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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닷새
    모퉁이다방 2017. 12. 22. 07:54



       닷새동안 침대 두 개가 들어가고 조금 남을 만치의 공간을 온전히 가졌다. 침대는 하나였고, 앞과 옆으로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침대에 앉아 오른쪽의 커튼을 치면 창문이었다. 창가에 손에 자주 닿는 물건들을 놓아두고 썼다. 수첩과 펜, 책과 립밤, 휴지와 이어폰, 엽서와 물통. 첫 날은 동생이 함께 왔고, 다음 날에 동생과 엄마가 왔다. 다음 날에는 친구들이 와주었다. 그 다음 날엔 혼자였다. 밤에 동생이 퇴근을 하고 와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가줬다. 마지막 날엔 아침밥을 먹고, 책을 읽다가, 옷을 갈아입고, 원무과에 가서 정산을 하고, 퇴원증을 간호사에게 건네주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지난 두어달 겁이 났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도 있었지만, 담아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닷새 동안은 편안했다. 밥을 먹지 못할 때는 먹고 싶은 것들을 적어 내려갔다. 몽글몽글 스크램블, 잘 구워진 소고기, 아삭아삭한 양배추에 된장, 해물이 들어간 보글보글 된장찌개, 함께 먹는 샤브샤브, 밤의 피크닉에 나온 쑥팥떡. 모두들 친절했다. 마지막 날이 되자 아쉬울 지경이었는데, 소등이 된 뒤 쥐도새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꿀잠과 새벽 일찍 일어나 조용히 화장실을 다녀와서 독서등을 켜고 했던 새벽독서의 따스한 분위기가 그리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아침이 가까워지고 의사 선생님이 회진을 돌았다. 미소를 지으며, 어떠세요? 라고 물었고, 나는 매번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마지막 날에는 선생님이 이렇게 일찍 일어나 책 읽고 있어요? 라고 이야기해주셨다. 무통주사 때문인지 별로 아프지 않았고, 하루하루 기력이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그제보다 어제가 나았고, 어제보다 오늘이 나았다. 선생님은 그럼 우리는 1월에 봐요, 라고 올해 마지막 인사를 했다.


       어제는 퇴원을 무사히 하고 오후에 집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무사히 끝난 것이 고맙고 감사했다. 많은 것들이 생각나면서 눈물이 막 쏟아졌다. 혼자 가만히 울었다. 몸의 털을 정성스럽게 밀어준 조무사 분은 수술실로 갈 때 긴장하지 말라고, 절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러 번 말해주셨고, 담요를 목 아래까지 꼭 덮어주셨다. 수술실에서 주치의 선생님은 일부러 얼굴을 보이며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말해주셨다. 회복실에서 들리던 목소리도 생각이 난다. 엄마와 동생은 수술을 하는 동안 내 몸에서 나온 혹을 봤는데, 그리 크지 않더라고 말해줬다. 수술 다음 날에는 바로 걸을 수 있어 조무사에게 부탁해 시원하게 머리를 감았는데, 머리가 젖어 있으니 간호사가 커튼을 열더니 머리 감으셨네요, 라고 웃어주었다. 하루동안은 수액과 무통과 한몸이 되어 걸어다녔다. 그 무게를 기억해본다. 곤히 자고 있으면 새벽에 간호사가 핸드폰 플래쉬를 조심스럽게 밝히며 들어와 체온과 혈압과 수액을 체크해줬다. 친구는 제주 마을이 담긴 엽서와 출근할 때 이쁘게 입고 가라며 꽃이 새겨진 파란색 스웨터를 선물해줬다. 엽서는 창가에 꽂아뒀다. 또 다른 친구는 택시비 하기엔 너무 많은 돈을 쥐어주며 퇴원할 때 꼭 택시 타고 가라고 적어줬다. 엄마는 당일에 올라와 당일에 내려갔는데, 용돈과 먹을 수 있게 되면 먹으라며 과자와 두유를 남기고 갔다. 매일매일 안부를 물어봐주던 사람들이 있었고, 병원에 있는 동안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었다. 눈이 엄청나게 왔는데, 내다보기만 하니까 실감이 잘 나질 않았다. 엽서를 세 장 썼고, 책을 세 권 읽었다. 친구는 교토의 책을 선물로 주고 갔고, 나는 다 읽은 온다 리쿠의 책을 집으로 가는 친구에게 주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늘 조용히 와서 조용히 말하고 병실을 나갔다. 나흘 내내 짙은 남색 패딩을 항상 입고 계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먹지 못하던 시간과, 먹기 시작한 시간, 걸어본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고민하다가 이 곳은 잊지 않으려고 쓰는 곳이니까, 집에 와 하룻밤을 보내니 그 시간들이 내 기억 속에서 금세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이 곳에 그 시간들을 남겨둔다. 친구는 오래 전 같은 병원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 시간을 기억해두기 위해 병원에 있는 내내 함께 했던 팔목의 팔찌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단다. 나도 집에 와서 내 이름과 나이, 의사 선생님 이름이 함께 적힌 팔찌를 가위로 잘라 투명한 테이프로 붙여서 지갑 속에 깊이 넣어뒀다. 다가오기 전에는 안 왔으면 좋았을 시간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경험해보니 (이렇게 말해도 될까) 좋은 시간이었다. 앞으로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고마운 마음을 잊지 말고 언젠가 꼭 갚아야 된다고도 생각했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노력하고 싶다는 생각도. 읽던 책에 피천득의 문구가 인용되어 있었는데, 너무 좋아 여러 번 읽었다. 그리고 피천득의 수필을 주문했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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