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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묵
    서재를쌓다 2016. 8. 18. 23:09





       친구와 홋카이도를 가기로 결심하고, 홋카이도 책을 찾아봤다. 가이드북 말고 에세이. 책이 적었는데, 오지은의 홋카이도 여행기는 집에 있었고, 이 책이 궁금했다. <혼자가 아닌 시간, 홋카이도>. 평이 좋아서. 홋카이도의 겨울 이야기이긴 한데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 합정점 중고서점에서 샀다. 몇장 뒤적거리고 잊고 지내다 여행 가기 직전에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다. 소설가가 쓴 홋카이도 여행기였는데, 무척 감상적인 글이었다. 거기서 <침묵>을 소개 받았다.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서, 선교 활동 중에 붙잡힌 포르투갈 신부 로드리고는 배교를 강요받는다. 배교의 증명은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발로 밟는 것으로, 어찌 보면 허무하리만큼 간단한, 그러나 신앙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절차다. 성화를 앞에 두고 한참을 번민과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가 마침내 '자기 생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 온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 온 것, 인간의 가장 높은 꿈과 이상으로 가득 차 있는' 성화 위에 발을 올려놓은 순간, 로드리고는 자신의 발에 밟힌 얼굴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 p.289 문지혁 <혼자가 아닌 시간 홋카이도> 


       이 구절을 읽는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읽어야겠다, 싶었다. 알라딘에서 평을 찾아봤다. 어떤 사람은 '좋은 책입니다'라고 이야기해줬다. 어떤 사람은 '무교인 내가 아주 인상적으로 읽게 된 책'이라고 말해줬다. 이 책을 가지고 홋카이도에 가야겠다 싶었다. 새책이 아닌 적당히 낡은 책으로 읽고 싶었다. 누군가가 읽고 선명한 자국까지 남긴 책이 다행히 여행 전에 도착했다. 이렇게 한 권의 책과 나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원래 틈틈이 읽을 예정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이동하는 전철이나 기차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찍 들어와 씻고 침대에 누워서,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그렇지만 늘 그랬듯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쉬엄쉬엄 여행하기로 한 우리는 이틀동안 엄청나게 걸었으며, 커피집에도 두 번밖에 가질 않았다. 비행기에서 시작한 책은, 모든 첫만남이 그렇듯, 몇 장을 넘기지 못했다. 책에 푹 빠져들게 된 건 오타루에서 삿포로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였다. 전날도 그렇고, 그날도 엄청 걸었다. 핸드폰 건강앱의 '걸음'란에 이렇게 큰 숫자가 표시된 건 처음이었다. 뿌듯했지만, 그만큼 피곤하기도 했다. 30분 남짓의 시간동안 잠들고 싶었는데, 조명이 밝아 잠이 오질 않았다. (사실 나는 불 켜놓고도 잘 자지만;) 친구가 책을 꺼내길래 나도 꺼냈다. 피곤함을 견디며 몇 장 읽기 시작했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이야기에, 인물들에 순식간에 푹 빠져 들어버렸다. 그래서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몸을 담글 때도 몇 장 읽고, 친구가 씻을 때도 몇 장 읽었다. 아침과 밤에는 너무나 궁금했지만, 피곤해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눈꺼풀이 저절로 스르르 감겼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꽤 많이 읽었다. 돌아와서는 다음날 조조로 <나의 산티아고>를 봤는데, 영화를 보기 전에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읽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가까운 커피집에 들어가 커피를 시켜놓고 한참을 읽다 나왔다. <나의 산티아고>를 보면서는 소설 속 인물들이 계속 떠올랐다. 영화의 주인공 하페도 길을 걸으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신은 있는가. 신이 없다면, 이 길의 끝에 섰을 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 되는 건가, 하고. 소설 속 로드리고 신부 역시 끊임없이 묻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세상에, 이런 가혹한 일들을 당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인가. 왜 침묵만 하고 있는 것인가. 신은 없는 거 아닌가. 신이 없다면 이 많은 사람들의 순교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나는 신부인 그가 끊임없이 자신이 섬기는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좋았다. 무교인 내가 종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도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나 저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 바다의 단조로움이나 그 무서운 무감동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물론 만일의 이야기지만...'
       그때 가슴 한구석 깊은 데서 다른 소리가 속삭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이것은 무서운 상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무기둥에 묶여 파도에 씻긴 모키치나 이치소우의 인생은 얼마나 익살스러운 연극인가. 많은 바다를 건너 2년의 세월을 보내며 이 나라에 다다른 선교사들은 또 얼마나 우스운 환영을 계속 뒤쫓은 것인가. 그리고 지금, 사람의 그림자조차 산속을 방황하고 있는 나 자신은 얼마나 우스운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 p. 106~107 <침묵>

       그리고, 친구 아버지 장례식장으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그 문장을 읽었다.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게 만든 문장. 단 두 줄에 가슴이 쿵쾅거렸던 문장. 앞에 있는 문장과 뒤에 이어질 문장이 무척이나 궁금해서 책 한 권을 통째로 읽게 만든 문장.

       "형식으로만 밟으면 되는 거요."
       신부는 말을 들었다. 발이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 p. 267

       읽기 전에 찾은 평들이 맞았다. '좋은 책'이었고, '무교인 내가 아주 인상적으로 읽게 되었다'. 나는 로드리고가 믿는, 침묵하고만 있다고 원망하는 '신'에 다른 무언가를 넣어보았다. '로드리고'라는 사람에도 다른 사람을 넣어보았다. 수없이 배교를 하고,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자신은 그저 강하지 못한 사람일 뿐이라고 여러번 외쳤던 '기치지로'에는 '나'를 비추어 보았다. '기치지로'는 용감하지 못하고, 비겁하지만, 그를 무턱대고 욕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욕하지 못했다. 작가는 '기치지로'를 소설의 처음, 이렇게 묘사한다. "지금 저희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그에게 상당히 교활한 성격이 있으며 그 교활함이 이 남자의 연약한 마음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장에 연필로 밑줄을 그어뒀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나는 인간의 이야기로 이 소설을 읽어냈다.

       좋은 문장들도 많았고, 아파서 더욱 아름다운 묘사들도 있었다. 언제고 내가 좋아하는 당신이, 꼭 한번 읽었으면 좋겠다. 나를 <침묵>으로 이끈 홋카이도 여행기의 다음 문장은 이렇다. "하코다테의 어느 오래된 성당에서, 나는 그때 로드리고의 마음을 상상해 본다. 그의 발로 전해졌을 둔중한 아픔과, 신앙과 믿음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수수께끼를. 어디선가 내게도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 계획은 이렇다. 언제고 마음이 힘들어질 때 삿포로행 티켓을 사는 거다. 단, 그때가 겨울이어야 한다. 홋카이도에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 날아가 기차를 타는 거다. 삿포로에서도 내리지 않고, 오타루에서도 내리지 않고, 몇 시간을 쭉 달려 하코다테로 가는 거다. 바다로 보이는 창이 있는 따뜻한 숙소를 잡고, 따뜻한 모자를 쓰고, 따뜻한 장갑을 끼고, 두꺼운 어그 부츠를 신고 추운 밤거리를 걷는 거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곳에 들어가 따뜻한 음식도 먹는 거다. 춥긴 하겠지만 맥주도 한 잔 하는 거다. 그애는 나의 친구니까. 그리고 다시 숙소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씻고, 라디오나 티비를 낮게 틀어놓고 다시 <침묵>을 읽는 거다. 그때는 책이 더 너덜너덜해졌겠지. 그러다 잠들고, 다시 깨면 또 읽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엔 교회들이 가득한 모토마치를 조용히 걷는 거다. 교회 안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어 보기도 하고. 내게도 로드리고의 어떤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르지. 그가 스윽- 조용히 내 곁에 앉을 지도. 그도 그가 믿었던 신처럼 침묵하겠지만. 내가 알아들으면 되니까. 그런 겨울을 언젠가 꼭 보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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