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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퉁이다방 2018. 2. 26. 22:28



       지난 목요일의 일. 보경언니가 강연을 함께 듣자고 했다. 오랜만에 셋이 만나서 맥주도 마시자고 했다. 엄마 찬스를 쓴다고 했다. 한때 우리 셋은 한달에 세 번 이상은 맥주잔을 부딪치는 사이였는데 (한때는, 이 말을 요즘 자주하네) 이제는 반년에 한번 모이기도 힘들게 됐다. 요즘 사무실이 너무 건조해서 가끔 속이 미식거리는데, 이날이 유독 심했다. 나는 늦어서 강연은 못 듣겠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넓직한 테라로사로 갔다. 넓직한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핸드폰도 하면서 저녁시간을 보냈다. 평일 저녁 테라로사는 제법 한가하더라. 한 시간이 넘자 언니에게 전화가 와서 케이티 건물 앞에서 만났다. 강연이 별로였다고 했다. 친구는 언니가 설문지를 내러 가서 패널 선정이 잘못된 거 아니냐고 항의를 하고 있던 모습을 봤다고 말해줬다. 역시 언니답다, 고 이야기하며 광화문 한복판에서 크게 웃었다. 


        간만에 거성호프에 가서 카레가루가 들어간 통닭을 시켜 생맥주와 함께 먹었다. 친구가 옆 테이블의 골뱅이 무침이 맛있어 보인다며 같이 시키자고 했다. 셋이 메뉴판을 올려다보며 물가가 많이 올랐다고 걱정을 했다. 거성호프의 치킨은 예전의 그 맛도, 그 양도 아니더라. 생맥 오백을 각자 두 갠가 세 갠가 마셨다. 지금의 이야기도 하고, 예전의 이야기도 했다. 예전의 이야기는 셋이 함께 대게를 먹으러 일박이일 여행을 간 이야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실패했던 추억들을 더 신나게 이야기한다. 처음 도착해서 먹었던 맛난 대게 한 상보다 노상의 할머니에게 손녀 뻘인데 내가 속이겠소, 말을 들으며 산, 앙상하고 너무 짜 소금덩어리 같았던 대게와 라면에 넣어 먹으려고 샀는데 내장이 하나도 없었던 대게가 더 기억에 남아 매번 이야기한다. 역시 여행은 실패가 제 맛. 다시는 그때 그 시간으로, 그 공간으로, 그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지금도 좋지만, 그때도 좋았다.


       차가 끊기기 전에 일어났는데, 밖으로 나오니 눈이 시작되고 있었다. 버스가 있을 줄 알고 전철을 타는 언니, 친구와 헤어졌는데 정류장에 가보니 막차가 끊겨 있더라. 전철을 타려고 역으로 걷는데, 눈이 순식간에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와와, 혼자서 소리를 내며 걸었다. 역에 가보니 전철도 중간에 끊기길래 다시 나와 택시를 기다렸다. 그래, 이 시간 광화문에 택시가 잡힐리가 없지. 이 날씨에. 어쩔 수 없이 걸었다. 조금 걸으면 왠지 잡힐 것 같아서. 눈은 점점 많이 오고, 우산 따위 없는 나는 점점 눈사람이 되어 갔다. 눈이 발 밑으로도 쌓이고, 코트 위로도 쌓이고, 머리 위로도 쌓였다. 그러면 엄청 추워야 하는데, 바로 전철을 타지 않은 걸 후회해야 하는데 (처음엔 했다), 가만히 그렇게 걷고 있으니 신기하게 따뜻해지더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근사한 풍경을 지금 길 위여서, 방금 좋아하는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고 나와서, 아직 자고 있지 않아서 볼 수 있어서. <사랑니>의 대사처럼.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아줬다. 그래서 눈길을 함께 걸을 수 있었다. 


       얼마 안 가 오르막길의 병원에서 내려오는 빈 택시가 보여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는 응암으로 간다는 말을 듣더니 잠시 망설였다. 에이, 타세요, 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맙다고 몇 번을 말하고 문을 닫았다. 택시 안으로 내가 가지고 들어온 눈이 우르르 떨어졌다. 택시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눈밤을 천천히 나아갔다. 한밤의 라디오 음악도 좋았다. 이게 다 보경언니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 별로였던 강연 덕분이었다. 잘 가고 있는지 두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언니는 눈 내리는 모습을 벌써 보았고, 친구는 지하라 아직 못 보았다고 했다. 걸으면 눈사람이 될 정도야, 라고 말하니 친구는 믿질 못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눈사람이 되어 엘리베이터에 탄 사진을 찍어 보냈다. 다음엔 정종이랑 오뎅을 먹자고 했는데, 목련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밤이어도 좋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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