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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움에 병든 자
    서재를쌓다 2015. 3. 16. 07:21

     

     

       시인은 인도에 갔다. 시인의 꿈이었다. 인도에 가는 일이. 시인은 인도에 가서 보고, 생각하고, 보고, 생각했다. 지난 일들에 대해 생각했고, 지금의 일들도 생각했고, 때로는 앞으로의 일들도 생각했다. 시인은 돌아왔고, 얼마 뒤 다시 인도에 왔다. 시인은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한 해 만에 다시 인도에 왔다." 김연수의 추천글을 읽고, 출간되었을 때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책인데, 어느 날 다른 책들과 함께 주문해 놓고는 가만히 책장에 꽂아두었었다. 2015년 겨울 어느 날, 가만히 꽂혀 있는 하얀 책등을 보게 됐고, 읽을 때라고 생각했다. 기승전결의 여행기를 계속 읽다가, 기승전결이 없는 시인의 여행기를 읽고 있으니 처음에는 어지러웠다. 무슨 풍경인지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러다 삼분의 일 즈 지나서야 풍경들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인이 두 해에 걸쳐 여행한 인도. 시인의 꿈이었던 인도. 시인의 눈으로 인도를 들여다봤지만 사실 어떤 나라인지 모르겠다. 대학교 때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한달 정도의 경비가 100만원 미만으로 광고된 포스터를 가만히 들여다봤던 기억이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실제로 한 달동안 인도를 다녀왔는데, 심하게 배앓이를 했지만 그곳에서 행복했다고 했다. 내가 아는 또 다른 어떤 이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어 왔다. 나는 인도에서 출발한 엽서 두 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이상한 냄새는 아니었다. 낯설지도 않았다. 오래되어 더는 느끼지 못하던 바로 그 냄새였을 뿐이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누런 광채를 띤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오직 나만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는 이내 주 경계선을 넘어 밤길을 달려갔다. 나도 어떤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 p.86-87

     

       짜이를 주문했다. 고도가 높은 곳이라 더위는 사라지고 없었다. 왠지 뜨거운 것을 마시고 싶었다. 낯선 이국에서 적응하려면 그곳의 차를 자주 마셔야 한다고 어디선가 들은 듯했다. 딱히 선택할 만한 것도 없었다. 사내가 손잡이 달린 컵으로 몇 번 우유를 떠 넣고 두 손으로 뭔가를 으깨어 넣는 동안 부글부글 냄비가 끓어올랐다. 그는 유리잔 가득 짜이를 따라주었다. 너무 뜨거워서 손으로 잡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손바닥과 손끝으로 겨우 짜이를 받아들고 앉았다. 그 뜨거운 것을 입술 끝으로 조금 받아 넘기자 혼몽인 듯 덜 깬 잠이 물러가는 듯했다. 내 입에서 강물 냄새가 났다. 마치 멀고 먼 고요한 강가에 앉아 있는 듯 했다. 강물에 흰 발목이 잠긴 물풀 냄새가 났다. 두 시간만 더 가면 도착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 p.93-94

     

       혼자서 하는 말이라면 이미 말이 되기 전에 자기 안에 고여 있으면 된다. 그러나 말이 되어 나온 혼잣말은 어디에도 고이지 않는다. 흘러가버린다. 밤바람에 스며들 뿐이다. - p.116

     

       아무리 더 좋은 것을 구할 수 있어도 그것은 인도에서 산 것은 아니다. 그 생각을 미처 못했다. 어떤 물건은 기억과 함께 존재한다. 그 물건에는 그때의 시간과 그곳의 공간이 존재한다. - p.158

     

      이상하게도 모두가 어딘가로 떠나지만 모두가 이곳에 있었다. 한 발짝 떨어져 어깨를 스쳐 가지 않아도 좁은 골목을 지나칠 때면 그들이 어느 먼 곳을 거쳐 왔는지 꿈꾸게 된다. 한줌의 바람이 젖은 먼지로 바짓단에 묻어 있어도 그 오랜 것들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냄새가 없었다. 묵은내마저 다 사라지고 없는 골목에서 이름도 모르는 당신을 생각했다. 길을 등지고 들어선 식당 앞에 앉아서 양귀비 같은 까만 씨앗을 넣고 담배를 마는 사내에게서 낯선 기억들이 떠올랐다. - p. 168-169

     

      짜이를 한 잔 마시자 세상의 온갖 것들이 다 내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카다멈과 정향과 생강과 어떤 알 수 없는 마살라 향이 나를 오래된 골목 안쪽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오래 끓고 남은 홍차 찌꺼기처럼 짙은 그늘 속으로 작고 고요한 문이 가득한 길이었다. 냄비에다 두 손으로 생강을 짓이겨 넣던 사내가 그걸 눈치챘는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p.210-211

     

        이 세계는 신이 꾸는 꿈이다. 그리고 인간도 신을 꿈꾸며 이 세계를 유지한다. 혹시 인간이 꿈을 꾸는 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실패한 결과가 아닐까. 신조차도 이제는 이 세계를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 세계를 허구로 만드는 데 재능을 탕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내 꿈이 그러한 자멸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 p.222-223

     

       시를 외울 필요가 없다고 하니, 다들 얼굴이 환해졌다. 뭔가 불편한 숙제 하나를 해결한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렇게 서로 말문이 조금씩 열렸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쓴 시를 하나하나 읽었다. 별을 소재로 한 시였다. "젠장! 또 달고야 말았다, 별" 이런 시구가 나올 때는 다들 활짝 울었다. 자신의 삶을 시로 쓰고 함께 읽으면서 그제야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다 소용없는 것이리라. 자기의 가슴을 치고 가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니 자기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이야기를 서로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 p.256

     

       사랑할 때 가장 먼저 태어나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이다. 나는 홀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아직도 나는 나를 기다렸을 것이다. 다 지워버리고 남은 나를.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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