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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목 바이 골목
    서재를쌓다 2017. 5. 7. 22:57





       연휴 첫날, 앞으로의 3일을 알차게 보내보겠노라고 일찍 일어나 조조영화를 보러 갔더랬다. <나의 사랑, 그리스>였는데, 동생이 말한대로 영화는 제목만큼 밝지 않았고,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기까지한 우리의 IMF 생각이 났다. 동생은 그때 엄마가 휴지를 사주지 않아서 예전에 엄마 가게에서 쓰려고 만들어놓은 냅킨을 일일이 펴서 일을 봤었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그 시절 혼자 서울에서 흥청망청 산 것만 같아 미안했다. 우리는 이제 그 이야기를 하며 조금은 웃을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의 그리스는 어떨까,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영화를 보고 생각해봤다.


       영화를 보고 나와 걷는데, 너무 더웠다. 아직 겨우 5월인데, 벌써 한여름이 성큼 온 것만 같았다. 결국 걷다가 뭔가 시원한 걸 마셔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가게를 지나고, 늘 지나면서 궁금했던 맥주가게 앞에서 망설였다. 이제 오픈하시는 것 같은데. 용기를 내서 들어가서 안주 없이 맥주만 마시고 가고 되겠느냐고 물었다. 주인 아저씨가 그럼요, 라고 말했다. 나는 카스 생맥주를 한잔 시켰고, 이층에 올라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불광천을 걸을 때마다 언젠가 저 2층에 앉아 맥주를 마셔보리라 생각을 했던 장소였다. 그러니까 연휴 첫 날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와 진정한 낮맥을 했다는 이야기. 맥주가 들어가니 알딸딸해지는데, 2층 열어놓은 창밖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래, 나는 카스 생맥이면 되는 사람인 것이다. 취기가 오르고 바람이 불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 최고가 되는, 쉬운 사람인 것이다. 아, 좋았다. 한 잔 더 마시고, 읽던 책도 다 끝내고 나와서 집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남은 이틀은 미세먼지 핑계대고 집안에서 뒹굴대면서 티비를 보고 잠만 자댔다는 이야기. 아, 시간을 돌리고 싶다. 김종관 감독의 <골목 바이 골목>은 아쉬운 구석이 많은 산문집이었다. 물론 저때 맥주 마시면서 읽을 때는 최고였다.

    *

       인파에 몸을 실을 때도 있지만 집으로 가기 위해 그 풍경을 벗어나냐 할 때가 있다. 데이비드 린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군중들을 역류하자면 나란히 걸을 때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단지 몸의 방향을 바꿨을 뿐임에도 순간 나는 외지인이 된다. 거주지에 있지만 관광객이 된 듯한 시선으로 행진에 압도된 채 군중을 가로지른다. 수많은 얼굴들이 다가온다. 표정들이 다가온다. 끊임없이 스쳐가고 나는 너무 많은 얼굴을 본다. 내가 아는 얼굴, 혹은 나를 아는 얼굴이 다가올 수도 있다. 나는 갑자기 그 많은 얼굴들을 볼 자신이 없어진다. 큰길의 차도를 걷다가 가장자리로 간다. 좁게 이어진 골목들을 타고 집으로 갈 요량으로 대로를 벗어나 보지만 골목 입구에는 의경들이 진을 치고 있다. 저 조용한 골목의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의경들에게 내가 이곳의 거주인임을 증명해야 한다. 나는 함성 가득한 그곳에 서서 의경들로 메워진 골목의 입구를 지나기 위해 지갑 속 신분증을 꺼냈다.
    - p. 60

       얼마 후 사진을 현상해보니 사진 안에는 밀랍 신사의 표정도 그가 보던 사진도 없었다. 찍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담지 못한 실패한 사진이었다. 하지만 더러 실패한 사진도 이야기를 한다. 그들과 나 사이의 먼 거리를, 액자 너머의 세상을 보는 그들보다 더 먼 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를, 같은 장소에 있음에도 경계면 너머에 이를 수 없었던 그곳에 대한 기억을.
    - p. 89-94
     
       (...) 우리는 별말 없이 걸었고 때로는 많은 말을 하기도 했다. 흑해 너머에는 터키가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 앞에서 우리는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 길을 말수 없는 그 소년과 걷다 보니 문득 끝없는 외로움에 익숙해지고 그럭저럭 잘 견뎌낸 한 사람의 표정이 보였다. 좋은 계절에 있지만 머물지 않는 사람들의 산책 속에서, 머물고 있지만 가장 먼 곳까지도 갈 수 있는 그의 외로움이 멋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 p. 133-136

       내가 섬에 머물렀던 날에는 해질 무렵부터 많지 않은 비가 내렸다. 관광객들을 위한 거리는 텅 비고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몇 개의 선술집에만 등이 달려 있고 마을 사람들과 료칸에 하루 묵어가는 손님들만 남는다. 취한 연인들이 술집에서 나와 숙소를 찾는다. 하루를 머물고 하루라는 시간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그다지 갈 데 없는 거리를 반복해서 걷는다. 누군가는 고급 료칸을, 누군가는 주머니 가벼운 여행객을 위한 작은 료칸을 찾는다. 맥주 한 잔에 적당한 산책을 하고 주머니 가벼운 나를 위한 료칸에 들어가 내가 머무는 섬과 그 너머의 바다와 그 너머의 도시를 보았다. 바람결에 어디선가 대나무 풍경이 노닥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길 끝에서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번지고 사그라졌다. 여행객을 가워 놓은 섬은 비밀스럽다. 밤이 지나고 나는 작은 소란이 들리는 방 안에 누워 가로등 불빛이 스며든 천장을 보았다. 세 시간의 거리, 하지만 제법 먼 곳에 숨어들어 여행의 첫날을 맞이했다. 작은 섬, 작은 방에, 완전히 갇힌 채로.
    - p.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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