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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를쌓다 2021. 5. 19. 22:38

     

     

      택배가 도착할 예정이라는 문자가 왔다. 보낸 사람은 김남희. 남희언니인가. 도착할 때까지 두근대며 기다렸다. 택배봉투 주소를 보니 언니였다! 책 속지에 언니의 손글씨가 담긴 귀여운 종이가 붙여 있었다. SNS에서 소식을 보았다며 엄마가 되는 걸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좋은 엄마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응원이 적혀 있었다. 종이를 붙인 마스킹 테이프에는 단란한 가족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언니에게 어떻게 소식을 전하나 궁리하고 있었는데 언니가 먼저 연락을 해줬다. 가쿠타 미쓰요의 <행복의 가격>은 내게 보내고 싶었던 책이라고 했다. 두 에피소드가 정말 좋았는데 맞춰 볼 수 있겠냐고. 어떤 에피소드가 좋았을까 생각하면서 읽어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초반에 공감되는 에피소드 두 개를 찜해두고 언니도 분명 이 글들이 좋았을 거다 확신했는데, 중반부와 후반부에 어떤 글을 보고 아, 이 글들이다 싶었다. 

     

      어느 날, 가쿠타 미쓰요는 약속장소에 나간다. 약속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상대방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고가 난 걸까, 아마도 전화를 하지 못할 상황일테지, 여러 상상들을 하다 아무래도 약속시간을 잘못 안 것 같다고 체념을 하고 시간을 때우기 좋은 근처 서점에 가서 책 한 권을 사고 카페로 간다. 두유를 넣은 330엔짜리 아이스커피를 사들고 구석자리에 앉아 동네를 바라보다 깨닫는다. 공백이다, 라고.   

     

     

       생각해보면 불과 사오 년 전만 해도 놀랄 만큼 한가했다. 여름날 오후 한두 시쯤 더위 때문에 일하기 싫어지면, 자전거를 타고 조금 떨어진 온천에 가서 자쿠지 욕조에도, 습식 사우나에도, 폭포물 욕조에도 하나하나 들어가보고, 열탕과 냉탕에 대여섯 번은 번갈아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해가 늬엿늬엿 넘어가려 할 때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상점가를 돌아다니다가 생선 가게에서 고민고민하며 고른 생선회를 조금 사고, 술 가게에서 차가운 맥주를 사 와 방에서 저녁놀을 바라보며 저녁 식사와 함께 한 잔 하기도 했다. 혼자서 수영장에도 갔다. 아이들 틈에 끼어 구청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한쪽 바닥에 드러누워, 깜짝 놀랄 만큼 높은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수영장 앞 구멍가게에 가서 라무네를 사마신 적도 있다.

       모든 것이 공백이었다. 공백투성이의 하루하루였지만, 불안하지도 초조하지도 않았다.

       두유 아이스커피가 있다는 것도 모를 만큼, 햇살을 받으며 하얗게 빛나는 책장이 그리워질 만큼, 왜 이렇게 나는 바빠진 걸까.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때의 공백이 지금 내게 주어진다 해도 이제는 결코 예전처럼 즐거워하지도, 재미있어 하지도 않겠지.

       유리창 너머로 시간은 나를 두고 가버리고, 카페의 공기는 떠다니는 먼지처럼 천천히 가라앉고, 태양은 반짝이는 하얀 페이지 위의 글자를 감춘다. 이런 함정 같은 공백은 정말 좋구나, 하고 나는 두유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 p. 97

     

     

      우리의 이삼십대를 떠올려봤다. 영화를 보고 맥주를 마셔대던 그 때. 영화제의 심야영화를 보기 위해 나가던 밤길, 그 날의 밤공기. 언니의 친구들을 소개받던 일. 함께 글을 썼던 일,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시작했던 수많은 이야기들. 떠났다고 하면 늘 궁금했던 언니의 여행 이야기들. 몇년 전이었나. 언니가 갑자기 아일랜드에 함께 가자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다급한 일정에 떠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때 이것저것 재지 않고 바로 휴가를 내고 떠났더라면 지금 그때 함께 한 추억도 떠올리고 있었을텐데.  

     

     

       삼십 대가 되고 나서, 마음이 좀 편해졌구나, 하고 종종 생각한다. 마흔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마음이 편해진다. 아무려면 어때, 하는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이 ‘아무려면 어때’라는 기분이야말로 이십 대 시절의 그 무위한 것들이 만들어낸 기분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는 대신에 그만큼 훨씬 바빠졌다. 최근 이삼 년 동안은 도대체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는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바쁘다. 일주일에 사나흘 술을 마시는 건 여전하지만, 그 대부분은 일 관계로 만나는 사람들과 일 이야기를 하면서 마시는 것이고, 그래서 고주망태가 되는 일도 없이 늘 말짱한 정신으로 막차가 끊기기 전에 집에 돌아온다. 친구를 만나는 건 부쩍 줄었다. 뭐랄까, 하루하루의 윤곽만 본다면, 여유로움도 편안함도 없이 그냥 일만 하는, 푸석푸석한 일 중독 인간의 나날이다. 그래도 그럭저럭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건 역시, 이십 대의 내가 지금의 나를 대신해 실컷 술을 마셔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삼십대 때 쓴 돈 역시 분명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내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아직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마흔도 중반을 훌쩍 넘긴 어느 날 문득 알아차리겠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그때 아무 데도 돈을 쓰지 않아 통장에 잔고만 이상하게 쌓여 있는 것이다. 언젠가 그런 사람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삼십 대 후반이었던 그 사람은 마치 자기소개라도 하듯, 난 저축이 얼마 얼마 있어,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라기보다는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영화도 안 보고, 술도 안 마시고, 외식도 안 하고, 여행도 안 가고, 그렇게 모은 돈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의 내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오로지 돈만 모은다면, 그만큼은 남는 게 아니라, 그것밖에 남는 게 없다. 숫자는 쌓일지라도 내면에 쌓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진정으로 풍요롭다는 건 통장에 돈이 얼마 얼마 있다는 게 결코 아니라는 걸, 그 사람을 보며 알았다. 그렇게 내면이 가난한 채로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나는 정말 두렵다.

    - p. 192-195

     

     

       오늘은 남편과 이케아에 다녀왔다. 메모지에 적어간 물건들을 무사히 구매하고 레스토랑에 갔다. 온 김에 이케아 음식도 먹어보고 싶어서 카트에 접시를 놓고 줄을 섰다. 음식들이 진열대에 놓여 있고 원하는 음식을 꺼내거나 주문하면 바로바로 담아주는 시스템이었다. 이상하게 설레였다. 마치 외국 어딘가로 여행을 온 것처럼. 식당은 아주 컸다. 중간 즈음에 앉아 결제가 끝난 음식들을 먹었다. 남편은 핸드폰을 보고 한화가 12대 1로 이기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케아에 가기 전 컴퓨터를 켜고 한글 파일을 열었다. 제일 먼저 파일명을 저장했다. 2021_책갈피. 올해 읽을 좋은 책 구절들을 모두 적어둘 생각이다. 책방에 들어와 창문을 열어야지. 스탠드를 켜고 책받침대에 다 읽은 책을 놓아두고 좋았던 구절들을 펼쳐야지. 눈으로 보며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려야지. 타이핑한 문장들을 눈으로 다시 읽어봐야지. 역시 좋은 문장이었어, 생각해야지. 아마도 이 시간들이 앞으로의 내게 큰 위안이 되리라. 오늘 파일의 첫 페이지에 <행복의 가격> 두 부분을 옮겨 적었다. 다 옮겨 적고 다시 읽으며 역시 좋은 문장들이었네 생각했다. 내일은 언니에게 엽서를 써야지. 동네에 새로 생긴 우체통 위치는 알아뒀다. 좋아하는 빵집을 지나고 꽃집을 지나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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