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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코 하코다테
    여행을가다 2017. 9. 19. 22:22

















       오늘 같이 흐리고, 또 비가 쏟아지는 날씨였다. 올 여름 나흘 동안 머무른 하코다테의 날씨가 그랬다. 비가 왔다 그쳤고, 흐렸다가 다시 비가 왔다. 맑은 하늘은 떠나는 날 잠시 보았다. 하코다테를 처음 간 건 친구와 함께 간 홋카이도 패키지 여행에서였다. 패키지 답게 홋카이도의 핫 스팟을 거의 다 찍었다. 서양식 건물들이 많은 모토마치 거리를 가이드와 패키지 일행들과 함께 걸었고, 세계 3대 야경이라는 하코다테의 야경을 보러 버스를 타고 올라가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그때 연락을 하고 지내던 아이에게 야경 사진을 보내줬는데, 하코다테라는 이름이 참 이쁘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아이인 줄 알고 있었다. 작년에 삿포로에 갔을 적에는 오도리 공원으로 걸어가던 중에 커다란 건물 위에 걸려 있는 하코다테 그림을 봤다. 내가 친구에게 이게 하코다테다, 라고 하니 친구가 언젠가  같이 가자, 라고 했다. 그렇게 이듬해 우리는 하코다테에 왔다.


       숙소가 내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뒤로 더 엄선해서 숙소를 고르고 있다. 너무 비싸면 안되고, 창문이 꼭 있어야 하며, 열리는 곳이 좋다. 테라스가 있으면 그건 무조건 합격이다. 하코다테에서 그런 곳을 찾았다. 관광지와 조금 떨어져 있어 이동하기에 불편하다는 평이 있었지만, 거의 모든 평이 만족스럽다, 였다. 어차피 하코다테라는 도시 자체가 작아서 괜찮을 것 같았다. 


       첫날 치토세 공항에서 인포메이션 직원이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쓰게 될 총 교통비를 긴 시간동안, 아주 친절하게 계산해줬다. (물론 우리가 물어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날 JR패스를 타러 삿포로 역에 가보니 그녀의 계산이 틀렸다. 이동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패스보다 일반 표를 각각 구입하는 게 훨씬 쌌다. 역무원은 짧은 시간에 우리의 계산이 틀렸다는 걸 계산기를 두드리며 보여줬다. 지정석, 비지정석, 만석, 출발시간, 도착시간 등 점점 말이 통하지 않자 인상을 쓰기 시작하던 역무원에게 표를 각각 다섯 장씩 받아들고 기차를 타러 갔다. 자유석이라 자리를 확보해야 하는데, 지정석 줄에 서있다가 뒤늦게 자유석 줄에 합류했다. 자리를 잡고 앉아선 제일 먼저 팜플렛에 있는 에키벤 메뉴부터 훑어봤다. 낮시간이고 아무 것도 못 먹은 터라 엄청 배가 고팠다. 그런데 기차가 출발하고 1시간 쯤 지나자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맙소사, 자유석 통로에 좌석에 앉지 못한 사람들이 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카트가 지나갈 자리가 없다구. 우리는 4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야 한다구. 도시락도 없고, 맥주도 없다. 결국 친구가 지갑을 달라고 했다. 오지 않는다면 찾아가보겠어. 친구의 부재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친구의 성공을 확신했다. 친구는 통로에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아주 당당하게 에키벤 두 개와 맥주 네 캔을 들고서. 밥도 먹고, 맥주도 마시고 나니, 통로의 사람들도 어느새 빠져 나갔다. 맞은편 창가에 바다가 나타났다. 돌아올 때는 방향을 기억해뒀다가 앉자, 라고 말하며 건너편 바다를 봤다. 바다가 철도 가까이 있어, 아니 철도가 바다 가까이 놓여 있어, 건너편에서 보아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렇게 하코다테에 왔다.   


       구글 지도를 검색해보니 10분 조금 넘게 걸린다고 해서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보기로 했다. 역 바로 앞에 가든 비어 페스티벌을 한다는 포스터가 있었다. 광장 한 켠에 준비 중인 가판대들이 있었다. 삿포로에서 시간이 늦어 맥주 축제를 놓친 터라 나중에 와보자고 했다. 그렇게 역에서 숙소까지 쭉 직진을 하면서 생각했다. 하코다테는 바람이 세고, 조용하고, 한적하구나. 도착하고 보니 이런 곳에 머물고 싶었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하도 세서,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에 있을 것이 분명한 바다가 느껴졌다.


        숙소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내려다보이는 풍경도 좋았고, 일본의 숙소라 믿을 수 없이 넓었고, 화장실의 욕조도 문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번화가와 떨어져 있긴 했는데, 그래서 저렴했던 것 같다. 커튼을 치고 테라스로 나가니 양 옆으로 바다가 펼쳐졌다. 오른쪽을 봐도 바다, 왼쪽을 봐도 바다였다. 여기 있었네, 바다가. 여행을 하며 나도 모르게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던 나쁜 마음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물론 그 아이들은 재생력이 뛰어나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여행하는 동안 이 공간에 좀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그러진 못했다. 여행을 왔으니 돌아다녀야 했고, 친구는 바깥에서 가능한 오래 시간을 보내길 바랬다. 각자의 시간을 가져볼까 했지만, 그 이야길 좋지 않은 순간에 꺼내서 정말로 그렇게 해버리면 둘다 마음이 상해버릴 것 같았다. 결국 그러고 난 뒤에 함께 야경을 보러 산에 올라갔던 일도 좋았고 (얼어 죽을 것 같이 추워 암흑 속에서 이어폰으로 90년대 가요를 들으며 춤을 춰댔다), 다음 날에 멀리 가 자전거를 탔던 것도 좋았으며 (공원이 너무나 넓어 힘들었는데, 체력이 약하다며 평소에 운동을 좀 하라는 친구의 말에 벌컥 짜증을 내버렸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세계 음악 춤 축제를 구경했던 것도 (세일러복장을 한 일본 아저씨가 원맨쇼를 하는 것을 보다가 재미없다고 나와버렸는데, 친구 말로는 제일 마지막에 그 전에 할 것처럼 하다가 계속 하지 않던 묘기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다) 좋았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짧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우리는 이 숙소에서 각자의 침대를 정했고, 세 번의 밤을 보냈고, 세 번의 아침을 맞았다. 작년 삿포로에서 사두었다가 다 쓰지 못한 입욕제를 친구가 가져왔고, 그걸 세 번 정도에 나눠서 썼다. 매일 아침, 전날 마신 맥주로 배에 가스가 가득 찬 채로 조식을 잔뜩 먹었으며, 매일 재료를 달리 하며 나왔던 냉스프가 무척 맛있어 서울에서 레시피를 찾아 해봤는데 전혀 그 비슷한 맛도 나지 않았다. 추억의 음식으로 자리잡을 듯 하다. 매일 밤 마실 캔맥주를 냉장고에 잔뜩 넣어뒀으며, 친구는 이틀은 마시지 않을까 싶었던 양을 하룻밤에 해치우기도 했다. 나는 저질 체력을 뽐내며 맥주를 많이 마시지 못하고 일찍 잠이 들어 친구를 실망시켰기도 했고, 어느 날은 조금 토라진 것 같은 친구가 먼저 잠이 들기도 했다. DVD 플레이어가 있다기에 서울에서는 거의 틀 일이 없는 DVD를 한.중.일로 엄선하여 세 개 챙겨왔는데, 일본은 재생 자체가 되지 않았고, 중국은 내 저질체력 때문에 친구 혼자 보았고, 한국만 둘이 끝까지 보았다. 간만에 만난 와니와 준하는 여전하더라. 들어가 살고 싶은 와니의 이층 집도 여전하고. 하코다테에 온 첫 날 친구는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며 꽃을 사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마지막 밤에는 꽃과 스탠드를 테라스에 들고 나가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셨는데, 너무 추워 목욕 가운까지 걸치고 있었다. 결국 얼마 못 가 안으로 들어와 버렸지만. 팔월 초순에 그 정도의 추위라니. 하코다테 바다여. 그 밤을 떠올리면 코 끝이 기분 좋게 얼얼해진다. 주방이 있어 계란말이도 해 먹고, 햄도 구워 먹고, 치즈도 녹여 먹었다. 인스턴트 나폴리탄도 해 먹었다. 계란 후라이도 얹어서. 아무 것도 든 게 없는 인스턴트 카레 우동은 친구 혼자 먹었는데, 내 맛도 니 맛도 아닌 맛이라 했다. 깔끔한 친구는 세제가 없는데도 매일 깨끗하게 설거지를 했다.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이 곳을 떠올리면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이것만 생각나면 될 것 같다. 테라스에 나가 오른쪽을 봐도 바다, 왼쪽을 봐도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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