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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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경주여행을가다 2014. 11. 22. 15:26
8월, 늦여름. 혼자 경주에 다녀왔다. 여름에 외롭고 쓸쓸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다들 행복한데 나만 그렇지 않은 것 같은 느낌. 역시 나는 더운 날씨랑 안 맞나봐. 그래서 혼자 어디론가 가보자고 결심했고, 그렇다면 경주가 어떨까 생각했다. 경주라면 볼 거리가 많으니 혼자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첫날은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인터넷 검색을 하다 봐둔 인도 카레 집엘 갔다. 좌식 탁자에 앉아 카레와 맥주를 먹는데, 주인언니가 이런 저런 말을 걸어왔다. 그 중에 그런 얘기도 했을 거다. 이번 여름이 내겐 좀 외롭다는 말.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꽤 시간을 보냈는데, 주인언니가 부탁이 있다고 했다. 경주에 오래 머무른다고 하니 오늘 저녁시간에 조금만 자기를 도와달라고. 밥값도 안 받고, 맥주값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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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서재를쌓다 2014. 11. 22. 14:00
공판이 끝났다. 법원을 나와 호송차에 오르면서, 나는 아주 잠깐 여름 저녁의 냄새와 색깔을 알아차렸다. 내 움직이는 감옥의 어둠 속에서 나는 마치 피로의 밑바닥으로부터인 듯, 내가 사랑했던 도시의, 내가 행복을 느끼곤 했던 어떤 시간들의 모든 친숙한 소리들을 하나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이미 나른해진 공기 속에서 신문팔이들이 외치는 소리, 공원의 마지막 남은 새소리, 샌드위치 장수의 부르짖음, 도시 고지대의 커브길에 울려대는 전차의 비명 소리, 그리고 밤이 항구 위로 내려 앉기 직전에 울리는 하늘의 웅성거림. 이 모든 것들이 내가 감옥에 들어오기 전 너무나 잘 알던 것이었는데 이제 내게는 눈 먼 여행길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그랬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내가 만족하던 시간이었다. 그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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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서재를쌓다 2014. 11. 20. 23:14
내겐 파란색 책이 왔다. 우표가 그려진. 예약판매 중인 이 책을 주문해놓고 타이완에 다녀왔다. 주문할 때 보니, 돌아왔을 때 받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정말 돌아온 다음날 받았다. 나는 이 책을 15년 동안 얼굴을 보아온 친구에게도 선물하고, 2년 동안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 친구에게도 선물했다. 신기하게도 우리 셋에게 각각 다른 색의 책이 왔다. 말랑말랑한 산문집일 줄 알았는데, 왠걸 의외로 단단한 작법책이었다. 프루스트 책으로 1년 계획을 세우는 소설가, 자신을 미남 소설가라고 (미안합니다, 말도 안되는) 자뻑 농담을 건네는 소설가, 자신을 정승 스타일이라고 이야기하는 소설가, 출근길 아침 나로 하여금 'Creep'를 듣게 한 소설가(무척 좋았다), 옌벤에서 또 독일에서 오래 머물며 글을 쓰는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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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극장에가다 2014. 11. 17. 22:25
지난 금요일, 약간의 야근을 하고 퇴근을 했다. 집에 바로 들어가기 그래서 초겨울 바람을 느끼며 합정에서 상암까지 걸었다. 극장 시간표를 보니 맞는 시간이 였다. 그래서 를 봤다. 흠. 영화는 뻔했다. 예상했던 대로 전개됐다. 살짝 지루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중간중간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울었다. 토요일날, 를 봤다고 하니 누군가 어땠냐고 물었다. 별로없다고 말할 수 없더라. 사실 영화는 그렇게 좋진 않았는데, 그렇게 쉽게 말해버리면 안될 것 같애, 라고 답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염정아를 다시 보게 됐다. 나는 이제껏 염정아가 이런 배우인 줄 몰랐다. 정말 몰랐다. 그래서 염정아에게 조금 미안했다. 그녀를 몰라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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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도쿄 여행, 먹은 것들여행을가다 2014. 11. 12. 21:43
2014년 10월 4일에서 7일까지. 3박 4일동안 도쿄에서 먹은 것들. 4일내내 내 갤럭시 핸드폰은 비행기 모드였다. 도쿄에 하루 더 있는 Y언니랑 키치조지에서 헤어지고, 신주쿠에서 코인라커 찾느라 정신없이 헤매다가 겨우 넥스를 탔다. 올 때도 넥스를 타고 왔는데, 올 때랑 갈 때랑 같은 방향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올 때는 오전 풍경. 갈 때는 오후 풍경. 같은 풍경인데도 느낌이 달랐다.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하고 면세점에서 남은 돈으로 자그마한 핸드크림을 몽땅 샀다. 다음에 올 걸 생각해서 돈을 남기진 말자고 생각했다. 미련없이 돈을 탈탈 털었다. 그래도 약간의 동전이 남아 식당에 들어가 에비수 생맥주 작은 사이즈로 하나 시켰다. 식당의 창가 바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활주로를 마주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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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극장에가다 2014. 11. 11. 21:03
12년동안 찍은 영화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도 비포 시리즈 감독 영화라는 이야기를 듣고, 에단 호크도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를 봤다. 지지난주인가 지지지난주인가 주말에 엄마가 올라왔고, 엄마와 축제 마지막 일요일 억새밭을 걸었다. 엄마를 보내고 상암의 극장에 들어가 165분 동안 혼자 본 영화다. 보고 난 다음에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다 까먹어 버렸다. 이것만 기억에 남았다. 후반부의 한 장면이다. 꼬맹이었던 주인공은 어느새 장성했고, 대학에도 합격했다. 결혼에 세 번 실패한 엄마가 연 대학 입학 축하 파티에 두번째 결혼을 하고 또 다른 꼬맹이를 낳은 아빠도 참석한다. 파티가 끝난 뒤 아빠가 한 공연장으로 주인공을 데려간다. 거기에 아빠가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뒤 함께 살던 아저씨가 공연 준비 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