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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년이 온다
    서재를쌓다 2014. 6. 11. 22:12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133페이지. 책을 읽기 시작한 날, 퇴근을 하고 그대로 소리없이 집에 들어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와 가방을 놓고 옷을 갈아 입었다. 화장실 불을 켜고 수도꼭지를 틀어 비누거품을 내 발을 씻었다. 얼굴도 씻었다. 수건으로 닦고 화장실 불을 끄고 화장대 앞으로 가 스킨과 수분크림을 발랐다. 그리고 보조등을 켜고 그대로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때 이 페이지를 만났다. 133페이지. 저 문장들은 오른쪽 제일 아래줄에 있었다. 그 뒤의 문장을 읽으려면 한장을 넘겨야 했다. 그런데 넘길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었는데, 마음이 아파 넘길 수가 없었다. 이 페이지를 넘기면 이 가엾은 소년들의 가혹했던 최후를 정면으로 마주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냥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133페이지와 함께 했다. 고요했다. 티비도 틀지 않고, 음악도 틀지 않았다. 이제 내가 133페이지에서 134페이지로 넘어가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정말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처음엔 소년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제목이 그랬으니까. 그런데 소년의 이야기가 끝나니 다른 한 소년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소년은 광주에서 죽었다. 다른 한 소년의 이야기가 끝나니 출판사에 다니는 여자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다른 한 소년은 광주에서 죽었다. 출판사에 다니는 여자 이야기가 끝나니 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남자는 모나미 검정 볼펜을 볼 때마다 숨을 죽인다고 했다. 남자는 광주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그 밤 총을 가졌지만 총을 쏘지 못했다. 한 남자의 이야기가 끝나니 또 다른 한 여자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녀는 옥상에서 복숭아를 나눠먹던 봄밤을 그리워 했다. 여자는 광주에서 살아남았다. 여자는 그 후 자궁이 망가져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 봄밤을 그리워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끝나니 어머니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소년의 어머니다. 소년의 어머니다. 이어지는 또하나의 이야기. 그리고 소설은 끝난다. 모두 광주의 이야기다.

     

        절대 아침에 읽으면 안 된다. 화장을 곱게 한 아침에 더더욱. 아침에 읽다 결국 책을 덮었다. 계속 눈물이 나서. 내게 창비 홈페이지 공지글에 올라온 2014년 6월 2일에 발행된 초판 3쇄본이 배송되었다. 6월 2일 3쇄본이 무엇인고 하니, 1쇄본과 2쇄본, 그리고 다른 날 발행된 3쇄본은 모두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비가 올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배송받은 3쇄본은 이렇게 시작한다. "전등을 타고 자꾸 안경이 흘러내린다고, 겨울엔 실내에 들어갈 때마다 안경알에 김이 서려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작은 형이 그랬는데, 더이상 눈이 안 나빠져서 안경을 안 쓸 순 없을까." 첫 페이지와 두번째 페이지가 뒤바뀌어서 제본되었다. 처음엔 이상한 소설이다. 이렇게 다짜고짜 시작하다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장을 넘기니 거기에 진짜 첫 문장이 있었다. 읽기 시작할 때는 교환을 받아야지,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니 이것 나름의 의미 있는 책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바꾸지 않아도 좋겠다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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