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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토와 독일할머니
    모퉁이다방 2017. 12. 26. 23:06



       연휴 이틀 동안 XTM에서 <또 오해영>을 연속방송해줬다. 일요일에 우연히 발견하고 종일 보고 있었다. 케이블이라 광고가 길어서 광고 할 동안 마트에 다녀오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했다. 다시 봐도 좋더라. 오해영이 잔디밭에 가만히 앉아 울적한 마음을 지워보려 애쓰는 장면. 해영이는 주문을 왼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행복한 것을 떠올려보아요." 에릭이 여자 혼자 사는 티 내지 말라며 현관 앞에 자신의 커다란 구두를 무심하게 가져다 놓던 어떤 밤의 기억. 오늘 나는 오해영의 주문을 생각해냈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행복한 것을 떠올려보아요. 커다란 구두 같은 로맨틱한 기억은 최근에 없으므로, 어제 오후 친구와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 오후를 떠올렸다. 우리는 이대역에서 만났다. 반대 방향으로 타는 바람에 걸어가도 충분한 거리에 오천원 넘는 택시비를 지불했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해 담백하고 건강한 두부요리를 따뜻하게 먹었다. 나는 그간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줬는데, 친구가 재미있어 해서 기분이 좋았다. 두부집에서 오래 있었고, 같이 많이 웃었다. 합정까지 전철을 타고 와 나는 남색 운동화를 사고, 친구는 하얀색 목티를 샀다. 커피집에 커피를 마시러 갔고, 오래되고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를 두서없이 두런두런 나눴다. 친구가 선물해준 교토 책을 다 읽었다고, 나중에 나이가 들면 내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카페 같은 걸 하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고 하니, 친구는 그럴려면 니 건물이어야 해, 라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다. 가지 못한 강릉의 바다 이야길 했고, 언젠가 가게 될 교토의 백만원짜리 료칸 이야기도 나눴다. 가고 싶은 제주도의 근사한 숙소 이야기도 했다. 우리는 오래 만나지 못했는데, 서로에 대한 소소한 것들을 꽤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고마웠다. 친구는 책을 두 권 더 추천해줬는데, 오늘 그 책들을 기억해봤다. 교토에서 한달동안 머물며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쓴 남자의 책과 퀴즈쇼에서 우승을 한 뒤 그 상금으로 한달에 한도시 살기의 꿈을 실현한 독일 할머니의 책. 그 분의 글도 역시 편지란다. 언젠가 우리도 한 도시에서 한 달 정도 살아볼 수 있을까, 어느 작은 지방도시에서 그러면 어떨까 상상해봤다. 생각만 해도 좋더라. 특별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한 달. 헤어지고 친구는 즐거운 크리스마스였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친구가 보고 싶었다던 영화를 선물로 보냈다. 조용한 시간에, 조용히 보라고. 분명 좋을 거라고. 오늘은 마음이 좀 힘들었는데, 어제의 고요한 기억이 오후를 버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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