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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 불어넣기
    서재를쌓다 2016. 6. 16. 21:59





       이 책의 본래 제목은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이었다. 나는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일 때 이 책을 샀다. 누군가 추천해 준 책, 이라고 기억한다. 아니면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해서 따라 읽은 책, 일 수 도 있다. 이 책을, 아니 정확히 말해서 단편 '혼 불어넣기'를 오키나와에서 다시 읽었다. 세상에, 오키나와에서 이 단편을 다시 읽다니. 나는 이 단편을 다시 읽기 전, 오키나와 북부 버스 투어를 했다. 우리는 뚜벅이었기 때문에 북부로 가려면 투어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투어에서 갔던 장소들은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지만, 버스 안에서 가이드에게 들었던 오키나와와 오키나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가이드가 말한 오키나와 사람들의 성향은 분명 일반화의 오류일 거다. 모두가 똑같을리가 없지. 그렇지만 나는 상상해봤다.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오늘을 즐기는 사람들, 날씨 때문에 출근을 하지 않는 사람들, 낮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들, 여러 번의 이혼이 흉이 아닌 사람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 바다는 뛰어드는 게 아니라 바라보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늘 밝고 긍정적인 사람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을 만든 역사적인 사건들. 나는 오키나와에 와서 오키나와에 대해 좀더 알게 되었다. 그 전엔, 이 책을 통해 오키나와를 알게 되었다. 메도루마 슌은 오키나와에 태어나, 오키나와를 사랑하고 아끼고, 오키나와의 이야기를 쓰는 오키나와 작가이다. 


       나는 오키나와의 바닷가에서 '혼 불어넣기'를 다시 읽었다. 남부의 모래가 가득한 바닷가이면 좋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키나와의 어두운 역사 중 하나인 미군기지가 있었던 아메리칸 빌리지의 아라하 비치에서 읽었다. 나는 둘이라고 말하고 둘의 값을 치르고 하나만 가지고 냉큼 나온 바보같은 외국인으로 넷째날 아침을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산 커피를 들고, 전날 저녁 봐두었던 공간까지 걸어갔다. 그곳은 내가 보기에, 아라하 비치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육지였다. 길이 있었고, 그 길의 끝에 자그마한 크기의 동그란 섬이 있었다. 그 작은 섬에 발을 디디면 온 사방이 바다였다. 오키나와의 커다란 구름이 더 가까이 느껴졌다. 섬의 한켠에는 바다를 바라보고 쭈그리고 앉아 줄담배를 피우는 센언니가 있었다. 나는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가지고 간 책을 펼쳤다. 그러자 몇 년 전 처음 만난 고타로의 혼이 내 옆에 슬그머니 다가와 앉았다.  



       우타는 그 나무로 다가가다가 그늘 밑에 옆모습을 보이고 앉은 한 남자를 보았다. 하늘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를 보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가 보니 역시나 고타로의 혼이었다. 우타는 그 옆에 앉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그의 목덜미에 바람을 훅 불어 넣었다. (...)

       고타로의 혼은 멍하니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짧게 깍은 머리, 흰 터럭이 섞인 다박수염, 고기잡이와 농사로 까맣게 탄 얼굴을 두 팔로 껴안은 무릎에 대고 있었다. 늘 애교스러운 웃음을 띠던 평소 모습과는 달리 몹시 쓸쓸해 보였다. 우타도 바다로 눈을 돌리고 잠시 함께 바라보았으나, 하얀 햇빛이 쏟아지는 바다는 눈만 부실 뿐 특별히 달라진 게 없었다.

       "고타로, 후미도 그렇고 겐타로와 도모코도 걱정하고 있어. 빨리 집으로 가자."

       그렇게 말을 걸어 보았으나 고타로는 반응이 없다. 우타는 보자기를 풀어 쟁반에다 쌀을 소복하게 쌓아 올리고 아와모리를 술잔에 따랐다. 백 엔짜리 라이터로 향에 불을 붙여 모래에 꽂은 다음 앉음새를 고쳤다. 합장을 하고 고타로의 옆모습을 지켜보며 우타는 중얼거리듯이 혼이 들기를 빌었다.

    - 22~23쪽

     


       전날의 버스 투어에서 가장 기대했던 장소는 추라우미 수족관이었다. 영상에서 본 것처럼, 커다란 고래상어가 아름답게 유영하는 곳.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물고기들의 탈출을 상상했다. 우리에게는 커다랬지만, 물고기들에게는 너무나 좁은 공간이었다. 고래상어와 쥐가오리들은 금방 갔던 곳을 또 헤엄쳐가고, 또 헤엄쳐가고, 또 헤엄쳐가고 있었다. 그들에겐 모험도 없고, 시련도 없었다. 바로 수족관 앞이 드넓은 바다인데. 돌고래 쇼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건너편 바다거북관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수조 앞에 걸터 앉을 수도 있고, 수조를 가까이 만질 수 있는 그곳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어떤 바다거북의 목과 등에는 이끼가 가득 자라 있었다. 나는 그게 신기해서 그 바다거북을 따라 걸었다. 어떤 바다거북은 뭔가를 알고 내 쪽으로 오는 것 같아 손을 내밀고 눈을 맞춰보려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내 손과 눈을 지나쳐 갔다.



       어디에선가 산신과 노랫말 잇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우타는 가슴 한 구석이 찡해졌다. 밤에 혼자 바닷가에 나와 본 게 언제였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세에도 오미토도 유키치도 전쟁으로 죽고, 자기만 늙은 몸으로 이렇게 바닷가에 앉아 있다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외로워져 우타는 고타로의 혼에게 말을 걸었다.

       "뭘 보고 있는 거냐?"

      대답이 없다. 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 빛이 흐려지자 고타로의 모습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안 가려느냐, 고타로야?"

       우타는 일어서면서 물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는 바다를 응시한 채 고타로는 아주 약간 고개를 갸우뚱거린 듯이 보였다. 나뭇잎 그림자가 움직인 탓에 그렇게 보였는지도 몰랐지만, 자기 마음이 좀 통한 것 같아 우타는 합장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 32쪽



       바다거북도 좁은 수조에 갇혀 헤엄치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적어서 그런지 이 곳은 그래도 살만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개의 수조가 있고 그 앞에 티비가 있었다. 티비에서는 새끼바다거북이 살기 위해 바다로 향하는 화면이 반복해서 나왔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작디 작은 생명체들이 온 힘을 다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 장면 또한, 수 년 전 메도루마 슌의 소설을 읽고 찾아봤던 장면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 바다거북관의 공간이 그다지 생경하게 느껴지지도, 그 속을 헤엄치는 바다거북들도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쩌면 고타로의 아버지 오미토가 빼앗아 가려한 알에서 부화한 거북이일지도 몰라, 어쩌면 고타로의 혼이 따라간 새끼 거북이들일지도 몰라, 이런 말도 되지 않은 상상을 마구마구 했다.



       그렇게 모두가 바다 저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모래 결이 무너져 내린다. 우타는 일어나서 꿈틀꿈틀 기어 나오는 까만 무리를 지켜보았다. 달빛 아래 부채꼴로 퍼지면서 바다로 향하는 새끼 거북들의 속도와 기세에 우타는 놀랐다. 양옆에서 달려든 모래게들이 새끼 거북을 집게발로 잘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옮겨 갔다. 그래도 여전한 기세로 새끼 거북들은 잇따라 바다로 들어갔다. 새끼 거북의 무리가 사라지자, 우타는 연안의 산호초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바다거북이 부화하는 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새끼 거북을 노리고 바닷가 가까이로 몰려드는 큰 물고기들 때문이었다. 그 물고기들을 잡으려고 아버지는 작살을 들고 바다로 나갔다. 하얀 물결이 출렁이는 데까지 가는 새끼 거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타는 해변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마스 나무 잎사귀들이 살랑거리고, 아단 숲 속에서 소라게가 기어 다니는 소리가 난다. 목마황 방조림이 까만 벽이 되어 바다와 마을을 갈라놓아, 바닷가에 있는 사람은 우타 혼자뿐이었다.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몰려와 물가로 내려간 우타는 파도에 발목을 적시며 걸었다. 밀려드는 파도에 바다반딧불이가 빛났다가 사라진다. 파도는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우타는 멈춰 서서 바다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그러나 기도는 그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 54~55쪽

     

      

       이야기를 모두 읽고, 눈을 감으면 메도루마 슌이 그려낸 슬프고도 따듯한 바닷가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 소설을 쓴 그의 마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수 년 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나는 작년부터 운명을 믿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여행 이틀째, 남쪽 바다에서 물이 빠진 바다를 보고 나하 시로 돌아오던 버스 안, 핸드폰에 알림 메시지가 도착했다. 믿을 수 없게도, 메도루마 슌의 새 책이 출간되었다는 메시지. 제목은 '신의 섬', 부제는 '오키나와 현대소설선'.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책을 주문했고, 그 책은 지금 내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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