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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쿄 일상산책, 가구라자카
    여행을가다 2014. 10. 21. 22:23

     

     

       이다바시 역과 가구라자카 역 사이 언덕에 있는 가구라자카는 옛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면서 공존하는 느낌을 준다. 그 옛날 기모노를 차려입은 게이샤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뿌렸을 이곳은 조용히 마음을 비우고 걷기에 좋다.

       수많은 인연이 밟고 지나다녔을 돌길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아득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죽이고 귀 기울이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 바람의 이야기에 매료된 사람들은 이곳에 둥지를 틀기도 한다.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알려졌으며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쓴 나츠메 소세키도 이곳에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p. 26 <도쿄 일상산책>

     

     

     

       

     

     

     

     

        

        이 책이 이번 여행에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덕분에 길을 많이 헤매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해야겠다. 헤맨 건 가구라자카에서. 메인 가이드북이라기 보다는 서브 가이드북이라 지도가 정확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대략의 아기자기한 그림지도인데, 혼자 다닌 둘째날 이다바시 역에서 몇번 출구로 나가야 하느냐부터 나의 문제는 시작되었다. 정확한 출구번호가 없어서 헤매다 나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정확한 출구였다. 하지만 ㅠ) 나가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책의 설명에 따르면 오른쪽 같기도 하고, 왼쪽 같기도 했다. 캐널 카페는 분명 저걸 말하는 것 같은데. 일본인 젊은 남녀가 내가 나온 출구 부근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와세다 도리 뭐라뭐라고 했다. 앗! 내가 찾는 길인데! 그들을 따라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초행길 티를 너무 많이 냈다. 내게는 책이 있었고, 그들에겐 핸드폰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따라갔어야지. 그런데 왼쪽에 와세다 도리라는 팻말이 있어 길을 헤맬 그들을 비웃으며 왼쪽으로 걸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오른쪽으로 갔다. 흠. 한 30분 넘게 아주아주 한적한 길을 비를 헤쳐가며 걸었다. 너무 한적한데 생각이 들 무렵, 길을 잘못 찾아왔다는 느낌이 들었고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으이구. 혹시나 싶어 다시 길을 돌아가 젊은이들이 간 오른쪽으로 길을 건너 가보니 거기가 바로 내가 찾던 가구라자카 길이었다. 으이구. 바보 멍충이.

     

     

     

     

     

     

     

     

       가구라자카에 온 건 <친애하는 아버님께> 배경지이기도 했지만 (사실 드라마는 2회까지밖에 못 봤다;;) 존 레논의 단골 장어집이었던 타츠미야에서 장어덮밥을 먹기 위해서. 이다바시 역에서 길을 헤맬 때 초조했던 건 길을 잃어서이기도 했지만 런치 타임 시간에 늦을까봐. 이 시간에 가지 못하면 장어덮밥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가구라자카 길을 찾았을 때의 안도감이란. 타츠미야는 헤매지 않고 금방 찾았다. 그 앞에 절이 있다고 해서 절 부근에서 골목길을 유심히 보며 걸으니 간판이 보였다.

       

        줄을 서야 할 줄 알았는데, 가게 안은 한적했다. 손님은 나 뿐이었다. 나중에 단골 할아버지인 듯한 분이 들어왔고. 연습한대로 장어덮밥 중자와 맥주를 시켰다. 빙비루밖에 없다고 해서 다이죠부라고 말했다. 빅 오어 스몰이라고 물으시기에 (당연히) 빅이라고 말했다. 티비가 켜져 있었는데, <전국노래자랑>같은 티비 프로가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일요일 점심 때다. 뭔가 우리랑 다르지 않구나 생각했다. <전국노래자랑>이 끝나자 날씨 뉴스가 나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태풍이 굉장한 것 같았다. 다이소 우비가 튼튼하다고 해서 사왔는데, 영 부실했다. 벌써 어깨죽지가 조금 찢어졌다. 사실 아침을 먹고 얼마되지 않아서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았는데, 아주아주 비싼 장어덮밥이기 때문에 밥 한톨, 맥주 한 모금 남기지 않고 깨끗히 먹었다. 밥도 먹고 맥주도 마시니 다시 걸을 기운이 났다. 운동화는 완전 젖어 버렸지만, 청바지는 이미 흠뻑 젖었지만. 아자! 아리가또 고자이마시따. Y언니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고 기억해뒀다. 장어집을 나서며 인사를 건넸다. 조용하고 친절한 곳이었다.

     

     

     

     

     

     

     

     

       그리고 걸었다. 소매가 스칠 정도로 골목이 좁다고 해서 '소데스리자카'라는 수식어가 붙은 효고요코초. 산책 책에서는 이 곳을 가구라자카의 숨겨진 보물같은 곳이라고 표현했다. 좁은 골목길만 찾아서 걸었다. 걷다보니 길이 막히기도 했고, 누군가 집에서 나와 길을 비켜주어야 했다. 비가 오는데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산책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같은 관광객도 보였다. <친애하는 아버님께>는 조금밖에 보지 않아서 그 배경 골목길이 어딘지 정확하게 몰랐는데, 어떤 집 앞에서 커다란 대포 카메라를 들고 웃고 있는 두 명의 사내아이를 보고 저기구나 알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맞더라. 산책 책에 소개된 화장품가게에 가서 더듬거리며 책에서 추천해준 상품을 말했더니 친절하게 한국어 팜플렛을 줬다. 추천 상품은 곤약 스펀지였는데, 친절한 언니가 내 손에 직접 시연을 해 줬다. 포장해달라고 하고 다른 추천 상품은 없나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어떻게 알고 여기를 왔냐고 물어본다. 그래서 책에 나와있어서 왔다고 하면서 책을 보여주니 스고이, 하면서 일본 언니들 특유의 감탄사를 내지르며 좋아했다. 친애하는 아버님께 골목길에서는 한 일본 아주머니가 내게 길을 물어봤다. 물론 일본어로;

     

     

     

     

     

       걷다 보니 몸이 으슬으슬해져 커피도 한 잔 마셨고, 숙소에서 언니랑 먹으려고 페코짱 붕어빵도 샀다. 팥 하나랑 치즈크림 하나랑. 붕어빵 페코짱에 눈알이 없어 어째 좀 무서웠다.

     

     

     

     

     

     

     

     

     

       그리고 이 길을 걸었다. 나는 이 길이 산책 책에 소개된 그린로드인 줄 알았다. 방금 전까지. 정말 그런 줄만 알았는데. 아마도 더 내려갔어야 했나 보다. 책을 보니 느낌이 좀 다르네, 비가 와서 그런가 싶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니 아랫길 같다. 그런데 이 길이 참 좋았다. 이어폰을 끼고 걷는데, 사람도 없었고, 옆으로는 전철이 지나가고, 녹차빛 강물이 흐르고, 비 때문에 조금 쓸쓸한 기분까지 드는 것이. 하지만 그래, 비가 오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 하루종일 비를 맞고 다니니 추웠다. 운동화는 흠뻑 젖어 질퍽거렸지만, 걸으면서도 생각했다. 고생한 여행이 나중에 더 기억에 남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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