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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인 - 마침 비도 왔다
    극장에가다 2009. 7. 16. 23:33
    (약간의 스포일러랄까. 제멋대로 생각하기엔 말이죠. 아무튼 고런 것이 있어요)


        마침 비도 왔다. 하긴 요즘 계속 장마였으니. 마침 비도 왔고,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어 신났다. 아주 흡족한 시간이 될 거라 생각했다. 얼마 전 가슴 설레여하며 본 일본 드라마 <사랑이 하고싶어 사랑이 하고 싶어 사랑이 하고싶어>의 미칸짱처럼 맛있는 규동을 저녁으로 먹었다. '청춘'이라는 일본 이름의 조그마한 가게였다. 따뜻하진 않지만 부드러운 일리 캔커피도 입가심을 하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반만의 준비를 끝내고 <레인>을 맞이하러 극장에 들어갔다. 보고 나면 월요일의 밤시간이 뿌듯한, 그런 영화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흠. 솔직히 말하면, 영화는 그저 그랬다. 같이 영화를 본 Y언니는 영화에서 익숙치 않는 언어가 흘러나오면 스르르 잠이 든다고 했다. 나는 흠, 프랑스 영화랑 잘 맞지 않는 걸까, 생각했다. 그래도 내게 좋았던 프랑스 영화들도 많았는데. 뭔가 부족해요, 라고 영화를 보고나서 투덜거리자 Y언니가 말했다. 그래도 너 완전 많이 웃던데?

        다시 월요일의 그 극장으로 돌아가자. 씨네큐브의 가운데 중앙좌석이었다. 어설프게나마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그 시간을 되돌아보자.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고, (카메라 이동) 나는 Y언니랑 나란히 극장에 앉아 있었다. 예고편이 나왔지. <마이 프렌즈, 마이 러브>라는 영화였다. 둘이 예고편을 보면서 저 영화 재밌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카메라 이동. 영화를 보는 우리의 뒷모습을 보자) 스크린에서도 비가 주적주적 내렸다. 키가 큰 늙은 남자와 키가 작은 (앗. <아멜리에>에서 봤지, 저 분. 그래, <아멜리에>는 재밌었다. 고것도 프랑스 영화였지?) 남자가 등장해 성공한 여자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한다. 영화 <레인>은 요 두 사람이 성공한 페미니스트 작가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일어나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다. 그 시간동안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누군가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는 남편이 있는 여자를 사랑한다.

        (시간 경과) 그래, 이 장면. 영화 속에 다섯 남녀가 보인다. 비가 내린 후였을 거다. 한바탕 비가 내리고, 세 사람이 비에 꼴딱 젖고, 하루종일 일해도 낙이 없는 노동자의 집에서 잠시 머무른 뒤의 일이다. 성공한 페미니스트 작가, 그리하여 정계에 뛰어드려고 하는 여자의 여동생이 그들을 데리러 왔다. 여동생만 오려고 했는데 (왜냐면, 여동생과 영화 초반의 키가 큰 늙은 남자는 불륜의 관계니까) 여동생의 남편이 따라왔다. 그래서 다섯 명이다. 그러니까, 이 좁은 차 안에는 아내에게 사랑을 못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불안한 남자와(그가 운전을 한다), 남편이 옆자리에 있지만 사랑하는 불륜의 남자가 뒷좌석에 있는 여자와(그녀는 이 시간이 불편하다),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와(그래서 그는 자꾸 앞좌석을 힐끔거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얼마 전에 떠나보낸 직업이 작가인 여자와(그를 잡았어야 했어, 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겠지), 편집에 재능이 있는 아내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또 생긴 키가 작은 남자(복도 많지)가 있다. 비는 그쳤고, 하지만 공기 속에 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모두들 말이 없는 공허한 시간. 비의 흔적만 남은 공기 속에 왠지 쓸쓸해 보이는 시선을 창 밖에, 앞 좌석에, 뒷 좌석에 던지며 앉아 있는 다섯 사람. (컷) 이 영화에서 좋았던 장면이다. 

       (카메라 이동) 영화가 끝나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는 극장을 나섰다. 버스를 탔다. 비가 오니깐, 늦은 시간이니까, 왠지 지하철보다 버스를 타고 싶었다. 뭐. 버스는 한 번만에 가니까, 지하철은 갈아타야 하고. 버스를 타고 음악을 들으며, 창가 자리에 앉았다. 정류장에 설 때마다 비에 젖은 사람들이 보였다. 정류장에 설 때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보였다. 정류장에 설 때마다 말이 없는 공허한 사람들이 보였다. 내릴 때가 가까워지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그 길을 걸어왔다. 모두들 말이 없는 시간. 비의 흔적이 남은 공기만이 흐르는 시간. 웅웅- 음악소리가 퍼지는 시간. 기분이 좋기도 하고, 좋지 않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리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비가 그친 시간. 그러면서 생각했지. 그래, 영화가 뭔가 오프로 부족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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