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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내의 자격
    티비를보다 2014. 4. 12. 17:15

     

     

     

       이십 대에 꿈꾼 사랑이 있었다. 또렷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래서 내 생활이 망가지는 것도 개념치 않는 그런 사랑이었을 거다. 삼십 대에 꿈꾸는 사랑도 있다. 이십대의 사랑과는 조금 다르다. 그렇게 무모하게 아프고 싶지는 않다. <아내의 자격>을 보고 사십 대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십 대 때는 어리석게도 삼십 대의 사랑은 없을 것만 같았다. 삼십 대가 되니 사십 대의 사랑 같은 건 없을 것만 같았는데, 이 드라마를 보고 사십 대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사십 대에도, 오십 대에도, 육십 대에도 사랑은 계속될 거라는 사실. 그게 곁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새롭게 만나게 될 사람일 수도 있고, 짝사랑일 수도 있고.

     

       김희애가 이성재와 동거를 시작하게 됐을 때, 함께 살면서 지켜야 할 규칙에 대해 말한다. 조곤조곤 따박따박, 극 중 김희애의 성격대로 그렇게 말한다. 각자 방을 하나씩 두고 생활하는 거예요. 일주일에 한 날을 정해 그 날만 합방해요. 그게 말이 되냐는 이성재의 말에 김희애가 그런다. 솔직히 매일매일 한 방에서 부인이랑 자는 거 좋았어요? 나는 아니었어요. 책 읽다, 하고 싶은 것 하다 그렇게 각자 자고, 일주일에 한번씩 한 방에서 자요. 김희애의 그 대사에서 사십대의 사랑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 사랑은 계속되겠지.

     

       <밀회>를 봤다. 꽤 괜찮았다. 그러다 김희애의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아내의 자격>에서 감독과 작가와의 만남이 참 좋아서 이번에 제의가 왔을 때 무조건 오케이를 했단다. 그래서 다시 찾아봤다. 예전에 이 드라마의 캠핑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김희애의 캐릭터가 너무 답답해보여 더 보질 않았었다. 다시 보니 그 캠핑 장면이 이 드라마의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보니 김희애의 그 답답했던 행동들이 이해가 됐다. 주말에 보기 시작했는데 1회부터 시작해서 연속으로 쭉 봤다. 평일에는 퇴근하고 한 회씩 아껴 봤다. 순식간에 16부작을 모두 다 봐버렸다.

     

        마음에 많이 남았던 장면들은 책이었다. <밀회>에서도 유아인에게 김희애가 책을 보낸다. 하고 싶은 메세지와 닮은 문장에 밑줄을 그어서. 그게 참 좋았다. <아내의 자격>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등장한다. 하나는 이혼을 결심한 김희애가 잠자리에 든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 나지막하게 책을 읽던 김희애가 갑자기 흐느낀다. 그리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아들에게 말한다. 슬픈 장면이잖어. 그 문장은 김희애가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대변하는 문장들이었다. 나중에 아들은 그 문장을 혼자 읽는다. 그리고 그때의 엄마의 흐느낌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이 더 굳건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보였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의 문장이었다. "너는 겁쟁이가 아니다. 어머니는 한참동안 조용히 걷기만 하다가 말씀하셨다. 종종 낙심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네 일에 충실했지. 나는 너를 깊이 믿는다. 그러니 용기를 내렴. 너라면 국경을 너끈히 넘고 결국엔 저 넓은 세상에 닿을 수 있을거야."

     

       또 하나는 이성재가 전 부인 이태란에게 보여준 밑줄이다. 둘은 함께 학생운동을 열심히 한 CC. 세상은 변했고, 여자도 변했다. 이태란은 대치동에서 잘나가는 학원 원장이다. 이성재는 너무 속도를 내는 이태란을 항상 염려했었다. 이태란은 부를 얻었고, 더 큰 부를 쫓았다. 이성재는 그게 불만이었다. 이성재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희애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을 때, 그러다 자신과 비슷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더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랑은 예전에 끝났다고 생각했다. 학원 비리로 감옥에 수감하게 된 이태란을 찾아가 어떤 문장을 보여준다. 그건 두 사람이 학생운동을 할 때 열심히 읽고 밑줄을 그었던 문장이다. "속도가 한계를 넘어서면 누군가가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의 시간 손실을 강요하게 된다." 이반 일리히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의 문장이다. 이태란은 이제 자신에게 필요없는 문장이라고 한다. 자신은 이미 속도의 쾌감을 맛 보아서 멈출 수가 없다고.

     

       좋은 장면들이 많았다. 위로가 필요한 김희애가 이성재에게 전화를 해 휘파람을 불어달라고 한 장면, 김희애가 자신의 새로운 사랑을 아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하는 장면, 자신 때문에 어른스러워버린 아들이 미안하고 안타까워 꼭 안아주는 장면 등등.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 김희애는 너무 예쁘고, 이성재처럼 너무 멋지다. 김희애의 시댁은 왜 결혼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저질이고, 두집 살림을 하는 남자는 참으로 당당하다. (사실 얄밉지만, 몰락하는 모든 사람은 불쌍하다. 그렇게 저질이었던 시댁도 몰락해 엉엉 우는 장면을 보니 좀 측은하더라.)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이 드라마에 딱 들어맞는다. 모든게 너무 드라마적이지만 그래도 사십대의 사랑이 있다는 걸 믿고 싶게 만드는 드라마였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는 걸.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는 걸 상기시켜주는 드라마였다. 간만에 한국드라마로 행복했다. 이성재가 이태란에게 보여줬던 그 문장의 책 제목으로 이 드라마를 요약할 수 있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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