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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섹시 보이스 앤 로보 - 우주에서 나 자신뿐이니까
    티비를보다 2008. 3. 28. 03:15

       고백하건데 나는 10화의 어떤 부분을 술에 취해 열 번 이상 되돌려봤다. 한 때는 꿈과 희망만 가득했던 만화가와 그의 부인이 있었다. 만화가는 성공했고 돈도 많아졌지만 점쟁이의 말을 맹신해 자신은 곧 죽을 것이고 다음 생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걱정한다. 그의 부인은 꿈과 희망과 사랑이 가득했던 과거를 그리워한다. 정전이 찾아온 순간, 도시는 어둠에 휩싸인다. 성공한 만화가도 과거가 그리운 부인도. '우린 아직 어두운 길을 둘이서 걷고 있어'라고 만화가가 말하는 순간,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길 위의 사람 앞에 마법처럼 스르르 불을 밝힌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 성공한 만화가는 탄성을 낮게 내지른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 비친 네모난 창문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꿈과 희망과 사랑과 열정이 가득했던 과거를 생각한다. 네모난 건 뭐든지 좋았다는. 네모난 것 안에 무언가가 살아있다는 느낌에 좋아하기 시작했다던 수족관, 만화, 그리고 네모난 창문 안에서 살아가는 형광등 아래의 우리들. 만화가는 탄식한다. 모두가 네모란 틀 안에 있구나. 나는 이 세상을 사랑했던 거였구나. 죽고 다시 올 다음 세상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 네모난 창문 아래 살아가고 있는 나를 너를, 우리를 사랑해야 하는 거구나. 11화까지 다 보고 난 지금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이 드라마 중에 가장 아름다웠던 건 10화였다고.

        <수박>을 보고 이름만 아는 이 작가들과 사랑에 빠졌다. 내 소개로 <수박>을 뒤늦게 보고 나와 같이 <수박>을 사랑하게 된 언니는 알아보니 작가가 두 명인데 알려진 게 거의 없다고 했다. 카레를 먹으러 가서는 <섹시 보이스 앤 로보>를 꼭 보라고 했다. 나는 지식인 어딘가에서 추천을 받았는데 제목이 유치해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언니는 제목따위는 개념치말고 1화를 끝까지 보라고, 그러면 니가 분명 좋아할 거라고 말했다. 언니는 히레까스를 나는 돈까스 카레를 먹고 있었다. 그렇게 1화를 끝까지 봤다. 혹시나 지금 이 글을 읽으며 <섹시 보이스 앤 로보>라는 제목이 왜 이렇게 유치하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1화를 끝까지 보시길. 이것이면 이 드라마의 최고의 추천 멘트라고 나는 확신한다.  

        1화에 나카무라 시도가 나온다. 그의 배역이름은 '작심삼일'. 3일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가엾은 병에 걸렸다. 그는 두 사람을 만난다. 섹시 보이스를 가진 니코. 목소리에 관한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 아주 멀리 있는 목소리까지도 알아 들을 수 있다. 누가 말하는 건지, 어떤 심정으로 그러는 건지. 그리고 한번 들은 목소리를 정확하게 성대 모사 해내는 14살의 어른같은 귀여운 여자아이. 그리고 또 한명, 여자와 로봇을 사랑하는 오타쿠 로보. 맥스 로보를 항상 외치며 귀여운 몸 동작을 선사하는 아이같은 남자어른. 작심삼일은 1화에서 '잊고 싶지 않은 것'이라는 노트에 '남의 집에서 먹는 카레, 이유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라고 써 넣는다. 이것이 이 드라마 전체가 말하는 바다. 살아있다는 느낌. 우리는 왜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살아있다는 게 왜 행복한 것인가. 이걸 생각해보라는 거다. 느껴보라는 거다. <수박>에 이어서 이런 대단한 메세지를 작은 이야기들에 실어서 우리들에게 띄워보내는 거다. 이 사랑스런 작가들이. 


       옴니버스 드라마다. 11개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매번 니코와 로보가 스파이처럼 출동하고 니코와 로보의 가족과 이들에게 스파이 일을 의뢰하는 골동품 가게에 <수박>의 출연진들이 숨어있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수박>의 출연진이 왕창 등장한다. 결국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거다. <섹시 보이스 앤 로보>에서는 뉴스에 오를 끔찍하고 아리송한 이야기들이 매번 등장하지만 결국 그것들을 파헤쳐보면 우리들이라는, 뉴스 보도로는 냉혈한 무엇이지만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사연이 있는 우리들이라는, 그러니까 함께 귀를 기울이며 현재를 살아나가야 한다는 아주 간단하고도 어려운 이야기라는 거다. 때론 기막히고, 때론 유치하고, 때론 기상천외한 작은 이야기들이 뭉클하게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거다.

       마트에 갔는데 일본 하우스 바몬드 카레가 있었다. 나는 그걸 <수박>을 생각하면서 <섹시 보이스 앤 로보>를 생각하면서 샀다. 이 카레를 요리해 먹으면 그들처럼 작은 것에 행복해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감자와 양파 당근을 썰었다. 집에 고기가 없다. 10화에서 니코의 가족들은 질겅질겅 딱딱한 카레의 고기를 씹어댔는데. 할 수 없다. 야채로만 된 카레를 만들었다. 물을 많이 넣은 탓에 오래 졸인 후에 접시에 예쁘게 담아냈다. 간만에 예쁘게 세팅도 했다. 먹었다. 나도 니코처럼 조금만 웃어도 싱그러울 수 있을까. 나도 로보처럼 매사 긍정적이고 밝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처음 만든 일본 카레는 조금 느끼했다. 치즈맛이 나는 것 같고, 버터맛이 나는 것 같았지만 깻잎 반찬을 얹어 맛있게 먹어치웠다. 그리고 '잊고 싶지 않은 것' 수첩에 무엇을 적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이렇게 적을 거다. 잊고 싶지 않은 것 : 조금은 느끼한 일본 카레를 먹으며 니코와 로보를 생각하는 일. 세상은 의외로 간단히 따뜻하고 살만하다는 걸 알려준 유치한 제목을 지닌 <섹시 보이스 앤 로보>.


       역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섹시 보이스 앤 로보>의 10화 이야기. 오래된 벽화에 커다란 벽보가 붙여져 있다. 벽보가 붙여진 지도 오래다. 니코가 그걸 떼어낸다. 벽화의 색은 오랜 세월에 처음의 색을 잃었다. 떼어낸 벽보 뒤 벽화의 색은 처음 그대로다. 니코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원래의 예쁜 색을 찾아내고 싶은 사람. 찾아내서 세상이 아직 제법 살만하다고 믿음을 주는 사람. 아, 너무 멋지지 않은가. 바래지 않은 세상의 색을 찾아낼 사람. 그래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사람. 모두가 바라는 사람. 나는 울어버렸다. 이렇게 가슴 벅찬 드라마라니.

       11편의 에피소드. 항상 드라마의 마지막에 반복되는 게 있다. 섹시 보이스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한 템포 쉬었다가 가장 중요한 걸 말해준다. 마지막 11화의 끝은 이렇다. '난 평생 내 편에 서려고 한다. 천주교 신부, 연근, 토마토는 맥스, 맥스 우정 파워! 왜냐하면 날 구할 수 있는 건 (한 템포 쉬고) 우주에서 나 자신뿐이니까' 천주교 신부, 연근, 토마토는 맥스, 맥스 우정 파워는 뭐냐고? 헤헤. 궁금하시다면 직접 보시라. 후회하지 않으리. 힌트를 주자면 이건 용기다. 행복해질 수 있는 용기. 사랑할 수 있는 용기. 용서할 수 있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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