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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요일의 기록
    모퉁이다방 2016. 6. 21. 22:38



       김중혁은 빨간책방 팟캐스트에서 <바닷마을 다이어리> 만화책 이야기를 하면서, 이 만화책은 무조건 사야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떤 책을 소유하고 있는 건, 그 책이 담고 있는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걸으면서 방송을 듣고 있었는데, 이 말이 참 좋았다. 그 책을 소유하고 있는 건, 그 책의 세계를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언제든 내가 원할 때 펼쳐볼 수 있는 세계. 이 크지 않은 신국판 즈음의 책에 내가 좋아하는 세계가 잔뜩 담겨 있는 것. 


       오늘 나는 회사에서, 10년차 카피라이터 김민철이 쓴 세계를 줄곧 생각했다. 나는 이 책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집에 가면 바로 그녀의 세계로 정확하게 빠져들 수 있었다. 퇴근을 하고, 1층의 쌀국수 집에서 사온 스프링롤을 먹고, 어제 먹다 남겨둔 오잉도 먹고, 우유도 한 잔 마시고, 손과 발과 얼굴을 씻고, 팩을 하고, 수분 크림을 바르고, 설거지를 하고, 방을 한번 닦고 난 뒤, 방에 몸을 바삭 대고 오늘 내내 그리워했던 세계를 불러냈다. 그 세계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리고 오늘 마음속에 계속 맴돌았던 말. 팔십팔페이지, 박웅현의 말.

     

       "민철아, 여기가 지중해야. 봐봐. 여기가 지중해야. 다른 곳에 지중해가 있는 게 아니야."

       "알아요. 팀장님이랑 같이 카뮈도 김화영도 다 읽었잖아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이 가을에, 이 은행잎에, 이 노란빛에, 이 비에, 이 술에. 여기가 지중해죠. 지금, 여기가. 알아요. 너무 잘 알아요."

       "그런데 왜 가려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요. 근데 가야 할 것 같아요. 정신의 지중해는 알 것 같은데, 육체의 지중해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잖아요. 저는 지중해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고요."

       "그럼 갔다 와. 회사는 그만두지 말고. 갔다 와."

       "아니 그게 아니라..."

       술을 마셨고, 가을이었고, 은행잎이 떨어지고 있었고, 노란 조명과 그 은행잎이 만나서 세상이 다 노랗고, 예뻤고, 선선했고, 기분이 좋았고, 젠장, 이곳이 지중해였다. 내가, 지금, 여기를 이보다 더 오롯이 살 수는 없는데, 지구 반대편에 지중해가 무슨 상관인 건가. 여기가 지중해인데. 내가 지금 좋은데. 팀장님 말이 다 맞았다. 그런데 나는 가고 싶었다. 동시에 안 가고 싶었다.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나는 흔들렸고, 팀장님은 잡았고, 갔다 오라고 말하고, 얼마든지 갔다오라고 말하고, 술은 맛있고, 나는 흔들 흔들 계속 흔들.

       그리고 나는 지중해로 가는 비행기표를 샀다. 있는 휴가를 다 끌어모르고, 토요일, 일요일을 있는 대로 갖다 붙였다. 3주 반, 그러니까 거의 한 달에 가까운 휴가가 생겼다. 모두 지중해에 쏟아부었다. 혼자서 카뮈의 무덤이 있는 남프랑스 루르마랭과, 김화영이 70년대에 유학을 했다는 엑상프로방스와 파리와 아를과 니스로 떠났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그만두지 않은 것이다. 결국 머물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결혼을 했다.

    - <모든 요일의 기록> p.88~89



       아, 내가 열살만 어렸음 좋겠다. 카뮈의 세계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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