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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센트 반 고흐
    무대를보다 2018. 2. 8. 21:24

        


       2017년 마지막 날, 남희언니를 만났다. 우리는 한때 사무실에서 매일 보는 사이였는데, 이제는 일년에 두세번씩만 보고 있네. 그래도 작년에는 세 번 봤다. 원래 마지막 날 만나 이소라 공연을 보려고 했는데, 늦장을 부리다 좌석을 놓치고 말았다. 매진이 된 이소라 공연을 뒤로 하고, 뭔가 함께 볼 수 있는 공연을 찾다가 선우정아가 음악감독이고, 고흐 이야기니까 좋을 것 같았다. 언니와 신당동에서 만나 떡볶이를 먹었다. 언니가 맥주 할래? 라고 물었고, 나는 지금 못 마셔요, 라고 했다. 그동안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말에도 생명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말들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 말을 한 사람, 그때의 장소, 그때 공기의 흐름, 그 사람의 표정. 시간이 지날수록 울림이 커지기도 한다. 얼마 전 B의 말도 그랬다. 이제 집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 되었다는 말. 나는 그 말을 곱씹고 곱씹었다. 혼자 있을 때도 그 말을 떠올리고 혼자서 고개를 몇번이나 끄덕였다. 2017년 마지막 날, 언니는 이런 말을 했다. 이런 말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덕분에 힘이 난다고. 공연값을 물어보는 언니에게 나는, 공연값은 됐다고, 지난 한해 열심히 살아온 언니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라고, 말해줬다. 언니에게 나의 그 말이 깊게, 그리고 넓게 퍼졌으면 좋겠다. 언니가 예전만큼 강하게 빛났으면 좋겠다. 


       언니는 선물이라며 고흐의 자화상이 그려진 검은색 에코백을 사줬다. 두 개 사서 하나씩 메고 다니자고 했다. 우리는 공연 전에 마주보고 커피를 마셨다. 내가 요즘 에스토니아 맥주가 유행인 모양이라고, 탈린에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언니는 지난 핀란드 여행 때 갔었다며 사진들을 보여줬다. 언니가 보여준 사진에 중세를 그대로 재현한 맥주집의 결코 맛있어 보이지 않은 뭉툭한 맥주잔이 있었다. 맛있었어요? 라고 물어보니, 역시나 언니의 대답은 아니. 언니의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탈린에 더 가고 싶어졌다. 언니는 내게 사람을 그냥 있는 그대로, 너무 체크하지 말고 만나보라고 했다. 아,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공연을 보고 (사실 조금 졸았다. 나는 요즘 회사에서도 자주 꿈뻑하고 졸아서 깜짝 놀란다), 고흐의 밤이 새겨진 마스킹테이프랑 고흐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선물할 책갈피를 샀다. 언니는 마스킹테이프는 뭐할 때 쓰는 거니? 하고 물었다. 언니는 무슨 말을 하든 먼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준다. 편지봉투에도 붙이고, 장식하고 그런 데에 쓴다고 말하고, 새해엔 언니의 새 집에 꼭 편지를 써야지 생각했다. 언니는 5분도 걸리지 않는 신당역까지 나를 데려다줬다. 한때 우리 둘은 이 차를 타고 파주까지 가서 클래식 음악을 들었는데. 그때 언니는 초보 딱지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다는 생각을 했다. 


       서른 아홉이나 마흔이나 체감하기에 비슷한 것 같아요, 나의 말에 절대 다르다며 어른들이 왜 자기 나이를 몇학년 몇반으로 말하는 지 이해할 수 있겠다고 언니는 말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창문 너머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먼저 살아보고 마흔이 어떤지 말해줘요.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마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언니가 그래, 하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능숙하게 운전을 하며 내게서 멀어졌다. 언니의 마흔은 괜찮을 것이다. 아니, 좋을 것이다. 많이 좋을 것이다. 고흐가 살아보지 못한 서른아홉과 마흔을 우리는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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