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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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출발여행을가다 2017. 6. 21. 13:10
기억에 남는 여행은 언제나 실패하는 에피소드들이 있었다. 비행기를 놓치기도 했고, 소매치기를 당할 뻔 하기도 했고, 계획했던 곳을 못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좋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그러므로 나는 이번 여행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에피소드만 일어나지 않기를. 이번 여행을 생각하면서 어떤 이미지들이 떠올랐는데, 처음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이 긴긴 여행을 떠나게 된 순간 그에 손에 들린 게 책 한 권과 기차표 하나였다는 것. 두번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인천까지 오는 비행기에서 작은 등 하나 켜두고 두꺼운 책을 긴 비행 내내 읽던 서양인 청년. 세번째는 리스본 테주강에서 이어폰을 끼고서 미동도 하지 않고 강을 바라보던 동양의 여자아이. 가서 쓰라고 차장님이 주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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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모퉁이다방 2017. 6. 18. 14:16
이번주는 혼자 일어나고, 혼자 잠이 들었다. 동생들이 여행 중이다. 막내는 목요일날 돌아왔고, 둘째는 오늘 돌아온다. 혼자서 온전한 저녁과 밤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집에 들어와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풍성한 샐러드를 만들어 먹고, 어떤 날은 맥주도 한 캔 마셨다. 한 캔 이상 마시면 다음날 혹시나 못 일어날 까봐 겁이 나서. 어떤 날은 음악을 들었고, 어떤 날은 과제를 했다. 어떤 날은 책을 읽어보려 노력했으며, 어떤 날은 수업을 끝내고 친구와 맥주를 마시고 밤버스를 탔다. 금요일에는 Y씨와 함께 차장님에게 생일턱을 냈다. 이 날도 역시 밤버스를 탔는데, 정류장을 잘못 찾아 한참을 걸어가 탔더랬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버스에 사람들이 없었다. 좋은 자리에 앉아 창문을 살짝 열었다. 바람이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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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는 계란지짐이와 복어포모퉁이다방 2017. 6. 9. 01:10
내 기억에 따르면, 외할아버지는 노년에 항상 외로움과 술에 취해 계셨다. 외로움이 먼저인지, 술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어린 내가 보기에도 외할아버지는 고집이 세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손녀인 내게는 따스한 사람이었다. 같은 읍에 살았던 우리가 외갓집에 하도 놀러오지 않자 할아버지는 직접 우리 아파트에 찾아오셔서 멀뚱멀뚱 한참을 계시다 가시곤 했다. 아, 나는 왜 그렇게 애교 없는 손녀였을까. 얼마전 외삼촌네랑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우리는 외할아버지가 손재주가 무척 뛰어난 사람이란 걸 알았다. 오늘은 외식의 날이어서 S씨와 N씨와 함께 근처 휴게소에 가서 올해 첫 모밀국수를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왜 이렇게 에세이들이 수도 없이 출간되는가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가 그랬다.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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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저녁은 포장해온 동네 병천순대에 칭다오 캔맥주모퉁이다방 2017. 6. 6. 20:18
월요일에 만난 남희 언니는 봄에 다녀온 핀란드 여행 이야기를 해줬다. 일년동안 정말정말 일만 했던 언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고 한다. 나는 물었다. 언니, 카모메 식당 거기 다녀왔어요? 응, 금령아, 다녀왔어. 언니는 항상 말을 할 때 상대방의 이름을 꼬박꼬박 불러준다. 언니는 헬싱키에서 카모메 식당의 촬영지도 다녀오고,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도 보고, 그 감독이 운영하는 바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그리고 전도연과 공유가 나왔던 영화 촬영지와 비슷한 숲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에도 머물렀다고 했다. 그곳에서 하는 일이라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창밖의 설원 풍경을 보면서 침대 위에서 책을 읽고, 주인 아저씨가 길을 만들기 위해 썰매를 끌러 가는 길에 동참하는 일. 언니는 이곳을 일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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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서재를쌓다 2017. 6. 6. 03:09
지금 시간 새벽 2시 20분. 정말정말 오래간만에 잠이 오질 않는다. 사실 아까 한 차례의 고비가 찾아왔는데, 영화를 보던 중이었고, 내일 쉬는 것이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러고나니 잠이 달아났다. 한때 내가 사랑하던 새벽 시간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열 두시 되기 전에 잠들어 푹 자는 것이 가장 큰 행복. 간만에 새벽의 행복을 맛보고 있다. 잠이 확 달아나버려 아예 일어났다. SNS에서 오지은이 알려준 뒤로 냉밀크티를 종종 해먹는데 맛있다. 우유에 홍차잎을 가득 담아 냉장고에 밤새 넣어두기만 하면 된다. 나는 단 걸 안 좋아해서 시럽도 안 넣고 그냥 마신다. 내일 아침에 마셔야지. 그러고 물을 끓여 차를 우려냈다. 우유도 살짝 섞었다. 노트북을 켜고 책장에서 책을 가지고 왔다.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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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이토씨극장에가다 2017. 6. 3. 09:07
티비를 보지 않으니, 내가 그동안 티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뺏기고 있었는지 알겠다. 뉴스랑 예능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퇴근하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 부족했는데, 이제는 넉넉한 건 아니지만 뭘 더할까 생각해보는 시간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다 일찍 자버리기 일쑤지만. 이번주에는 그럴 때 를 틀어뒀다. 나는 좋아하는 장면이나 이야기를 반복해서 보는 걸 좋아하는데, 최근에는 의 앞부분을 반복해서 봤다. 그레고리우스가 새벽 일찍 일어나 혼자 아침 시간을 보내는 모습. 혼자서 두 명 분량의 체스를 두는 것이나, 티백이 떨어져 어제 마셨던 티백을 찾아내 다시 우려내는 것. 그 쓸쓸하지만 이상하게 따뜻한 모습을 반복해서 본다. 그리고 다리에서 떨어져 자살하려는 여자를 구하고, 그녀와 함께 걷고, 황급히 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