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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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뷰티극장에가다 2014. 6. 29. 12:19
사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저 영화가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단 한 편의 소설로 성공한 뒤, 다음 작품을 발표하지 못한 혹은 하지 않은 남자가 있다. 남자는 세 명의 여자를 만난다. 첫 번째 여자는 첫사랑. 두 번째 여자는 친구의 딸인 스트립 댄서. 세 번째 여자는 104살의 수녀. 첫 번째 여자. 첫사랑이 죽었다는 소식을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듣는다. 순간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는데, 그 주름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진짜 슬픔이었다. 두 번째 여자. 병을 치료하느라 번 돈을 다 썼던 스트립 댄서로 그보다 먼저 죽는다. 그녀는 아름다움을 알아 차릴 수 있는 여자였다. 세 번째 여자. 104살의 이가 다 빠진 수녀가 홍학떼가 남자 집의 테라스로 몰려들던 믿을 수 없이 신비로웠던 새벽에 그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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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모퉁이다방 2014. 6. 23. 22:34
지난 주, 다섯 끼 내내 같은 음식을 먹었다. 원래 오늘 휴가를 쓸 참이었다. 차장님이 괜찮다고 원래 쉴 거였으니 이어서 쉬라고 했다. 오늘은 광화문에 가 조조로 영화 를 봤다. 능의 둥근 선이 아름다워 다음에 경주에 내려가면 그 선만 낮이고 밤이고 보고 와도 좋을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비가 쏟아졌다. 어쩔까 하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점심을 해결했다. 버스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씨디 플레이어를 샀다. 집에 와 브로콜리 너마저 1집과 루시드 폴 5집을 연이어 들었다. 갑자기 생각나 900원을 결제하고 도 다시 봤다. 보는 동안 잠이 들었다. 해가 지기 전이었다. 깨니 해가 졌다. 다시 영화를 틀고 처음부터 다시 봤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우리는 이틀밤을 함께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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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서재를쌓다 2014. 6. 11. 22:12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133페이지. 책을 읽기 시작한 날, 퇴근을 하고 그대로 소리없이 집에 들어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와 가방을 놓고 옷을 갈아 입었다. 화장실 불을 켜고 수도꼭지를 틀어 비누거품을 내 발을 씻었다. 얼굴도 씻었다. 수건으로 닦고 화장실 불을 끄고 화장대 앞으로 가 스킨과 수분크림을 발랐다. 그리고 보조등을 켜고 그대로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때 이 페이지를 만났다. 133페이지. 저 문장들은 오른쪽 제일 아래줄에 있었다. 그 뒤의 문장을 읽으려면 한장을 넘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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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로부터 두번째 사랑티비를보다 2014. 6. 7. 23:25
나, 이 언니에게 완전히 반했다. 이름은 치아키. 나이는 46살. 독신이다. 직업은 드라마 프로듀서. 이야기는 치아키가 카마쿠라라는 도쿄 근교 도시의 오래된 주택을 구입해 살면서 시작된다. 이 언니는 이쁘고, 당당하고, 예의도 바르다. 할 말은 확실하게 하고, 남의 이야기도 잘 들어준다. 그래서 이 언니의 집에는 상담손님이 제 집인양 끊임없이 방문해서 며칠씩 자고 가기도 하고, 맥주를 그냥 막 꺼내 마시고, 주인없는 집에 먼저 와 기다리고 있기도 한다. 완벽해보이지만 이 언니에게도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그래서 더 인간적이다. 거의 먹여 살린 연하의 남자가 포스트잇으로 이별을 고하기도 했고, 카마쿠라에서 다 같이 살자는 술자리 친구들의 말을 믿고 바로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결국 치아키만 카마쿠라에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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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극장에가다 2014. 6. 7. 14:47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되는거야. - 1904년 1월, 카프카, 저자의 말, 변신 중에서 이 영화를 특별히 만든 건 리스본의 풍경과 제레미 아이언스의 연기 같다. 주인공 그레고리언스는 어느 날, 다리에서 자살을 하려는 빨간 코트의 여자를 구하고 그녀가 남기고 간 한 권의 책과 마주한다. 그 책 속에는 리스본행 야간열차 티켓이 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코트와 책과 티켓을 전해주기 위해 역으로 향한다. 간신히 열차 시간에 도착한 남자. 남자는 여자를 만나지 못하고, 얼떨결에 열차를 타게 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그리고 그 뒤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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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서재를쌓다 2014. 6. 5. 23:53
이 책에 대한 어떤 바램이 있어서 출간되었다는 걸 안 순간 깜짝 놀랐다. 이렇게 일찍 번역본을 읽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은행나무에 기자라 이즈미의 팬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은 그동안 봐 왔던 기자라 이즈미의 드라마와 비슷했다. 조금은 밋밋하고, 뭔가 여운이 돌고, 어느 순간 마음이 찡해지기도 하다가, 어느 정도의 행복감으로 충만해지는 것. 이 연작소설집에는 죽음이 늘 존재한다. 여자가 있다. 여자는 꽤 괜찮은 남자를 만난다. 남자에게는 은행나무가 있는 집이 있다. 여자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남자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여자는 죽는다. 남자와 남자아이는 은행나무가 있는 집에서 살아간다. 남자아이는 남자어른이 되고, 한 여자를 만난다. 둘은 결혼을 한다. 그러다 한 명의 남자아이도, 한 명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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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서재를쌓다 2014. 6. 4. 17:31
그렇게 해서 추풍령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추풍령을 넘어가면 거기서부터는 충청도가 시작되는데, 내 힘으로, 내 두 다리로 그렇게 먼 곳까지 갔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이었다. 나는 완전히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추풍령휴게소에서 우리는 김밥 같은 걸 사먹고,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다가 죽은 노동자들을 위해 세운 위령탑의 글귀를 읽고, 원숭이와 공작을 구경했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내려가는 길은 직지사 삼거리까지 페달을 한 번도 밟지 않아도 갈 수 있는 상쾌한 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게 되니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이제 가지 못할 곳이 없었다. 서쪽으로는 양천, 남쪽으로는 남면, 동쪽으로는 아천, 북쪽으로는 직지사까지 나는 신나게 쏘다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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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통 프로젝트모퉁이다방 2014. 6. 3. 22:33
오늘 트위터를 보다 '우체통 프로젝트'라는 트윗을 봤다. 사라져가는 빨간색 우체통을 살리기 위한 손글씨 우편 프로젝트. 내게 딱이다 싶었다. 모은 엽서도 많고, 우표도 조금씩 사들이고 있다. 전주에서도 우표를 사왔다. 휴가날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사는데, 엽서에 붙일 금액의 우표가 다 떨어졌다고 했다. 금액을 맞추려면 두어 세 개의 우표를 붙여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덕지덕지 여러 장 붙이면 더 멋스러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우체국 직원분이 그런 공간이 있을까요, 퉁명스럽게 말했다. 흠. 오래간만에 엽서를 쓰고 싶은데, 누구에게 써야할지 망설여지더라. 그러다 발견한 우체통 프로젝트. 나도 우체통 프로젝트에 나름 동참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주소를 모집합니다'. 책 읽다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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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일들모퉁이다방 2014. 6. 1. 16:13
이번에는 미루지 않고, 6월 새날에 맞춰 지난 5월의 일들. 6월 첫날부터 좋은 일이 있어 왠지 6월이 근사할 것 같은 느낌이다. :) 5월에 머리를 짧게 잘랐다. 역시 나는 긴 머리가 어울리지 않는다. 친구 기다리는 동안, 폴 바셋 아이스크림. 상하목장 유제품이 너무 맛있어 매일 배달해서 먹으려고 했는데 우리집은 배달지역이 아니란다. 친구랑 큰 맘 먹고 간 세븐스프링스. 뷔페는 매번 기대하고 가지만 생각보다 많이 못 먹는다. 조금 먹다보면 어느새 배가 차 있어 계산할 때 아쉬울 따름. 고향. 어느 밤 길을 걷다 발견했는데, 결국 가질 못했다. 늦은 봄, 전주. 전주에서 산 엽서를 길게 늘여뜨여 벽에 붙여 놓았다. 주인이 직접 여행 다니며 찍은 사진이란다. 5월의 그림자. 집에서 보았을 때는 검정색 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