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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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오전, 오키나와여행을가다 2016. 7. 31. 22:38
끼니를 때워야 해서 호텔 밖으로 나가니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모스버거가 있었다. 서글서글한 아가씨가 주문을 받았다. 나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아가씨의 일상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번은 홋카이도 오타루의 KFC에서 너무나 권태로운 표정의 점원을 본 적이 있다. 오르골, 운하, 영화 의 대사 "오겡키데스카"로 유명한 동네에 찾아오는 얼빠진 관광객들에 지친 터프한 오타루 처녀. 빨리 지긋지긋한 이곳을 떠날 생각만 하겠지. 자기 마을의 스시가 세계에서 제일 맛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구마모토 모스버거의 아가씨는 씩씩했다. 이 아가씨는 무슨 마음으로 시내 중심가가 아닌 낡은 구마모토 역의 모스버거에 지원했을까. 일은 즐겁게 하고 있을까. 여기서 친구는 사귀었을까. 아르바이트비로 무엇을 살까. 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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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서재를쌓다 2016. 7. 27. 23:00
이런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몸 속 어딘가에, 아니 마음 속 어딘가에 누군가가 내게 했던 말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있는 것 같다고. 전혀 잊고 있었던 말인데, 어느 순간 문득 떠올라 나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때의 그이는 이런 마음이었던 거구나. 그때의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금의 내가 그 마음을 백프로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거다. 그 말들은 아주 소소한 말들부터 의미심장한 말들까지 다양하다. 따뜻한 말도 있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말도 있다. 얼마 전 만난 남희언니는 친구 얘기를 하며, 그즈음엔 술을 마시면 신이 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어, 신이 나는 게 미안했어,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이 어느 저녁 친구네 집으로 가는 지하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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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은과 방백무대를보다 2016. 7. 19. 22:55
지난 금요일에는 비가 왔고, 우리는 그 비를 뚫고 홍대의 공연장에 도착했다. 나는 이 공연을 삼만원에 응모했고, 이만원에 낙찰받았다. 만원이나 굳었다. 그런데 최고은과 방백, 이 사람들이 두 시간이 넘게 공연해줬다. 나와 친구는 이 돈을 내고 이렇게 길고 열성적인 공연을 본 것에 미안했고, 감사했다. 백현진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나와 의자에 앉았고 준비가 되자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흠뻑 그 노래에 빠져버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연체동물처럼 몸을 이렇게 저렇게 흐느적거렸다. 그 움직임은 노래의 리듬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영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엔 신기했다. 저렇게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언젠가 시옷의 모임에서 한 뮤지션을 두고 꼭 약 한 것 같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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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들모퉁이다방 2016. 7. 15. 00:37
나는 7시 13분에 '아침부터 맥주얘길하다니, 무척 신난다아.'라고 보냈다. 동생은 8시 58분에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커피 내리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7월에 생일인 친구는 '담주부터 제주도 근무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는 그곳으로 돌아갈 거고, 어쩌면 나는 서울에서보다 더 자주 볼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21시 12분에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다음에 약속 다시 잡게 되면 얘기할게.' 8월에 함께 떠나는 친구에게 8캔의 맥주를 사갔다. 친구는 나를 위해 올해 첫 에어컨 시동을 했고, 우리는 그걸 다 마셨다. 그리고 좋았던, 속초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더이상 욕실 청소를 하지 않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행히 막차는 아니었다. 지하철 안에서 이승열의 '솔직히'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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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오후, 오키나와여행을가다 2016. 7. 10. 21:27
남쪽 카페에서 할 수 있는 일.물이 빠진 바다를 앞에 두고 물이 가득찬 바다를 상상하는 일.저 멀리 출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는 일.이국에서 또다른 이국의 음악을 듣는 일.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일.한 시간에 한대씩 있는 39번 버스를 놓치지 않는 일.물이 가득한 풍경의 엽서를 사는 일.정이현의 문장을 읽고 마음이 움직이는 일. 해가 질 무렵엔 느릿느릿 뒷산에 올랐다. 푸시 산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여행자들은 그곳을 그냥 산, 혹은 뒷산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등산화를 신거나 등산복 비슷한 것을 입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반바지에 바닥 얇은 샌들을 질질 끌고 올랐다. 산 정상에 도착한다고 뭐 특별한 것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소문대로 해 지는 풍경이 꽤 아름다웠지만 그렇다고 다시는 못 볼 아주 특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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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오전, 오키나와여행을가다 2016. 7. 7. 22:27
겨울, 술을 마시면서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따뜻한 남쪽으로 가고 싶다고, 올겨울은 마음도 몸도 유난히 춥다고.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 속에 두고 있던 '따뜻한 남쪽'은 달랐다. 나는 통영과 제주를 이야기했고 그녀는 홍콩과 인도네시아의 발리를 이야기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통영이든 제주든 홍콩이든 발리든 도착하는 대로 맥주를 마실 것이고 깊은 잠을 잘 것이었다. 그 다음날 그곳이 제주라면 모슬포에서 방어회를 먹고, 통영이라면 물메깃국을 먹는 상상도 했다. 가본 적 없는 홍콩과 발리에서의 여정은 상상하지 못했다. 다만 이곳에서 먹는 맥주보다는 더 맛있는 맥주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 박준, '우붓에서 우리는' 중에서 오키나와는 구름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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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오키나와여행을가다 2016. 7. 5. 16:38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일어나면 기억이 희미한 꿈 같았다. '아이슬란드.'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 진짜 집에서 멀리 떨어진듯한 아득함이 느껴진다. 하루종일 지지 않던 여름의 태양 그리고 절대 떠오르지 않던 겨울의 태양, 그 하늘에 슬그머니 뜬 희미한 달과 치맛자락처럼 펄럭거리는 오로라, 북극에서 낮게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그 바람을 묵묵히 맞으며 견디고 서 있는 양들, 구불구불 이어지는 작은 언덕들과 그 위로 양탄자처럼 깔려 있는 이끼, 눈 덮인 산과 거친 바다와 검은 모래사장,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천 개의 폭포와 호수, 아직도 끓어오르고 있는 땅, 어디론가 날아가는 기러기들, 서서히 녹아내린다는 빙하, 어디가 음절의 시작이고 끝인지 모르는 낯선 언어 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는 과묵하고 고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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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안녕, 권여선모퉁이다방 2016. 7. 4. 00:04
지난 수요일에는 궁금했던 서점에 갔다. 권여선 작가와의 만남에 참석하기 위해서. 나는 일찌감치 도착해 서점 구경을 했다. 소설만 파는 서점이었다. 좋아하는 책들이 그득했다. 이미 한 권 있지만, 권여선의 새 책을 한 권 더 샀다. 책을 한 권 사니, 생맥주 한 잔을 공짜로 줬다. 권여선 작가는 아주아주 말랐다. 깡말랐다, 는 표현이 맞아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뻤다. 그녀는 소설만 가득한 책장 앞에 앉아 고독과 결핍과, 끝내 명랑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 조금 메모를 해 놓은 종이가 어디 있었는데, 어디 갔지? 종이가 없으므로, 저 세 단어는 정확하지가 않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단어들이다. ㅠ) 그리고 자신의 고독과 결핍과 끝내 명랑함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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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일들모퉁이다방 2016. 7. 3. 11:30
6월에는 많이 걷기로 했다. 초여름은 좋아하는 계절. 좋아하는 것들은 죄다 짧다. 짧아서 아쉽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것. 6월에 내게 온 책들. 하루키 책을 사면 공짜로 주는 저 비매품 책이 참으로 괜찮았다. 오키나와 여행가서 가방에 넣고 다니며 읽었다. 얇아서 가볍고 좋았다. 김동영, 손보미, 오지은, 정이현의 에세이가 특히 좋았다. 정혜윤의 교토 이야기 중 "덕분에 즐거운 여행을 했어요. 혼자 왔으면 보지 못했을 것을 봤어요." 이 말은 마음에 계속 남았다. 누구에게든 이런 여행친구가 되고 싶다. 회사 근처, 좋아하는 식당 메뉴. 먹으면 건강한 느낌이 막 드는 비빔밥! 이런 초여름. 여름도 점점 좋아지고 있다. 세상에, 내가 여름이 좋다지다니. 그러니까, 사계절을 모두 좋아하고 있는 것. 합정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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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서재를쌓다 2016. 7. 2. 16:52
어제 시옷의 모임이 있었고, 이건 어제의 페이퍼. [7월에 만나는 6월의 시옷 -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빠져들려면 기슭을 떠나야 한다. 구명대 없이. 뭍에서 팔을 몇 번 젓는지 세지만 말고 말이다.” - p.13 우리는 함께 줌파 라히리의 이탈리아어 이야기를 읽었고, 이것은 나의 이야기입니다.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라면, 나는 일본어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처음은 오다기리 죠였습니다. 나는 그 시절, 일본의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드라마며 영화며. 이야기가 좋아 보다보니, 사람이 좋아졌고, 사는 모습도 좋아보였고, 특유의 억양들도 좋아져 혼자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저와 같은 사람들이 꽤 있어서 일본의 배우들이 내한을 해 무대 인사나 관객과의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