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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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일기서재를쌓다 2017. 11. 29. 22:48
한나는 롤랑 바르트의 일을 겪었다고 했다. 몇달 만에 나타나 그동안 별일이 없었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말했다. 나는 힘들었겠다, 말했다. 눈가가 촉촉해진 한나가 이제 괜찮다고 했다. 십일월의 시옷의 책은 롤랑 바르트의 였다. 십일월 시옷의 모임에, 우리는 셋이서 만났다가, 잠시 넷이 되었다가, 다시 셋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넷이 되었다. 셋일 때 책 이야기를 했는데, 둘이 하진이가 왜 이 책을 골랐을까 읽으면서 궁금했다고 했다. 나는 생각보다 책이 그렇게 우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나는 반쯤 읽었다고 했는데, 끝까지 롤랑 바르트가 이런 마음이냐고 물었다. 나는 극복하고 다시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해설에 있던 그의 죽음에 대해 말해줬다. "1980년 2월 25일 바르트는 작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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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빼기의 기술서재를쌓다 2017. 11. 28. 22:45
짜증나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면,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 사람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떻게 이 상황을 넘겼을까. 내가 상상하게 되는 '그 사람'은 내게 없는 장점들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이것 따위! 하고 힘든 생각들을 냅다 내다버릴 수 있는 담대함, 무한한 긍정적 기운. 최근에 책도 읽고, 팟캐스트도 듣고 해서인지 긍정 기운을 생각하며 김하나 씨를 생각한 적도 있다. 김하나 씨는 의 김민철 씨 인스타에서 처음 얼굴을 뵈었는데, 술을 마시고 찍은 사진들이었다. 포즈들이 굉장히 역동적이고, 코믹하기도 하고, 힘찼다. 긍정 기운이 그득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고, 책을 읽고 난 뒤에는 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둥실 둥실, 두둥실. 올해의 남은 날들은 힘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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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카레모퉁이다방 2017. 11. 25. 00:40
이번 주는 길고, 힘들었다. 많은 생각을 했는데, 무엇 하나 녹록치 않구나 생각했다. 관계란 뭘까. 이번 주의 결론은, 언제든 깨어지기 쉬운 것. 누군가의 노력이 있다면, 다시 이어붙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전만큼 튼튼해질 순 없을 것이다. 요즘 들어 지난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때 그 사람, 그렇게 힘들었을텐데, 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네, 하고. 요즘 저녁을 가볍게 먹으려고 하고 있다. 맥주는 (무척 아쉽지만) 마시지 않은 지 몇 주 되었다. 신기하게 마시지 않게 되자, 별로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언젠가 한 잔을 아주 찐-하고 맛나게 마실 그 날을 기다리며. 겨울이니, 병맥주를 사야지. 깊은 맛이 나는 진한 걸로. 유리컵을 씻어 냉장고에 넣어뒀다 꺼내야지. 삿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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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진 킹극장에가다 2017. 11. 22. 22:12
오늘 출근 길에 기억해냈다. 의 그 똘똘한 여자가 엠마 스톤이었어. 어제는 퇴근을 하고 상암에 가서 엠마 스톤을 만나고 왔다. 금색 안경을 끼고, 다무진 표정을 보이던 빌리 진 킹. 나는 빌리 진 킹을 몰라서, 실제 인물과 싱크로율이 매우 높다는 평에 그런가보다 했다. 나는 에서보다 에서의 엠마 스톤이 더 예뻐보였다. 컬러풀한 드레스를 입지 않아도, 발랄하게 스텝을 밟으며 춤추지 않아도, '미아'보다 '빌리 진 킹'인 그녀가 더 예뻤다. 화장을 하면 그 큰 눈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는데, 옅은 화장을 하니 더욱 예뻐보였다. 웃을 때 보이던 팔자주름도 자연스러웠고, 민소매 운동복에 드러난 어깨는 건강하게 그을려 있었다. 결국 그녀가 그를 이겼을 때, 그 환희를 곧장 즐기지 않고 잠시의 시간을 혼자서 갖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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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 중에 잼을 졸이다서재를쌓다 2017. 11. 19. 08:59
퇴근길에 깐밤을 만원 어치 샀다. 오천원 어치씩 포장이 되어 있어서 하나를 살까, 둘을 살까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하나는 부족한 거 같아 두 개를 샀다. 집에 꿀도 있고, 우유도 있다. 며칠동안 생각한 밤잼을 만들어 보았다. 깐밤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한번 끓였다. 드문드문 붙어 있는 밤 껍질을 정리해 주고 으깼다. 살짝 식힌 뒤에 우유를 넣고 믹서기에 갈았다. 밤이 퍽퍽해서 잘 갈려지지 않더라. 그렇게 간 밤우유를 냄비에 다시 넣고 끓였다. 꿀을 듬뿍 넣었다. 오래 끓일수록 냄비 밖으로 밤꿀우유가 튀여서 뚜껑을 덮어 뒀다. 그러다 타지 않나 뚜껑을 살짝만 열고 주걱으로 바닥을 뒤적거려 줬다. 또 덮어 두고, 또 뒤적거려 줬다. 잼을 만드는 것은 이 일의 반복이구나 생각했다. 그 시간이 은근히 길어서 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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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완전하게서재를쌓다 2017. 11. 18. 10:07
혼자 여행가 있을 때, 동생이 돌아오면 읽어보라고 했던 책을 이제서야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천둥번개도 치고, 지진도 났다. 세상은 불완전하다. 이 책으로 일상에 제법 힘을 얻었다. 읽으면서 생각한 건, 내가 나 자신을 불완전하게 생각하는 건 남들과 비교를 해서라는 것. 비교하게 될 때, 나는 내가 부족한 걸 계속 떠올리는 거다. 그렇지만 내겐 남들에게 없는 것들도 있는 걸. 불완전하다고 느낄 때마다 그것들을 끊임없이 떠올려야지. 다 읽은 책을 세가지 색 스티커로 분류해 놓는 방법은 정말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소장할 책, 누군가에게 줄 책, 누군가를 주지도 못하겠다 그냥 버릴 책. 이렇게 세가지 색으로 책을 분류해 놓고, 처분을 한다는 것. 나는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일단 사두고 책장에 꽂아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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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닥, 네번째 롤모퉁이다방 2017. 11. 15. 21:51
오늘은 일을 하다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는 집을 설계하는 일을 하시는데, 예전에는 모두들 손으로 설계도를 그렸다. 사무실에 가면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커다란 책상들이 있었고, 커다란 종이들에 건물 도면들이 곧게 그려져 있었다. 시대가 변했고, 아빠는 그 속도를 쫓아가지 못했다. 캐드며, 그 딴 것들을 배워뒀어야 했는데. 이제는 누구도 손으로 설계도를 그리지 않는 것 같다. 내 일이 그러하듯 메일로 중요한 자료들을 주고 받고. 아빠는 그것들에 익숙하지 못하고. 오늘 전화로 자료를 요청하는데, 잘 모르고 보낸 것이 다라고 계속 이야기하셔서 짜증이 났다. 그런데 가만 듣고 보니 우리 아빠 같은 거다. 제가 잘 몰라서 그래요, 하시길래 그럼 필요한 부분들을 다 적어 보낼테니 다시 보내달라고 했다. 차장님은 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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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모퉁이다방 2017. 11. 13. 22:04
지난 주말에는 1시간 40분 거리에 있는 친구네 집에 다녀왔다. 친구는 스테이크도 구워주고, 스크램블도 만들어 주고, 양파도 구워 주었다. 스무살 때 돈이 없었던 우리는 친구에게 찾아가 술을 사달라고 했었다. 자주 그랬다. 친구는 언제나 군말없이 사주었기 때문에 언제나 돈이 넉넉하게 있는 줄 알았다. 사실은 그게 얼마 남지 않은 용돈이었고, 다시 부모님께 전화를 해 조금 더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줄은 정말 몰랐다. 그랬던 키가 크고 삐쩍 마르기만 했던 친구는 이제 구연동화를 하며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빠가 되었다. 또 다른 친구는 샐러드를 만들어주고, 내가 오니까 청소를 실렁실렁 했다고 남편에게 칭찬 받고,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이게 그때 대만에서 니가 사준 다기라며 그 다기로 내가 가지고 간 보이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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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한 순간들극장에가다 2017. 11. 12. 22:01
그러고 보니 십일월 첫날이었네. 충무로에서 영화 을 보았다. 조림이는 니카라과로 가기 전에 롤랑 바르트의 를 함께 읽자고 했다. 조림이는 소설보다 에세이를 좋아하고, 특히 일기를 좋아한다. 영화를 볼 때에는 책을 다 읽은 후였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책 생각이 났다. 는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날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이다. 일기는 2년 뒤에 끝났고, 6개월 뒤 롤랑 바르트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한 달 뒤 사망한다. 그는 일기에 생전 어머니를 떠올리고, 그리워하고, 그녀가 이제 곁에 없음을 슬퍼했다. 영화 은 미래의 이야기이다. 인공지능이 죽은 이의 모습을 하고 앉아 있다. 남은 이는 이제는 세상에 없는 이의 모습을 마주하고, 과거에 함께한 이야기를 나눈다. 남은 자는 죽은 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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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서재를쌓다 2017. 11. 11. 08:28
며칠 전, 예스24와 비씨카드가 만든 '책읽아웃' 팟캐스트를 들었다. 팟캐스트는 주로 불광천 길을 걸으면서 듣는다.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다. 김하나와 김동영이 번갈아서 진행을 하는데, 김동영 편에 뮤지션 오지은이 나왔다. 둘이서 앞으로 나올 책 이야기를 하는데, 오지은이 말했다. 내 식대로 요약을 하자면 이렇다. 왜 나는 여행을 가서도 마냥 행복하지 않은가, 그런 감정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고, 쓰고 있다고 했다. 지금 글이 잘 진행되지 않아 괴롭다고 했는데, 방송을 듣고 이 책을 기다리게 되었다. 저도 그래요, 왜 그런가요, 알려주세요, 오지은님, 이런 심정이랄까. 김동영도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두 사람이 친해서 그런지 이야기하는 게 꽤 재밌었다. 지난 추석에는 이 책을 재미나게 읽었다. 한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