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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속해보겠습니다
    서재를쌓다 2014. 12. 10. 00:09

     

        

        요즘 월요일마다 치과에 다닌다. 치과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칼퇴를 해야 하므로 안 그래도 일이 많은 월요일을 정신없이 보내고, 치과에 도착해서 대기실이며 진료실에 앉아 있으면 기분이 가라앉는다. 친절한 치과지만 어디가 안 좋고, 또 어디가 안 좋고, 그러므로 많은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반복해서 알려주면 기분이 처진다. 그렇게 짧은 진료를 마시고 치과를 나오면 숙제를 끝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겨울바람이 상쾌해진다. 비록 한 주 뒤에 이 과정이 다시 반복되지만. 이번주 월요일, 마취가 풀리지 않은 채 집에 도착해 씻고 소파에 앉아 책을 끝까지 읽었다. 그래, <계속해보겠습니다>. 마취가 풀리고 왼쪽 이가 아프면 신경치료를 해야한다. 아프지 않으면 신경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마취가 풀리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면 조금 두근두근해진다. 아프지 말아야 하는데. 아프지 말아야 하는데.

     

        12월의 출근길 아침,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몇 장 읽지 않았지만 알았다. 이 책이 내게 <백의 그림자>와 같은 따뜻함을 줄 거란 걸. 그 느낌은 맞았고. 220쪽. "매년 혼란스러웠지. 상이 두개라서. 올해는 어디를 먼저 가야 하나 하고. 올해부터는 여기로 오면 돼. 나나가 말했다. 곧장 와도 돼. 소라가 말했다." 이 부분을 읽는데, 눈물이 막 났다.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마취가 풀려가는 중이었지만, 아프진 않았다. 그러므로 이가 아파서 운 게 아니고, 이 소설 때문에. 소설은 여름과 가을 사이의 일이다. 그 계절 속에 소라와 나나와 나기가 있다. 세 사람은 아주 많은 계절을 함께 보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 그리고 또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소라는 나나의 태몽을 꾸었고, 나나는 강해보이지만 약한 아이다. 하지만 나나에게는 언니가 있지. 나기는, 나기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 오랫동안 한 사람을.

     

        나기는 '삯'이라는 조그만 맥줏집을 하는데, 삯에서는 신선한 재료만을 쓴다. 그 날의 재료는 그 날 모두 요리한다. 오늘 출근을 하면서 생각했다. 삯에 가서 애피타이저로 폭신폭신한 계란말이를 시켜 먹었음 좋겠다. 물론 시원한 맥주와 함께. 그 사이에 바삭하게 구운 생선구이도 주문하고. 누군가 삯에 들어오면, 아마도 그 아이일 거다. 소라. 미나리 '라'자를 쓰는 소라. 소라는 나기에게 따뜻한 국물을 달라고 할 거고, 나기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냄비를 불에 올리고 데울 거다. 소라는 맥주도 한 잔 달라고 할 거고, 그걸 마시며 나나 이야길 할 거다. 앞으로 부르나 뒤로 부르나 똑같은 나나. 나나는 그 시간, 뜨끈뜨끈한 방에 누워 있을 거고, 그 옆에는 몇 달을 배에 품었던 '쐐쐐'가 있을 거다. '쐐쐐'의 이름은 뭐가 되었을까. 맥주 두 병을 다 마시면 용기내서 '쐐쐐'의 이름을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삯'. 

     

        책을 읽으면서 나도, 소라와 나나가 있었던 한 여름의 목욕탕 속에 있고 싶었다. 그 길을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 둘 사이에 끼여 잠들고 싶었다. 거실에서 커다란 달을 올려다 보고 싶었다. 황정은은 사진마다 그렇게 퉁명스럽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왜 이렇게 따뜻할까. 참 고맙다.

      

     

    여름 달 아래를 걸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하루만 두번째 귀가이고 이미 자정입니다. 노곤하지만 쉽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소라에게 서운하지만 먼거 가버리지 않아서, 고맙다고 여기는 마음도 있습니다. 간단하지 않네 사람의 마음은, 하고 생각하며 소라의 곁에서 잠자코 걸어갑니다.

    목욕용품 중에서 젖은 것을 베란다에 펼쳐두고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탁자에 소라의 앨범이 펼쳐져 있고 종이로 만든 조그만 꽃송이가 열개도 넘게 흩어져 있습니다. 잎이나 꽃자루도 없이 오로지 꽃송이뿐, 패랭이나 코스모스처럼 보입니다. 애자가 만들었다고 소라가 말합니다. 보고 왔느냐고 묻자 그렇다,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떄수건으로 닦아 반들반들해진 뺨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엔 종이로 꽃을 만든대. 이런 것을 잔뜩 만들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밀어주는 패랭이꽃을 받아 탁자 위에서 이리저리 돌려봅니다. 뭔가 만든다니 좋네. 애자가 뭔가를 만들고 있다니 그건 좋네. 모처럼 불어온 바람에 창가에 걸린 풍령이 흔들립니다. 소라가 달아 두었는지 풍령의 추에도 애자의 꽃이 한송이 달렸습니다. 저렇게 달아두면 꽃의 무게로 덜 흔들리게 되는데,라고 생각하며 바라봅니다.

    -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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