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기분

from 서재를쌓다 2018.03.26 22:23

 


   읽으면서 생각했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매개체를 통해서든 드러나는구나. 차의 이야기이지만, 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차를 마시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 글들이 짧은데, 결코 짧지 않다. 차를 마시듯 한 모금, 한 모금 그렇게 책장을 넘기며 봤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차를 마셔온 사람으로서, 커피나 여타 음료를 마셔온 사람보다는, 차에 더 가까운 정서를 갖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정서가 알게 모르게 글에 묻어났기를 기대한다. 나는 차를 마시는 사람이고, 차를 마시면서 몸도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고 자신한다. 당신도 나처럼 그랬으면. 나는 이제 심지어 와인보다 차를 더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와인을 약간 더 좋아하고, 차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표현이 올바를 것이다. 

- 8쪽


   차를 왜 마시는가? 외로워서 마신다. 정말이지, 외로워서. 

   추사도, 다산도, 외로워서 마셨을 것이다. 둘은 유배지에서 누구보다 외로웠다. 추사와 다산이 이뤄낸 성취들은 모두 외로움이 잉태한 것들이다. 외로운 이는 외로움을 꺼려 하지만 외로움에 끌린다. 

   차는 외로움을 달래면서도 외로움을 고양시킨다. 어떤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보다 높은 외로움에 이른다는 것. 외로운 이가 외따로 있는 듯 보이는 것은 그가 보다 높은 외로움에 있기 때문이다. 

- 19쪽


   차는 심심해서 마시기도 한다. 심심함은 물기 없는 외로움이다. 차를 마시면 심심함에 물기가 배면서 외로워진다. 헐레벌떡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약속시간에 늦은 친구는, 자신을 기다리며 물기에 젖은 당신을 보고는 부쩍 깊어졌다고 여긴다. 

- 21쪽


   차는 편할 때 마시면 그런대로 좋지만, 편치 않을 때야말로 차를 마셔야 하는 적기라 할 만하다. 서럽고 분하고 눈물이 멈추질 않고, 일은 꼬이고 엉켜서 퇴로가 보이지 않을 때, 불쑥, 그러니까 불쑥 일어나 물을 끓이고, 어떤 차를 마실지, 어떤 찻잔을 쓸지, 신중히 결정한 다음, 무엇보다 차를 우리는 데 전력을 다하고, 우린 차를 흘리지 않게 조심해서 찻잔을 따르고, 차향을 맡고 차를 마시며, 찻잔의 기원이나 양식에 대해 골몰하는 이런 난데없는 허튼짓이, 불가피해 보이던 사태의 맥을 툭툭 끊는다. 내게는 걸레는 빠는 일이나 차를 마시는 일이나 다르지 않은데, 걸레를 빨아야 할 때가 있고, 차를 마셔야 할 때가 있다.

- 25쪽


   아침에 깨어나 마시는 차는 꿈과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향긋한 교량과 같다. 차를 마시다 보면 어느새 나는 꿈에서 현실로 건너와 있다. 그럼에도 교량을 건너며 몇 번이나 뛰어내리고 싶었던가. 

- 28쪽


차 마시는 시간은 흰수염고래와 도롱뇽의 시간처럼 새털구름의 속도가 평균 속도인 시간.

아이 곁에서 엄마가 잠이 드는 시간.

귀 기울이지 않아도 들리는 작은 소리들의 시간.

오래 전, 누군가가 전한 인사말, 충고의 말, 고백의 말들이 뒤늦게 도착하는 시간.

그리고 비로소 지금보다 어린 그들에게 감사와 사과의 말을 정중히 건네는 시간.

노을 진 천변을 지나, 저녁 준비에 분주한 부엌에 이르러, 이제는 그만 찻잔을 내려놓을 시간.

달그락

달그락

- 33쪽


   찻잔이 비었다고 성급히, 찻잔에 차를 다시 채워서는 안 된다. 비 갠 후 꽃의 향이 진해지듯, 차향도 차를 삼킨 후에야 진해진다. 빈 찻잔을 보며, 가만히 있는 시간이 는다. 

- 44쪽


   어느 사찰에서 마셨던 차 맛이 잊히질 않는다고 한다. 무작정 비를 피해 들어갔던 찻집 창가에서 마셨던 차 맛이 잊히질 않는다고, 가을이었고, 그때도 너뿐이었다고.

   차 맛이 문제가 아니다. 

- 65쪽


   봄에는 반드시 햇차를 마신다. 여름에는 따뜻하게 마신다. 녹차의 차성은 차서 더울 때 차갑게 마시면 도리어 장에 해롭다. 가을에는 마시지 않는다. 가을에는 마셔야 할 다른 차가 너무 많다. 겨울이 지긋지긋해지는 2월과 3월에 마신다. 이때는 봄을 부르는 주술을 것 듯 신비롭게.

- 78쪽


   나는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차에 우유를 넣어 마신다. 출출한데 음식을 삼키고 싶지 않을 때나, 한기를 느낀 몸이 유지방을 원할 때, 다 큰 아이를 조용히 달래야 할 때도.

- 101쪽


  옛날 중국의 한 마을에 역병이 돌았는데, 이 차를 마시고 병이 싹 나았다고 한다. 그러니 이 차가 관음이 아니겠냐고 한다. 찻잎이 철처럼 무거우니 철관음이 아니겠냐고. 여러 번 마시면 믿게 된다. 

- 119쪽


   이 찻잔은 내가 제일 아끼는 찻잔이다. 이 찻잔은 나와 십 년을 함께했다. 그 십 년 동안, 몇몇 친구들과는 소식이 끊겼고, 애인들과는 만나고 헤어지길 거듭했지만, 이 찻잔만은 금도 가지 않은 채 멀쩡히 내 옆에 있다. 이 찻잔은 뭐랄까. 내가 다시 혼자일 때, 어느새 내 옆에 와 있는 식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새삼 감탄하면서 우정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이 찻잔은 십 년 차를 담아내더니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 뜨거운 차는 따뜻하게 내고, 차가운 차는 시원하게 낸다. 눈에 띄게 아름답지는 않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잿빛 표면에 홍조가 어렸다. 나는 이것을 노을이라 여기며 어루만지곤 한다. 만지며 내가 보는 것이 이 찻잔만은 아닐 것이다.

- 143쪽


... 화사한 헤렌드 풍의 채색다기는 매일 사용하기보다 유달리 기분이 우중충할 때 쓴다. 기억하길, 나도 한때는 순수하고 어리석은 사랑을 해본 적이 있다고.

- 147쪽


    책 읽는 사람 옆에는 찻잔이 있어야 한다. 한 세계를 여행하는 데 찻잔이 빠져서야! 물론 차를 가득 채운 티포트도 있어야 한다. 고작 찻잔이 비었다고 우주의 미로나, 분홍빛 종탑이 보이는 콩브레 언덕을 물이나 끓이자고 홀연히 떠나야 하겠는가?

- 164쪽



 

  1. 2018.03.27 16:0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3.29 21:18 신고 BlogIcon GoldSoul

      와, 왠지 독일 연필은 단단할 것 같아요.
      저는 연필깎이가 두개 있어요. 선물받은 무인양품 연필깎이랑 언젠가 급하게 샀던 다이소 연필깎이. 연필도 여기저기서 사고 얻어서 한가득인데, 쓰질 못하고 있다는요. ㅠ
      저는 우선 차를 내려 마시고, 그리고 뭔갈 해야겠어요. 아, 다행이에요. 목요일 밤이라는. :)
      금요일 잘 마무리하시고, 즐거운 주말 맞이하세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