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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쿄 일상산책, 시로가네
    여행을가다 2014. 10. 20. 22:12

     

     

     

     

     

     

     

       고급스러움이 피부로 느껴지는 시로가네라는 명칭은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다. 1947년 구가 통합되면서 시바구가 미나토구로 변경됐지만, 도쿄로 유학한 그가 머물던 사회교육가 선생의 집이자 어리고 귀여운 꽃 아사코가 살던 지역이 '시바구 시로가네'다. 창문과 지붕이 뽀족한 집에서 함께 살자고 속삭였던 소녀 아사코와 피천득의 인연이 짧고도 길게 얽힌 동네가 바로 이곳이다.

    - p. 392 <도쿄일상산책>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이 책이 출간됐다. 제목도 컨셉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도쿄는 서울과 많이 비슷하다는데, 그 중에서도 일본스러움이 느껴지는 곳에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화려하지 않고 소소한 구경거리가 있는 곳. 서울로 따지면 서촌이나 북촌, 광화문 같은 곳. 산책하기 좋은 길을 천천히 걷고 싶었다. 그렇지만 비가 왔다. 그냥 비가 아니라 태.풍.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손님이었다. 반갑지 않지만 꼭 올 손님. 둘째날은 언니와 나랑 각자 가고 싶은 곳에서 온전히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만나기로 한 날. 일어나 커튼을 열어보니 어김없이 오셨다. 비님이. 우선 씻기로 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언니가 가져온 유산균과 아사히베리를 챙겨 먹고, 숙소를 나섰다. 아침은 메구로역 근처의 저렴한 규동집에서 규동세트. <사랑이하고싶어사랑이하고싶어사랑이하고싶어>를 보고 규동 체인점에서 꼭 한번 규동을 먹고 싶었는데 소원 풀었다. 심야식당 보면서 늘 먹고 싶었던 돈지루도 시켜 같이 먹었다. 그것도 소원 풀었다. (밤에 인터넷 검색을 하던 언니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지만. ㅠ)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원래의 계획에서 약간 수정됐다. 산책 책에서 봤던 피천득의 그곳, 시로가네까지 걸어갈 수 있으니 그리로 가보기로 했다. 책에 소개된 이 길에는 자연교육원이 있고, 프라치나 가로수길이 있고, 하포엔이 있다. 우리는 자연교육원 담장 길을 걸어서 (공사 중이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무척 좋아보였음.), 프라치나 가로수길로 가게 되었는데, 그 중간에 있던 길이 좋았다. 커다란 나무들이 있었고, 집들이 있었다. 중간에 조그만 사원도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그 길의 느낌이 참 좋았는데, 역시나 아쉬웠다. 지금도 좋지만, 비가 오지 않았으면 정말 정말 좋은 길이었을텐데. 걷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운동화와 양말은 흠뻑 젖었고, 입은 우비도 썩 편하지가 않았다. 사진을 찍고 싶은데, 우산을 써야 하니 쉽게 꺼낼 수가 없고, 비가 오지 않았으면 볼 수 있었을 선명한 그곳의 색들을 볼 수 없었다. 대신 따뜻했다. 몸은 비에 젖어 점점 차가워지는데, 오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비가 와서 상점들이 대부분 전등을 켜놓았다. 그 주황색 빛 때문에 저녁길을 걷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나라에 온 거 같지 않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하포엔은 사실 기대가 없었다. 도심 속 정원이라길래 얼마나 좋을까 했다. 그런데 산책 책에 나온 것처럼 들어가자마자 배꼽인사를 하는 관리인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곳이구나 싶었다. 아주 잘 꾸며진, 넓은 일본식 정원이었다. 책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곳은 에도시대 초기 오쿠보 히코자에몬이 여생을 보낸 곳. 도쿄에서 아름다운 정원 중 하나로 꼽혀 결혼 예식이나 행사 장소로 인기를 끈다고 한다. 우리가 간 날이 일요일이었고, 그날도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지나가는 신랑과 신부도 봤고,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신부와 신랑도 봤다. 반듯하고 정갈하게 잘 가꾸어진 정원을 비를 맞으며 걸었다. 조금 있으면 물들 단풍나무들이 있었고, 팔뚝만한 잉어들이 있었다. 하포엔은 무료 개방이라 우리처럼 결혼식이나 행사 참석이 아니라 관광하러 온 외국인들도 많았다. 모두들 팔뚝만한 잉어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시로가네 길을 걸으면서는 그렇게까지 느껴지진 않았는데, 하포엔에 들어오니 여기가 얼마나 부자 동네인지 알겠더라. 하포엔에서도 생각했다. 흑. 좋은데, 비만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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