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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 아닌 사랑과 자유서재를쌓다 2021. 11. 18. 16:48
예전에 어떤 마음으로 외국의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정기후원을 했었다. 후원을 하면 그 아이의 사진과 좋아하는 것 등이 적힌 간략한 프로필, 후원자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도착했는데 어느 날 후원하던 아이가 갑자기 바뀌었다. 단체에 이유를 물어보니 현지에서 연락이 끊긴 거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때 후원을 중단하고 싶었는데 어찌어찌 이어나갔다. 남편과 연애 중일 때 남편이 내가 하는 후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비슷한 성격의 다른 단체에서 후원받은 돈을 아이들을 위해 쓰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다른 형식의 후원을 알려주며 이건 사연을 보고 직접 후원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망설이다 정기후원을 중단했다. 그런데 소파에서 나란히 티비를 보다 남편이 갑자기 그러는 거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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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모퉁이다방 2021. 11. 11. 00:15
아침에 일어나 비몽사몽 수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창밖으로 무언가 보슬보슬 떨어지는 게 보였다. 눈이 오나봐. 기저귀를 갈고 있던 남편이 그럴리가, 하고 반신반의했다. 내가 서 있는 창 가까이 와서 보더니 어, 진짜네, 한다. 오늘 첫눈이 왔다. 군포에. 오다말다 오다말다 하더니 어느 순간 폴폴 쏟아지길래 남편이 지안이를 안고 창가에 섰다. 아니 내가 이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야겠다며 아이를 안고 창가에 서보라고 했다. 남편은 자세를 잡더니 지안이 등을 토닥거리며 말을 건넸다. 와, 눈이네 눈. 지안아, 눈이 오네. 첫눈이네. 첫누-운. 창가의 둘, 조금 떨어진 곳의 나. 그렇게 셋이 가만히 아침의 첫눈을 지켜봤다. 셋이 되어 보는 생애 첫 눈. 그리고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보일러를 켰다. 천천히 따듯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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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모퉁이다방 2021. 11. 8. 14:19
비가 오니 예전에 살던 동네 생각이 난다. 11층이었던 오피스텔 앞문으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넌다. 바로 펼쳐지는 불광천 길. 오른편에 천을 두고 왼편으로는 자전거 길을 두고 천천히 걷는다. 큰 나무들에 노란색, 빨간색 단풍잎들이 그득하다. 기지개도 펴보고 숨을 힘껏 들이마시면서 이어폰을 꺼내 걷는다. 첫 곡은 루시드폴의 '아직, 있다'가 좋겠다. 걷다보면 이름모를 제법 커다란 새가 물 아래로 부리를 들이미는 모습도 보이고 나뭇잎들이 가을바람에 일제히 사르르 움직이는 모습도 보인다. 그렇게 삼십분 넘게 걷다 월드컵경기장 쪽 계단을 올라 극장에 간다. 찜해뒀던 영화 시간표를 다시 확인하고 무인발권기에서 티켓을 끊는다. 저녁이면 맥주 한 잔을 했을테지만 오전시간이니 따뜻한 커피를 주문한다. 날씨가 쌀쌀하니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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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서재를쌓다 2021. 10. 26. 21:57
아이가 백일이 되기 전이었다. 몸과 마음이 한창 지쳐있던 때. 조금 외로웠던 밤이었는데 완전히 혼자 있고 싶어 반신욕을 했다. 그 즈음 매일 밤 반신욕이 간절했다. 최은영 작가의 은 봄이가 선정한 시옷의 책이었는데 출간되자마자 읽으려고 사두었었다. 책을 가지고 들어가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오래 있었다. 두번째 챕터 마지막 문장을 읽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증조모는 열일곱일 때 살기 위해 엄마를 버려야 했다. 병에 걸려 곧 죽을 것이 분명한 엄마를 자신이 살기 위해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간다고 하자 엄마는 말했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증조모의 딸, 그러니까 주인공의 할머니는 병에 걸린 자신의 엄마 증조모가 자신을 보며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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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모퉁이다방 2021. 10. 13. 12:13
어제는 아이가 계속 짜증을 부리며 울길래 산책을 나갔다. 하늘도 흐리고 바람도 쌀쌀해 산책은 생략하려고 했는데 부랴부랴 챙겨 나갔다. 긴팔 바디수트에 이번에 산 민트색 레깅스를 입혔다. 양말도 신기고 모자도 씌웠다. 혹시 유모차에서 울까봐 노란색 튤립 사운드북도 챙겼다. 튤립 사운드북이 여러 개 있는데 노란색 노래들이 경괘해서 그런지 유독 이 튤립을 좋아한다. 나가보니 맞은편 동네 구름이 심상치 않았다. 어둑어둑한 것이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았는데 우리 동네 구름은 많기는 하지만 색이 괜찮아서 근처만 조금만 걷다 오자며 나섰다. 그리고 근사한 구름을 만났다. 유모차를 멈추고 말했다. 지안아, 진-짜 예쁜 노을이다. 그치? 다행이다. 집에만 있었으면 저 예쁜 노을을 못 봤을텐데. 보고 있는건지 그냥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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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희망티비를보다 2021. 10. 8. 16:3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틀에 걸쳐 봤다. 아이와 단둘이 있을 때는 티비를 켜지 않는데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자고 있는 사이 틀었다가 깨어나도 끄질 못했다. (미안, 아가) 3살이 되어가는 딸이 있는 알렉스가 함께 사는 남자친구에게 학대를 당하고 그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라고 쓰고 사전에서 '고군분투'를 찾아봤다. 고군분투 : 적은 인원(人員)이나 약한 힘으로 남의 힘을 받지 아니하고, 힘에 벅찬 일을 극악스럽게 함. '극악스럽다'도 찾아봤다. 극악스럽다 : 더할 나위 없이 못되고 나쁜 구석이 있다. 극악스럽다는 표현을 제외하면 맞는 것 같다. 탈출은 단순히 도망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의 완벽한 독립이다. 알렉스는 한 번의 실수를 하지만 결국 해낸다. 그녀에게는 어릴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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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시간모퉁이다방 2021. 10. 5. 23:32
아이가 다시 세네 시간마다 깬다. 이건 신생아 즈음에나 있었던 일인데 (그래봤자 이제 겨우 사개월차) 아홉시나 열시 부근에 자니까 세네 시간마다 깨면 새벽에 두 번을 일어나야 한다는 소리다. 아이를 재우고 약간의 휴식을 취하다 천근만근 몸을 이끌고 자정이 되기 전에 침대에 눕는데 잠든지 한 시간도 안돼 아이가 울기 시작하는 거다. 나는 아침잠 없는 사람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했었다(과거형). SBS 아침뉴스 1부 시작할 즈음에 자동기상하는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3부 끝날 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다. 며칠 전 새벽에는 아이가 너무 심하게 울어 둘다 깨어있었다. 수유를 시작했고 남편은 이렇게는 안되겠다며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 끝에 찾은 것은 어떤 해결책이 아니라 4개월차 아이들의 원더윅스였다. 그 밤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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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주택에 진심입니다서재를쌓다 2021. 10. 3. 00:41
구도심 주택에 살아보니 집을 '산' 것은 동네를 '사는' 것이란 걸 깨닫는다. 집은 삶 그 자체이고 내 집이 위치한 동네는 브랜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관계망이다. 구도심 작은 동네의 좁은 관계망이 어떨 땐 불편하기도 하고 어떨 땐 즐겁기도 하다. 불행히도 아파트에 살 때 내게 이웃은 얼굴 없는 층간소음의 장본인일 뿐이었다. 혹여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어색하고 불편한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같은 공간을 사는 이웃이 되었다. 집 앞에 낙엽이 뒹굴면 낙엽을 쓸고 눈이 오면 눈을 같이 치워야 한다. 좋건 싫건 나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며, 우리 가족만 잘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자연스레 깨닫는다. - 10쪽 단독주택은 남편의 소망이 되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불만이 쇄도하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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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념일모퉁이다방 2021. 9. 28. 00:17
남편이 말했다. "우린 지금 살얼음판이야." 육아를 시작하고부터 우리에게 여러 인내의 순간들이 찾아왔다. 남편이 참는 경우, 내가 참는 경우, 둘다 어찌어찌 참고 넘어가는 경우, 둘다 정말 못참겠는 경우. 물론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로 인해 행복하고 충만한 순간이 더 많다. 어쩌다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는지 그 시작조차 생각나지 않는 살얼음판의 순간이 오면 정말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내가 이러려고, 로 시작하는 생각들. 남편도 그럴 것이다. 그 밤이 지나고 나면 (어떨 때는 밤이 지나기도 전에)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예민했었다 생각이 들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내가 세상에서 최고로 불행하고 힘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말 육아는 녹록치 않다. 마음과 몸이 동시에 지치니 평소 같으면 지나쳤을 말 한마디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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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모퉁이다방 2021. 9. 7. 01:17
계절에도 성격이 있을까. 계절 앞에 '초'라는 글자를 붙이면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그 중 제일은 초여름. '초'라는 글자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이런 뜻이다. 어떤 기간의 처음이나 초기. 그러니까 여름의 처음이나 초기를 생각하면 괜시리 가슴이 두근거린다. 포르투갈에 가기로 한 건 영화 때문이었다. 동생과 영화를 본 뒤 배경이 되는 곳을 찾아보니 포르투갈 리스본이었다. 여행 프로그램 리스본 편을 죄다 찾아봤다. 노란 전차가 좁은 골목길을 덜컹거리며 오르내리고 있었다. 근사했다. 오래되었고 낭만적이었다. 그 다음해, 휴가날짜를 결정해야 할 시기에 동생이 말했다. 언니, 우리 포르투갈에 가자. 우리는 초여름에 출발하는 일정으로 예산을 무리해 준비를 했고 어이없게도 동생이 출발 일주일을 앞두고 우연한 사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