와 나는 남색 운동화를 사고, 친구는 하얀색 목티를 샀다. 커피집에 커피를 마시러 갔고, 오래되고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를 두서없이 두런두런 나눴다. 친구가 선물해준 교토 책을 다 읽었다고, 나중에 나이가 들면 내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카페 같은 걸 하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고 하니, 친구는 그럴려면 니 건물이어야 해, 라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다. 가지 못한 강릉의 바다 이야길 했고, 언젠가 가게 될 교토의 백만원짜리 료칸 이야기도 나눴다. 가고 싶은 제주도의 근사한 숙소 이야기도 했다. 우리는 오래 만나지 못했는데, 서로에 대한 소소한 것들을 꽤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고마웠다. 친구는 책을 두 권 더 추천해줬는데, 오늘 그 책들을 기억해봤다. 교토에서 한달동안 머물며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쓴 남자의 책과 퀴즈쇼에서 우승을 한 뒤 그 상금으로 한달에 한도시 살기의 꿈을 실현한 독일 할머니의 책. 그 분의 글도 역시 편지란다. 언젠가 우리도 한 도시에서 한 달 정도 살아볼 수 있을까, 어느 작은 지방도시에서 그러면 어떨까 상상해봤다. 생각만 해도 좋더라. 특별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한 달. 헤어지고 친구는 즐거운 크리스마스였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친구가 보고 싶었다던 영화를 선물로 보냈다. 조용한 시간에, 조용히 보라고. 분명 좋을 거라고. 오늘은 마음이 좀 힘들었는데, 어제의 고요한 기억이 오후를 버티게 했다.


 


  1. 2017.12.29 09:5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1.01 09:01 신고 BlogIcon GoldSoul

      와, 들어볼게요. 제목이 왠지 조용한 오후에 들으면 좋을 것 같아요.
      아껴두었다 꼭 들어볼게요. 감사합니다. :)
      한달의 꿈은 언제고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정말 그런 날이 올까 싶지만요. 흐흐- ㅠ

탕국

from 모퉁이다방 2017.12.23 23:01



   동생이 끓여준 미역국이 끝이 보였다. 갑자기 명절 때 먹는 탕국이 생각났다. 레시피를 찾아보려고 검색해보니 탕국이 경상도 음식이었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명절 음식은 해물이 가득 들어간 탕국이랑 야들야들하게 익혀 적당한 두께로 자른 문어. 문어는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보다 소금이 들어간 참기름장에 먹는 걸 좋아한다. 엄마한테 레시피를 물으니 소고기도 들어가네. 엄마가 알려준 레시피에서 소고기는 뺐다. 멸치와 다시다 국물을 낸 뒤에 마트에 다녀왔다. 해물을 듬뿍 넣고 싶어 홍합살과 새우살과 바지락살, 굴을 사고 알래스카산 말린 황태도 샀다. 내일 먹으려고 두부도 사고, 아몬드도 샀다. 계란도 떨어져 6개 대란 한 통을 샀다. 다코야끼볼 과자를 사려다가 오늘 사둔 통밀 스콘이 있으니 참았다. 집에 와 두부와 계란는 냉장고에 넣고, 해물을 모두 체에 넣어 차가운 물에 씻었다. 육수를 우리며 잘게 잘라둔 무와 두부를 넣고, 차갑게 씻은 해물도 넣고, 알래스카산 황태도 가위로 잘게 잘라 넣었다. 그리고 참기름과 들기름을 넣고 (참기름도 끝이 보이네) 달달 볶았다. 그럴듯한 냄새가 나기 시작해 멸치다시다육수를 냄비 가득 붓고 중간불로 맞췄다. 엄마가 주고 간 보이차를 내려 마시며 중간중간 냄비를 체크했다. 국자로 재료를 골고루 섞어주며 마법을 걸었다. 건강해져라, 건강해져라. 오늘의 저녁 약속은 취소되었지만, 다음 번에 만날 때 더 좋은 시간이 되리라. 그나저나 두부는 너무 일찍 넣었네. 내일은 따듯한 탕국을 따끈따끈하게 새로 지은 밥이랑 먹을 거다. 아몬드와 두부, 우유를 넣고 고소한 콩물도 만들어 먹고, 닭가슴살을 넣은 담백한 만두도 쪄 먹어야지. 비나 눈이 온다니까, 통밀스콘은 커피를 따뜻하게 내려서 먹어야겠다.


 

닷새

from 모퉁이다방 2017.12.22 07:54



   닷새동안 침대 두 개가 들어가고 조금 남을 만치의 공간을 온전히 가졌다. 침대는 하나였고, 앞과 옆으로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침대에 앉아 오른쪽의 커튼을 치면 창문이었다. 창가에 손에 자주 닿는 물건들을 놓아두고 썼다. 수첩과 펜, 책과 립밤, 휴지와 이어폰, 엽서와 물통. 첫 날은 동생이 함께 왔고, 다음 날에 동생과 엄마가 왔다. 다음 날에는 친구들이 와주었다. 그 다음 날엔 혼자였다. 밤에 동생이 퇴근을 하고 와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가줬다. 마지막 날엔 아침밥을 먹고, 책을 읽다가, 옷을 갈아입고, 원무과에 가서 정산을 하고, 퇴원증을 간호사에게 건네주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지난 두어달 겁이 났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도 있었지만, 담아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닷새 동안은 편안했다. 밥을 먹지 못할 때는 먹고 싶은 것들을 적어 내려갔다. 몽글몽글 스크램블, 잘 구워진 소고기, 아삭아삭한 양배추에 된장, 해물이 들어간 보글보글 된장찌개, 함께 먹는 샤브샤브, 밤의 피크닉에 나온 쑥팥떡. 모두들 친절했다. 마지막 날이 되자 아쉬울 지경이었는데, 소등이 된 뒤 쥐도새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꿀잠과 새벽 일찍 일어나 조용히 화장실을 다녀와서 독서등을 켜고 했던 새벽독서의 따스한 분위기가 그리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아침이 가까워지고 의사 선생님이 회진을 돌았다. 미소를 지으며, 어떠세요? 라고 물었고, 나는 매번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마지막 날에는 선생님이 이렇게 일찍 일어나 책 읽고 있어요? 라고 이야기해주셨다. 무통주사 때문인지 별로 아프지 않았고, 하루하루 기력이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그제보다 어제가 나았고, 어제보다 오늘이 나았다. 선생님은 그럼 우리는 1월에 봐요, 라고 올해 마지막 인사를 했다.


   어제는 퇴원을 무사히 하고 오후에 집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무사히 끝난 것이 고맙고 감사했다. 많은 것들이 생각나면서 눈물이 막 쏟아졌다. 혼자 가만히 울었다. 몸의 털을 정성스럽게 밀어준 조무사 분은 수술실로 갈 때 긴장하지 말라고, 절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러 번 말해주셨고, 담요를 목 아래까지 꼭 덮어주셨다. 수술실에서 주치의 선생님은 일부러 얼굴을 보이며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말해주셨다. 회복실에서 들리던 목소리도 생각이 난다. 엄마와 동생은 수술을 하는 동안 내 몸에서 나온 혹을 봤는데, 그리 크지 않더라고 말해줬다. 수술 다음 날에는 바로 걸을 수 있어 조무사에게 부탁해 시원하게 머리를 감았는데, 머리가 젖어 있으니 간호사가 커튼을 열더니 머리 감으셨네요, 라고 웃어주었다. 하루동안은 수액과 무통과 한몸이 되어 걸어다녔다. 그 무게를 기억해본다. 곤히 자고 있으면 새벽에 간호사가 핸드폰 플래쉬를 조심스럽게 밝히며 들어와 체온과 혈압과 수액을 체크해줬다. 친구는 제주 마을이 담긴 엽서와 출근할 때 이쁘게 입고 가라며 꽃이 새겨진 파란색 스웨터를 선물해줬다. 엽서는 창가에 꽂아뒀다. 또 다른 친구는 택시비 하기엔 너무 많은 돈을 쥐어주며 퇴원할 때 꼭 택시 타고 가라고 적어줬다. 엄마는 당일에 올라와 당일에 내려갔는데, 용돈과 먹을 수 있게 되면 먹으라며 과자와 두유를 남기고 갔다. 매일매일 안부를 물어봐주던 사람들이 있었고, 병원에 있는 동안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었다. 눈이 엄청나게 왔는데, 내다보기만 하니까 실감이 잘 나질 않았다. 엽서를 세 장 썼고, 책을 세 권 읽었다. 친구는 교토의 책을 선물로 주고 갔고, 나는 다 읽은 온다 리쿠의 책을 집으로 가는 친구에게 주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늘 조용히 와서 조용히 말하고 병실을 나갔다. 나흘 내내 짙은 남색 패딩을 항상 입고 계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먹지 못하던 시간과, 먹기 시작한 시간, 걸어본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고민하다가 이 곳은 잊지 않으려고 쓰는 곳이니까, 집에 와 하룻밤을 보내니 그 시간들이 내 기억 속에서 금세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이 곳에 그 시간들을 남겨둔다. 친구는 오래 전 같은 병원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 시간을 기억해두기 위해 병원에 있는 내내 함께 했던 팔목의 팔찌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단다. 나도 집에 와서 내 이름과 나이, 의사 선생님 이름이 함께 적힌 팔찌를 가위로 잘라 투명한 테이프로 붙여서 지갑 속에 깊이 넣어뒀다. 다가오기 전에는 안 왔으면 좋았을 시간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경험해보니 (이렇게 말해도 될까) 좋은 시간이었다. 앞으로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고마운 마음을 잊지 말고 언젠가 꼭 갚아야 된다고도 생각했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노력하고 싶다는 생각도. 읽던 책에 피천득의 문구가 인용되어 있었는데, 너무 좋아 여러 번 읽었다. 그리고 피천득의 수필을 주문했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



 

  1. 2017.12.22 15:1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2017.12.24 02:4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3. 2017.12.26 16:4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4. 2018.01.02 12:0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1.03 08:31 신고 BlogIcon GoldSoul

      와, 균형님이다. :) 반가워라.
      요 며칠 약간 묵직한 감이 있는데, 마침 오늘 외래 가는 날이에요. 가서 좋고, 이상없다는 말만 듣고 오고 싶어요. 네, 맞아요. 수술은 수술이더라구요. 그래서 앞과 뒤, 편안하게 보내려고 노력했어요. 안부 물어봐주어서 고마워요.
      균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는 따듯한 일 많기를 기원합니다아-

  5. 2018.01.04 17:2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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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1.04 23:38 신고 BlogIcon GoldSoul

      덕분에 좋은 얘길 듣고 왔어요. 충무로에서 일하시는구나. 그럼 6호선을 타고 불광역까지 가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출퇴근 하세요? 저는 충무로를 집에서 좀 멀게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에 자주 다녀보니 꽤 가깝더라구요. 아, 저는 출판일을 하고 있지 않아요. 충무로는 병원 때문에 다녔답니다. :) 앗, 이번주도 충분히 추웠는데, 그렇다면 얼마나 추울 거라는 걸까요? 상상도 되지 않네요. >.< 언젠가 균형님의 단골가게에서 따뜻한 커피를 얻어 마시는 상상을 저도 해 보아요. 말씀만으로도 고맙고, 언젠가 꼭 실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보아요. 균형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6. 2018.01.05 17:0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1.09 21:01 신고 BlogIcon GoldSoul

      5호선이면 을지로에서 타시나보다. 이동경로를 이렇게 추측해보아요. :) 저는 겨울이 좋고, 추운 것도 좋지만, 따뜻해지는 봄이 오면 어떨까 오늘 생각해보았어요. 꽃도 필 거고, 많이 움직일 수 있을테고. 그 봄이 오기 전에 다시 없을 이 겨울을 즐겁게 보내요, 우리.

초행

from 극장에가다 2017.12.17 09:14



    지난주는 유난히 추워서 고민을 했었다. 영화가 끝나고는 추위를 뚫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초행>은 7년을 사귄, 동거를 하고 있는 남녀가 각자의 집으로 '함께' 가는 이야기이다. 여자의 집에 가는 남자는 익숙하다. 여자의 집은 부동산 투자에 열성인 어머니 때문에 잦은 이사를 하고 있다. 이번에는 새로운 집으로 간 거지만 남자는 여자의 부모님을 대하는 게 익숙해보인다. 부모님은 돈도 직장도 아직 불안한 두 사람을 걱정한다. 여자는 자신들을 닥달하고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 엄마가 짜증나고 서럽다. 여자는 남자의 집에 처음 간다. 남자는 자신의 집을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환갑을 맞아 함께 속초로 가게 된다. 여자는 술에 취해 욕설을 내뱉는 남자의 아버지, 견딜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게 지옥이었다는 남자의 어머니와 마주한다. 괴로웠던 밤이 지나고, 차에서 밤을 지새운 여자의 앞에 남자가 나타난다. 애교를 부리며 미안했다고 너무 추우니 문을 열어 달라고 한다. 지난 밤,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온 남자에게 여자는 돌아가자고 했다. 이렇게 나와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남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돌아가고 싶으면 혼자서 가라고 화를 냈다. 결국 두 사람은 떠오르는 해를 마주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남자의 어머니와 남자의 형과 함께 소박하지만 따뜻한 아침밥을 함께 먹고 서울로 돌아온다. 어머니는 괜찮다는 여자에게 기어코 용돈을 안겨준다.


   나는 이 영화가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 괴롭다는 누군가의 평을 보고서 볼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역시 보고 싶은 건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고 보는 것이 최고라는 결론을 다시금 얻었다.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집에서 먼저 도망쳤지만, 이를 타박하거나 먼저 도망치자고 강요한 사람은 상대방이 아니었다. 상대는 잘 되진 않지만 상대의 집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나는 그 모습들이 좋았다. 여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닮고 싶어하지 않는다. 여자는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절대 닮고 싶어하지 않는다. 남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여자에게 항상 애교섞인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 대답을 한다. 두 사람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이 부분이 좋았다. 삼십대 후반이 되어도 자신의 못난 부분을 어린 시절 탓을 하며 합리화시키려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게 얼마나 못나 보이는지 새삼 깨달았더랬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만.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가정사가 있고, 그걸 탓하기보다 극복해 나가는 것이 좋은 어른이 되어가는 길이라는 걸 끊임없이 떠올리고 있다. 영화 속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응원하게 되더라.

   어제는 미용실에 가서 <초행>의 김새벽 머리를 보여주며 이렇게 잘라주세요, 라고 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머리 잘랐냐고 이상하게 잘랐네, 했지만 나는 김새벽의 단정한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엔 김새벽과 조금은 다른 머리가 되었지만. 여자가 남자의 집에 가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있던 모습과, 남자의 아버지가 소리치기 시작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테이블 정리를 하기 시작하던 그 얼굴이 계속 생각이 난다. 어머니와 형과 함께 아침밥을 먹을 때 김을 꾸욱 싸먹던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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