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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쇼코의 미소
    서재를쌓다 2016. 10. 30. 16:48





       마음이 가을 같다. 갑자기 스산해졌다. 계속 헤매고 있는데, 출구가 어딘지 모르겠다. 무리 속에 끼여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다가 헤어지면 마음이 더 가을 같아진다. 사실 무리 속에 있을 때도 온통 가을 일 때도 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어떻게 출구를 찾아야 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시월.


       목요일에는 회사 모임이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Y씨랑 백석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 아저씨가 창을 내려줬는데 밤바람이 시원했다. 내가 먼저 내렸다. Y씨는 택시를 계속 타고 갔다. 역 앞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데, 내 앞으로 양복을 입은 외국인이 걷고 있었다. 뽀글뽀글한 컬에 까만 피부를 가진 외국인이었다. 백팩을 메고 있었고, 한 손에 하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야식이거나 다음날 아침일 것이다.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새 구두인건지, 오늘 하루가 힘들었던건지 걸음이 조금 어긋나 있었다. 나는 그의 걸음걸이에 의지해서 걸었다. 어쩐지 우리가 같은 방향일 것 같았는데, 정말 그랬다. 그가 오피스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뒤따라오는 나를 보더니 유리문을 잡고 기다려줬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에게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어디서 왔는지, 한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결국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까딱이며 먼저 내렸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잡고 올라가는 짧은 시간동안에도 세심한 행동으로 나를 배려해줬다. 어쩌면 오래 보아오고, 오래 얘기해온 사람들보다 (얘기를 나누었다면) 그와의 대화가 요즘의 나를 더 위로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쇼코의 미소> 작가와의 만남 시간이 생각났다.


       시월의 어느 날, 나는 백석의 책방에 앉아 최은영 작가를 기다렸다. <쇼코의 미소>는 올해 내가 읽은 한국소설 중에 제일 좋았다. 최은영 작가는 쑥스럽고 긴장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연을 해야한다는 말을 듣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하지 못해 고민을 하다 써 왔다면서, 써온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종이에는 작가의 대학교 시절 이야기가 있었는데, 소심했고 자존감이 낮은 시절의 이야기였다. 작가가 써온 이야기를 모두 듣고, 책방에 온 독자들과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한 독자가 말했다. 다행이라고. 소설을 읽고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고, 방금 종이에 써온 이야기를 듣고나니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그러면서 작가에게 고맙다고 했다. 자신이 만나 본 작가 중에 소설과 다른 사람들이 많았다면서. 정말로 그녀는 자신의 소설을 닮은 사람이었다. 따뜻하고 배려심이 있는 사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좌절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믿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의 매력을 느끼는 사람,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 내가 그 날 받은 느낌이었다.

       나는 이 소설집에서 '한지와 영주'가 제일 좋았는데, 어떤 독자가 질문을 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보다 영어가 타국어이면서 영어로 소통하는 사람들이 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이해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작가는 실제로 그런 경험들을 해 보았다고 했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더 잘 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통하기 위해서 아주 유창할 필요도 없다고. 단순한 말이, 표정과 몸짓이, 가슴을 파고들었던 경험이 많았다고. 그리고 아는 척하면서 글을 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전경린의 말을 인용하며 내가 살아보지 않은 나이에 대해서 쓰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영주처럼 실제로 유럽의 수도원에서 2개월동안 생활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힘들었던 시절, 몰타에서 9개월을 생활했는데 그 시절이 자신을 버틸 수 있게 만들었다고 했다. 지금 책이 이렇게까지 잘 팔리는 일이, 기적과 같다고,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다고 했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 <최악의 하루>에서도 마지막 장면에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내내 불통했던 주인공이 가을이 만발한 남산의 밤길에서 아침에 잠깐 만났던 일본인 작가를 만나, 아주 간단한 말들로 소통하고 위로받는 장면. 어제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맥주를 마셨다. 누군가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라며 게임을 제안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나씩 돌아가며 말하는 것이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다고 말했고, 요리를 잘한다고 말했다. 끈기는 없지만 호기심이 많다고도 했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졸라 잘 부르며, 똑똑하다고 말했다. 고맙게도 어릴 때 부모님에게 사랑을 아주 많이 받았다고도 말했다. 취한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두번째 만나는 거였는데, 첫번째 수업 때 굉장히 사나워보이고 세 보였던 사람과 실제로 얘기해보니 다정한 사람이었다. 사람들과 헤어지고 버스를 탔는데, 술 기운에 살짝 조는 바람에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났다. 덕분에 추운 날씨에 몇 정거장을 걸었다. 그 길이 내 마음 같았다.

       아무래도 가을을 심하게 타고 있는 것 같다. 이번주에는 야근을 여러번 했고, 멀리서 여행 중인 친구의 엽서를 받고 스위스에 있는 도서관을 검색해봤다. 머리를 짧게 잘랐고,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틀어놓고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시월의 주말이 끝나지 않길 바라며 일요일을 조용히 보내고 있다. 다음 주에는 자주 걸어야겠다. 강아솔을 들어야겠다.





       한지와 우연히 마주치면 배와 등의 피부가 따끔따끔했고 피가 머리쪽으로 쏠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고, 자꾸 말을 더듬게 됐다. 한지가 멀리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종아리부터 목뒤에까지 불이 번지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지질시대 구분표를 생각했다.
       나는 중학교 일학년 때 선물로 받은 지질시대 구분표를 벽에 붙여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려가길 좋아했었다. 나중에는 당시 살았던 생물들의 이름을 시대별로 차례대로 외웠고, 고등학교에 입할할 때쯤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할 수 있었다.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는 분명 존재했던 것들의 이름이 소중하게 느껴져서였다.
       원시지구.
       원시지구에는 어떤 생물도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검은 칠판을 상상했다.
       시생대.
       박테리아와 남조류, 고세균류가 등장했다. 백묵의 끝으로 그린 작은 점들.
       원생대.
       해파리가 나타났다. 몸속이 환히 보이는 투명한 해파리들.
       캄브리아기.
       조개와 산호, 삼엽충.
       오르도비스기.
       불가사리와 바다전갈로 불리는 생물, 사라져버린 코노돈트.
       실루리아기.
       달팽이, 대합, 홍합, 턱이 없는 어류들.
       나는 기도문을 외우듯이 그것들의 이름을 나열할 수 있었다. 턱이 있는 어류, 페어, 육지 달팽이, 해백합, 파충류 같은 포유류, 소철류, 시조새, 원시 현화식물. 그 이름들을 속으로 외울 때면 바깥 세계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고, 내 안의 생각과 느낌들이 무뎌졌으며, 나라는 존재가 조금은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어디에서든, 어느 시간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슬플 때, 불안할 때, 화가 날 때, 누군가가 내 마음을 쥐고 흔들 때, 나는 그 이름들을 그저 간절하게 불렀고,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현실의 고통에서 나를 분리시켜줬다. '원시지구'로 시작해서 '여러 종류의 발굽이 있는 동물'까지 중얼거리고 나면,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의 이름을 불러준 것 같았다. 그럴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 '한지와 영주' p. 157~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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