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길이었나. 약속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던 길이었나. 몇 주 전이었고, 합정역이었다. 망원방향의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갑자기 울부짖는 소리가 나서 모두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여자분과 남자분이 있었다. 아주머니, 아저씨 보다는 할머니, 할아버지에 가까웠다. 여자분이 어찌보면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남자분의 가슴과 등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끊겼다 들렸다 끊겼다 했다. 주위를 의식한 게 아니라 너무 서러워 소리가 끊기는 거였다. 그 순간 남자분의 표정과 소리를 보고 듣지 않았더라면 그냥 여자분이 만취 상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틀거리며 울부짖는 여자분을 부축하는 남자의 얼굴에 울음이 섞인 절망이 보였다. 그런 절망의 표정을 하고서 어떤 소리를 툭하고 내뱉었는데, 그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의 소리였다. 나는 남자분이 병에 걸렸구나 생각했다. 남자분은 죽을지도 모르는 병에 걸렸고, 여자분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남자분의 등과 가슴을 치며 정신을 잃을 정도로 슬퍼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여자분은 어떻게 살라고, 라는 말을 울부짖으며 내뱉었다. 어쩌나 어쩌나. 나는 그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고 듣다가 그 여자분의 마음이 되었고, 그 남자분의 표정이 되었다. 이제 어떻게 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마음이 되었다. 곧 전철이 왔고, 출발한다는 방송이 들릴 즈음 전철에 탔다. 아마도 망원방향의 승강장에는 잠시 그 두 분만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 밤의 일은 돌아가는 길에도,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몇 주가 지난 지금도 생각이 난다. 내가 오해하고 내 식대로 해석해서 본 것일 수도 있는데, 계속계속 그 절망의 마음이 생각이 난다. 그러다 우리 아버지 생각이 나고, 외할머니 생각이 나고, 엄마 생각이 난다. 


   그때 이 책의 초반부를 읽던 중이었는데,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나아가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범하게 떠올릴 생각보다 내 마음을 더욱 끌어당기는 것은 바로 이 사건의 '무의미함'이다. 이 개의 죽음은 내게 갑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구술자에게도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본토에서 온 사회학자가 인터뷰를 위해 자택에 방문한 바로 그날 밤,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었다. 몇 초의 침묵만 흘렀을 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려보낸 까닭은, 그 자리에 있던 나와 구술자 모두에게 그 일이 대화 속에 끼워 넣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치 남아메리카 작가의 작품처럼, '무슨 일이 쓰여 있는지는 또렷이 이해할 수 없지만 묘하게도 기억에 남는 단편소설' 같은 밤이었다."(11-12쪽) 


   나는 이 책이 몇 주 전에 내가 합정역에서 본 그 밤의 기억처럼 강렬한, 남의 이야기이지만 마치 내 것처럼 생각이 되는, 그리하며 마음이 아프고 아린, 그런 이야기들의 모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좋았고, 마음에 담아둔 구절들이 제법 있었다. 길 위에 굴러다니는 돌을 보고 이 드넓은 지구에서 '이' 순간에 '이' 장소에서 '이' 나에게 주워 올려진 '이' 돌이라고 생각하고 감동하는 구절. 세계에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 온 천지 길바닥에 무수하게 굴러다니고 있다는 구절,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다는 구절. 네모난 종이책은 그대로 온전히 바깥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네모난 창이라고, 우리는 때가 오면 진정 창과 문을 열어젖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곳으로 풀쩍 뛰어나가는 것이라는 구절. 오키나와 바다에서 잠수를 하다 1미터가 넘는 바다거북이를 만난 구절. 어느 날 자신의 가장 아팠던 가정사를 아는 이에게 말했고, 그 사람이 유연하게 들어주었고, 그 뒤로 그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것이 편해졌다는 구절. 아이가 있는 친구와 자연스레 소원해지는, 저러한 세상의 행복에서 자연스레 멀어져 가는구나 하고 실감하는 구절. 좋은 것에 대한 모든 말은 '나는'이라는 주어로 시작해야 한다는 구절. 남의 생활사를 들을 때면 언제나 차갑고 어두운 밤바다 속으로 혼자 맨몸뚱이로 잠수해 들어가는 감각을 느낀다는 구절.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연인도, 아무리 친한 친구도, 뇌 속에까지 놀러와 주지 않으니, 우리는 고독하다는 구절. 자기 안에는 대단한 것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고, 단지 거기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긁어모은 단편적인 허드레가 각각 연관성도 없고 필연성도 없이, 또는 의미조차 없이, 소리 없이 굴러다닐 뿐이라는 구절. 인생을 버리고 무언가에 도박을 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속에서 천재가 나올 확률은 높아진다는 구절. 그리고 이런 문장. "그런 인생의 모습. 그것은 그것대로 매우 좋은 것이다."(2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