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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10 - 라소리가 나는 여자아이를 만났다
    티비를보다 2010. 12. 28. 23:38

    (이 글, 스포일러 덩어리예요.)





        2010년 겨울, 이 드라마가 내게 와 주었다. 키자라 이즈미의 드라마는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내게 와 주었다고. 마지막 회를 보고, 퇴근길의 지하철에서 매번 생각했다. 오늘 밤, 큐토에 관한 글을 쓰자.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어떤 장면들은 못 견디게 그리워 다시 들여다 보기도 했다. 헤이타가 큐토의 어금니를 누르고, '라 소리가 나는 여자아이를 만났다'고 나레이션 하는 장면. 큐토의 충전 모습을 한 쿠리코 선생님이 '충전하러 왔어요' 라고 축 늘어져 이야기하는 장면. 큐토가 '내일 보자'고 같은 반 아이들에게 인사하는 장면. 담백하게 이별하는 큐토와 헤이타.

        그 중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바로 이 장면. 복도를 지나며 헤이타가 후지노에게 말한다. 큐토를 리셋하겠다고. 후지노가 말한다. 1년이 지나면 너의 머릿 속에 큐토의 기억은 사라질 거라고. 자신의 기억도. 우리는 그런 물질을 바르고 있다고. 헤이타가 말한다. 그럴 리가 없잖아. 큐토를 내가 잊을 리가 없잖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잖아. 그때서야 나는 이 드라마가 연애에 관한, 사랑에 관한 드라마라는 걸 알아차렸다. 바보같이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이건 연애가 시작되고, 진행되고, 끝나는 이야기. 열렬히 사랑하고, 그래서 후회하고, 그래서 행복해하고, 그러나 끝나게 되는, 그리하여 잊혀지게 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 미래에서 온 로봇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하는 사랑 이야기였다. 

       헤이타는 정말 기억을 잃었다. 큐토를 사랑했던 기억을 잃었다. 철탑 밑의 추억을 잃었고, 함께 손을 잡고 걷었던 한쪽 손의 감촉을 잃었다. 자신이 큐토가 평생 흘린 눈물을 가졌다는 사실도 잃었고, 자신이 큐토를 보냈다는 사실도 잃었다. 큐토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잃었다. 큐토에게 '라' 소리가 난다는 것도 잃었다. 큐토가 적어준 '세계'라는 글자도 잃었다. 모두 다 잃었다. 고작 1년이 지난 후에. 그럼에도 사랑했으므로, 아팠으므로 마음만은 남았다. 그래서 큐토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어떤 마음들이 덩달아 떠올랐다. 실제로 존재했었는지조차 가물거리지만 큐토라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늘 헤이타를 따라다녔다. 무언가를 볼 때면 그걸 큐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첫 출장에서 달에서 본 지구, 신혼여행에서 들었던 빙하가 녹는 소리, 아이들을 데려갔던 천년 된 나무 사이로 새어드는 빛.'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말하는 거지. 니가 사랑했던 게 맞다고. 1년 전에, 10년 전에, 50년 전에 니가 사랑했던 게 맞다고. 너는 그를 사랑했고, 그 시간들은 행복했으며, 그 사람은 끝났지만 너의 사랑은 끝난 게 아니라고. 그 사랑으로 인해, 그 이별로 인해 지금의 니가 있다고. 우리는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 거라고. 그러니 그 기억들을 잊어도, 혹은 잃어도, 그 마음들은 잊지 말라고. 결코 잃어버리지 말라고. 2010년 겨울, 내게 와준 키자라 이즈미 작가님들이 이야기하신다. '큐토를 사랑한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라.'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제 세 밤이 지나면 서른 둘이 된다. 곧 서른 둘이 될 나에게 온 '크리스마스의 기적'. 후지노, 이 드라마가 내겐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야. 쿠리코 선생님의 말이 맞다. 2010년에는, 아직 2010년의 세상에는, 기적이란 게 있다. 




        그리워서 어떡하지. 큐토. 헤이타. 쿠리코 선생님. 나는 헤이타가 용기있게 리셋 버튼을 누른 것처럼 삭제 버튼을 누를 수가 없네. 아무래도 SD카드를 구입해야겠어. 구입해야겠어. 이번에도 고마웠어요, 키자라 이즈미 작가님들. 우리 또 언제 볼 수 있나요. 흑흑.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타아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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