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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행
    극장에가다 2017. 12. 17. 09:14



        지난주는 유난히 추워서 고민을 했었다. 영화가 끝나고는 추위를 뚫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초행>은 7년을 사귄, 동거를 하고 있는 남녀가 각자의 집으로 '함께' 가는 이야기이다. 여자의 집에 가는 남자는 익숙하다. 여자의 집은 부동산 투자에 열성인 어머니 때문에 잦은 이사를 하고 있다. 이번에는 새로운 집으로 간 거지만 남자는 여자의 부모님을 대하는 게 익숙해보인다. 부모님은 돈도 직장도 아직 불안한 두 사람을 걱정한다. 여자는 자신들을 닥달하고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 엄마가 짜증나고 서럽다. 여자는 남자의 집에 처음 간다. 남자는 자신의 집을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환갑을 맞아 함께 속초로 가게 된다. 여자는 술에 취해 욕설을 내뱉는 남자의 아버지, 견딜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게 지옥이었다는 남자의 어머니와 마주한다. 괴로웠던 밤이 지나고, 차에서 밤을 지새운 여자의 앞에 남자가 나타난다. 애교를 부리며 미안했다고 너무 추우니 문을 열어 달라고 한다. 지난 밤,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온 남자에게 여자는 돌아가자고 했다. 이렇게 나와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남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돌아가고 싶으면 혼자서 가라고 화를 냈다. 결국 두 사람은 떠오르는 해를 마주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남자의 어머니와 남자의 형과 함께 소박하지만 따뜻한 아침밥을 함께 먹고 서울로 돌아온다. 어머니는 괜찮다는 여자에게 기어코 용돈을 안겨준다.


       나는 이 영화가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 괴롭다는 누군가의 평을 보고서 볼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역시 보고 싶은 건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고 보는 것이 최고라는 결론을 다시금 얻었다.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집에서 먼저 도망쳤지만, 이를 타박하거나 먼저 도망치자고 강요한 사람은 상대방이 아니었다. 상대는 잘 되진 않지만 상대의 집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나는 그 모습들이 좋았다. 여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닮고 싶어하지 않는다. 여자는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절대 닮고 싶어하지 않는다. 남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여자에게 항상 애교섞인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 대답을 한다. 두 사람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이 부분이 좋았다. 삼십대 후반이 되어도 자신의 못난 부분을 어린 시절 탓을 하며 합리화시키려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게 얼마나 못나 보이는지 새삼 깨달았더랬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만.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가정사가 있고, 그걸 탓하기보다 극복해 나가는 것이 좋은 어른이 되어가는 길이라는 걸 끊임없이 떠올리고 있다. 영화 속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응원하게 되더라.

       어제는 미용실에 가서 <초행>의 김새벽 머리를 보여주며 이렇게 잘라주세요, 라고 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머리 잘랐냐고 이상하게 잘랐네, 했지만 나는 김새벽의 단정한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엔 김새벽과 조금은 다른 머리가 되었지만. 여자가 남자의 집에 가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있던 모습과, 남자의 아버지가 소리치기 시작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테이블 정리를 하기 시작하던 그 얼굴이 계속 생각이 난다. 어머니와 형과 함께 아침밥을 먹을 때 김을 꾸욱 싸먹던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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