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발코니

from 서재를쌓다 2018.03.29 21:24



    추운 날이었다. 우리는 광화문에서 만났다. 전날만 해도 따뜻했는데, 약속한 날에 칼바람이 불어댔다. 보경이는 수요미식회에 나온 적이 있는 곳이라며 근사한 레스토랑 분위기의 밥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들깨가 들어간 국물과 아삭아삭 채소가 들어간 비빔밥을 먹었다. 실내는 빛이 들어오질 않아 어두웠다. 너무 추워 멀리 못가고, 근처 커피집에 들어가 따뜻한 라떼를 한 잔씩 마셨다. 달달한 케잌은 거의 남겼다. 커피집에서 보경이가 말했다. 인터넷에서 누군가가 쓴 문장을 봤는데,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그 책이 읽고 싶어졌다고. 사서 매일 조금씩 읽었다고. 작가 소개가 있긴 했는데,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언니가 좋아할 지 모르겠다. 언니는 멋낸 문장 안 좋아하잖아. 


   처음과 똑같은 마음으로 읽어내진 못했다. 처음에 무척 좋았거든. 보경이가 말한, 언니가 싫어할 멋낸 문장이 뭔지 알겠더라. 나는 담백한 힘을 믿는 편이다. 심플하고 담백한 것이 더 묵직한 감흥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그게 이야기일 수도 있고, 문장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이 책에는 내가 모르는 이국의 언어와 이국의 지명들이 잔뜩 나온다. 어떤 행동을, 어떤 기분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그것들이 내게 곧장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빙빙 에둘러 느리게 온다. 좋아하는 담백함이 아니지만, 나쁘지 않더라. 어떤 문장들은 무척 좋았다. 그 문장을 품고 바로 잠들고 싶을 정도로. 


   어떤 문장은 시 같고, 어떤 문장은 소설 같고, 어떤 문장은 꿈 같았다. 버섯으로 국물을 낸, 뼈를 일일이 발라내야해서 손이 많이 가는 우럭미역국은 꼭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 만들어서 좋은 사람과 나눠 먹고 싶다. 그 미역국을 먹을 때 생각날 거다. 함께 걸었던 광화문 칼바람 길, 어두웠던 실내에서의 들깨국, 문이 끊임없이 열리고 닫히지 않던 커피집, 나란히 탔던 택시, 연남동의 값비싼 초콜릿 가게도. 그 날 보경이는 초콜릿 가게에서 계피를 넣고 함께 끓일 수 있게 포장된 초콜릿 가루를 선물해줬는데, 집에서 끓여보니 무척 진했다. 걸쭉했다. 따뜻했다. 이렇게 겨울, 밤도 간다. 



  

   가쓰오부시를 우려낸 다시 국물에 배춧잎과 삼겹살을 한 입 크기로 썰어 냄비에 담는다. 흙으로 빚은 전골냄비 속 고기와 채소들이 익어가면 거품 쌓은 맥주 한 모금. 레몬즙과 겨자가 중심이 되는 소스를 취향대로 만든 우리는 부드럽게 익은 고기와 채소를 산뜻한 소스에 적셔 입에 넣는다. 달이 어디 있지, 하며 마주 앉아 먹던 나베의 맛.

- 14쪽


   모든 것이 처음인 것 같은 아침에, 우리는 작은 탁자에 마주 앉아 아침을 먹었다. 빵과 버터, 반으로 자른른 자몽과 꿀, 크루아상과 마멀레이드와 커피포트를 테이블에 늘어 놓았다. 나는 파란색 팬티를 입고 커피를 새로 만들어 꿀과 버터를 빵에 바른다. 크루아상은 아침의 빵이고, 우리는 아침을 사랑하고, 아침의 섹스는 꿈 같다. 쿤스트카머, 이상한 사물들의 나라, 그 무질서한 세계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지붕들과 레이스 팬티를 사랑했다. 

- 19쪽


... 바깥은 어둠이 짙다. 어쩔 수 없는 마음이 되어버려 맥주를 마시고 또 마시는 것은 창문을 뒤흔들며 마음을 헝클어뜨리고 마는 거센 바람 때문이다. 

- 22쪽


Recipe_5 시래기국

Procedure_시래기(마른 무청)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물에 불린다. 불린 시래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다음 된장, 다진 마늘, 들기름으로 버무린다. 끓는 물에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 국물 맛을 낸다. 다시마는 살짝 끓이다가 건져낸다. 멸치육수가 우러나면 멸치를 건져내고 된장을 풀어 양념한 시래기를 넣어 중불, 약불에서 뭉근하게 끓여낸다. 콩가루를 뿌려서 밥 말아 먹으면 배 속이 따뜻해진다. 

- 24쪽


...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과 지난 것들 사이에 너와 내가 고여 있다. 

- 32쪽


... 섬은 아름답지만 견뎌야 하는 곳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을 견딜 수 있는 일상의 순간들을 여럿 가지고 있다. 내게 그것이 오전 열한 시경, 마당에 널린 바삭하게 마른 하얀 이불의 냄새였다면 H에게는 아침의 해장국이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들을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알 것 같다. 자고 가, 잠깐만 자고 가, 라고 말하던 그 순간은 나는 외로워, 그리고 너의 외로움을 이해해, 라는 말이었음을. 마루를 사이에 두고 우리가 잠드는 밤이면 보이지 않는 외로움 세 개가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손을 꼭 잡은 세 마리 수달이었다. 

- 46-47쪽


... 어느 날 당신이 버려진 정원 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 모과나무 식탁에서의 저녁이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그런 밤이면 당신에게 비밀의 해변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싶다. 그런 밤이면 지나간 아름다운 날들처럼 밤하늘 가득 별들이 빛났으면 한다. 

- 56쪽


   처음으로 함께 떠나는 여행인데도 시속 120킬로미터로 달리는 두 시간 내내 굳은 표정으로 운전대만 잡고 있는 남자친구 때문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나는 시무룩하게 있다가 잠이 들었다. 자정이 다 되어 바다에 도착한 우리는 키스하고 해변을 걷고 새우를 굽고 소주를 마셨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그날 밤 처음 차를 몰았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난폭하게 커브를 도는, 브라우니 냄새가 희미하게 시트에 밴 자동차를 타고 낮과 밤의 드라이브를 즐겼다. 나는 그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면 자주 잠들곤 했는데 세상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 하던 내게 그가 운전하는 자동차의 조수석은 세상의 경계를 향해 달려 가는 의자였다. 그때 그는 내가 지구에서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67쪽


... 어부들은 아귀찜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쌉싸래한 미더덕이 입안에서 탁, 터질 때 술잔을 들었다. 

- 71-71쪽


... 어부들이 상온의 소주를 즐기는 이유는 아마도 찬 술이 바다의 풍미를 덮기 때문인 것 같다. 술의 온도를 바다와 같은 온도로 마시는 것이다. 

- 74쪽


  계절이 여러 번 바뀌어 두 고양이 모두 여기 없다. 이제 나는 쉽게 이름 지어주지 않고 쉽게 잊는다. 꿈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늘어간다. 나는 세상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들고양이처럼, 기울어진 지구 끝에서 살그머니 움직인다. 

- 116쪽


Recipe_우럭 미역국

Ingredients_말린 미역, 우럭, 버섯, 마늘

Procedure_미역국에 참기름을 넣지 않고 버섯만 끓여보았더니 깨끗하고 깊은 맛이 났다. 이 국 요리는 한때 머물던 깊은 숲에서 배운 것이었다. 가시를 발라내야 하고 손이 많이 가는 생선미역국은 나를 위해 끓여본 적은 없는 국이다. 손질한 우럭을 냄비에 넣고 뭉근히 끓인다. 불을 줄이고 생선을 건져 손으로 가시와 살을 발라낸다. 불린 미역과 다진 마늘, 우럭살을 넣고 끓이다가 소금, 국간장으로 간한다. 

-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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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겨 쓰면서 생각이 났는데, 이 책의 '나'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다. 한 독자는 이 책을 와인을 마시면서 읽었다고 했다. 그 평을 읽고 나서야 와인과 잘 어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적한 바닷가가 있는 숙소의 마당에서, 오래된 결이 느껴지는 테이블을 앞에 두고,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얇은 책 귀퉁이에 아침의 일기를 쓰는 상상을 해 봤다. 


 


  1. 2018.06.12 18:1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6.13 11:23 신고 BlogIcon GoldSoul

      와, 가을의 신부! 축하드려요. 4개월 남았단 얘기에 저도 덩달아 몽글몽글. 이제부터 쭈욱 행복한 시간들이길요. 진짜 축하드려요. :)
      이 책도 마음에 들었음 좋겠어요. 호불호가 갈릴 책 같아요. 여름이니깐 시원한 화이트 와인 따라두고 바람 솔솔 부는 곳에서 읽는 걸 추천드려요. 읽고 어땠는지 얘기해주세요. 별로였다고 해도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