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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회말 2아웃, 난희와 수애사이
    티비를보다 2007. 8. 21. 13:52


        9회말 2아웃 첫방송때 마음에 척척 달라붙는 대사들에 이끌려 닥본사의 애청자가 되겠노라고 다짐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사라져버렸다. 아직 스물두살인 막내동생은 이 드라마에 홀짝 빠져 꼭 닥본사를 하며, 중요한 약속 때문에 빠뜨린 날은 그 밤이 채 가기도 전에 다시보기를 해서 챙겨본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물었을 때 귀찮은듯이 대답을 안 하더니 저번회부터 정주가 나오지 않는다며 갑자기 재미가 없어졌다는 걸 보니 이태성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난희가 좋았다. 신춘문예에 당선되서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인 난희, 직장생활은 겨우 버티고 있는 중이고, 서른에 가까워온 생의 허무함을 서른즈음에로 노래하는, 포장마차에서 절망과 희망을 섞은 폭탄주를 들이키며 푸념할 수 있는 그녀. 어떤 때는 나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나 같지 않아서 좋았던 난희.

       그런데 첫방송 이후 몇 편을 닥본사하다 보니 난희가 푸념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꿈이 있다. 비록 계속 실패하고 있긴 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작가라는 목표가 젊은 나이를 꼭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먹을수록 글은 더욱 깊어질테니 언젠가 이렇게 노력하다보면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 때까지 최소한의 아니, 풍요롭지 않아도 평범한 경제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 말로는 월급도 못 받는다 하지만 월급은 꼬박꼬박 밀려서라도 나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저번주에 보니깐 매출이 올랐다고 사장이 수산시장에서 회까지 쏘시더라. 그리고 연하의 팔팔하고 잘생긴 남자친구. 저번주에 헤어진 듯 했지만, 아무튼 연하의 풋풋하고 순수해서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로 인해 서른에도 스무살의 열정적인 연애를 맛보지 않았나. 마지막으로 제일 부러운 30년지기 친구 형태. 똥모양이라고 놀려댈 수 있는 남자'친구', 자주 가는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나는 친구이며 언제든 술잔을 함께 마주쳐주는 친구, 지나간 유행가를 길거리에서 함께 부르면서 쪽팔려하지 않을 수 있는 친구, 어떤 때는 남자친구이면서 어떤 때는 여자친구이기도 한 언제든 내게서 도망가지 않을 것만은 분명한 친구, 게다가 잘 생겼고 잘 나간다.

       됐다. 이 정도면 난희는 충분히 행복하다. 매일밤 포장마차나 맥주를 마시며 푸념할 필요는 없다고! 그럼에도 난희는 푸념한다. 뭐 꿈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어린 남자친구와의 미래가 걱정된다고 이런 푸념따위는 그래, 들어줄 만하다. 내가 이 드라마를 조금씩 멀리 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 난희가 수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희가 아니 수애가 외모에 대해서 푸념을 하는 순간들 때문이다. 수애는 예쁘다. 수애는 갸날플정도로 날씬하다. 그리고 수애는 어리다. 아니다 실수했구나. 지금 검색해보니 수애 80년생이다. 올해 28살, 그렇게 어리지 않구나. 왜 어리다고 생각했던 거지? 그럼 다시. 수애는 무척이나 어려보인다. 그런 수애가 말한다. 자신보다 도저히 더 어려보이는 것 같지는 않은 후배를 보고, "젊은 여자 봤을 때, 고거 참 싱싱하네 하는 거 보면 나 늙은 거 맞죠?" 그리고 어이없게도 또 이렇게 말한다. "고뇬 참 탱탱하네." 등등. 나는 예쁘고 아름답고 탱탱한 수애가 저런 대사를 날릴 때 정말 공감되지가 않는다. 내가 말하고 싶다고, 수애한데. 고뇬 참 탱탱하네.

       그래도 이 드라마, 대사가 너무 좋다. 마치 작가가 직접 경험해 본 것만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서른즈음 마음에 자석처럼 착착 달라붙는 대사들. 그동안 닥본사하지 못한 회들은 대본보기해야겠다. 나는 도저히 수애의 푸념을 듣지 못하겠다. 난희가 아무리 자학을 해도, 수애는 빛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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