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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년 봄, 전주
    여행을가다 2016. 5. 15. 23:23


    2016년 4월 30일에서 5월 1일까지의 기록. 4월에 떠나 5월에 돌아왔다.


    전주에서 기록한 메모장을 열어 봤더니 이런 글귀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조용한 밤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 무엇에 관한 메모였을까, 1분동안 생각했다. 이 메모 앞에는 "최악의 여자"라는 메모가, 뒤에는 "남산 밤산책"이라는 메모가 있었다. 아, 맞다. 영화 <최악의 여자> 대사였다.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나의 목표는 이 영화였다. 이 영화만 볼 수 있으면, 단 한 편만 보고 와도 좋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전주행을 결정해서 영화는 진작에 매진되었지만, 점심시간마다, 쉬는시간마다 매일매일 들어가 좌석을 체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같이 취소표 1장이 풀렸다. 바로 예매 완료! 혼자 다녀올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시옷의 아이들과 함께 가기로 했다. M은 전주에 있었고, s는 함께 출발하기로 했는데 금요일 알바가 취소되는 바람에 하루 먼저 내려갔다. 셋이 함께 하룻밤을 보낼 계획이었다.





    내려 가는 길은 조금 막혔다. 고속버스가 좋아졌더라. 집에 가는 버스에는 이런 게 없었는데, 최근에 생긴건지 좌석마다 고속버스용 잡지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잡지를 보고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지구당. 서울대앞 규동집. 1메뉴 1인1맥."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인생이라는 길고 긴 여행 중, 세월은, 청춘은 매일매일 우리를 떠나가고 있습니다." 휴게소에서 상복을 입은 할머니를 만났다. 빵과 바나나우유를 드시고 계셨다. 고개를 돌려보니 곳곳에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바나나우유와 빵을 먹고 있었다. 볕이 아주 좋은 오전이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전주에서 이동수단은 딱 세 번 탔다. 시내로 들어갈 때 영화제 셔틀, 숙소에서 늦게 나와 영화 시간 맞추느라 택시 한번, 서울가는 버스 타러 터미널로 갈 때 택시 한 번. 세 번을 제외하고는 계속 걸어다녔다. s는 밥을 먹었다고 해서 혼자 물짜장을 먹으러 큰 길과 골목길 구석구석을 걸었다. 방송에 나온 물짜장 집이라 줄이 길었다. 밥때도 아닌데 줄이 기니까 더욱더 맛있지 않을까 하고 서 있었는데, 테이블 회전율이 너무 낮아서 그냥 포기하고 남부시장 청년몰로 올라왔다. 뭐 먹을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면류를 먹자, 하고 들어간 곳. 뭐가 맛있냐고 물었더니 무뚝뚝하게 답했지만 알고보니 주인 아저씨는 츤데레였다. 음식도 맛있었다. 서울이 아닌 곳에서 혼자 낮술을 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작년 초여름 생각이 났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 청년몰을 한바퀴 돌았다. 4월의 전주의 기운을 5월의 시옷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전주의 풍경들 위에 열심히 스탬프를 찍었다. 책갈피로 써 주면 고마울 것 같아, 라고 말하고 이쁨 받아야지.






    아직까지 s와 M을 만나지 못했다. 카톡으로 계속 서로의 위치를 주고 받았다. 뭘 하고 있는지도. 혼자 있지만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M이 추천한 한옥카페에 가서 아이스라떼를 마셨다. 옆과 뒤 테이블에 모두 영화하는 사람들이었다. 온통 영화얘기였다.





    <최악의 여자>는 기대만큼 좋았다. 사실 중후반 정도까지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는데, 결말부분이 너무 좋았다. 아,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장면들을 보여주기 위해 감독은 그 전 이야기를 했구나, 이 영화를 찍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GV도 좋았다. 사회를 맡으신 분이 이렇게 말했다. "8월에 개봉을 합니다. 9월에 남산에서 찍은 영화니까 9월까지 상영이 이어져서 현실과 영화가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개봉을 하면 한번 더 볼 거다. 그리고 남산에서 밤산책을 할 거다. 누군가와 함께.





    전주영화제라고 쓰여있던 커다란 공이,





    이렇게 노오란 달이 되고.





    체크인을 하러 숙소로 왔다. 혼자. s의 영화가 조금 늦게 끝나 먼저 출발했다. 영화에서 배우들이 많이 걸었는데, 김종관 감독이 GV에서 실제로 자신이 산책을 많이 한다고 했다. 그래서 어둠이 조금씩 깔리기 시작하는 전주 길을 걷는 일이 좋았다. 어떤 이야기들은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것들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마법의 순간.

     





    s가 숙소와 방을 잘 찾아올 수 있도록 사진을 보냈다. 설구화 방이었다.






    두번째 영화 <바덴바덴>은 특이했다. 그런데 좋았다. 뭐가 좋았냐고 물어보면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좋았다. 여배우의 머리 스타일도 좋았고, 평소 입고다니는 보이시한 옷들도 좋았다. 남자와 함께 욕실을 고쳐나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나쁜 남자를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펐다. M의 집에 문제가 생겼고, s는 취소시간을 놓쳐 오늘도 심야영화를 보기로 했다. 이제는 혼자 있기 싫었는데, 함께 마셔줘야 하는데. 아쉽지만 혼자 이 밤을 즐기기로 했다. 전일갑오에 들러 황태포를 샀다. 편의점에 들러 맥주캔도 샀다. 두 캔만 살까 고민했는데, 다섯 캔에 만원이라 고민하다 결국 다섯 캔을 샀다. 다 마시지 못할 걸 알면서도. 씻고 티비를 켜고 맥주캔을 땄다. 마침 티비에서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해줬다. 하루종일 걸어다녀 맥주가 들어가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두 캔을 마시고, 양치하고 누웠다.





    잠들기 직전 오후에 봤던 <최악의 여자>가 계속 생각나서 검색을 해 봤다. 김종관 감독의 <최악의 여자> 제작기가 있었다. 오래전 문학동네 카페에서 산 그의 책이 내게 있었다. 불현듯 떠올랐다. 사 두고 읽지 않고 있었는데, 서울에 올라가면 바로 읽어야지. 그가 궁금해졌다.





    전주의 밤.







    전주의 아침.





    아침에 드디어 s의 얼굴을 봤다. 옆 이부자리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역시 젊음은 좋아서, s는 이틀 연속 심야영화를 봤다. 무려 이틀밤에 여섯 편의 영화를 본 것이다! 매일 두 시간 정도 자면서. s가 깰까봐 조용히 나와서 동네 산책을 했다. 전주천이 보이는 곳에 앉아 가만 있었다. 아, 좋았다. 날씨도 좋고.





    s가 30분만 더 잔다고 하다 결국 일어났다. 우리들의 수다가 시작되었기 때문. s는 그동안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영화는 정말 좋았고, 어떤 영화는 지독하게 불쾌했다고 했다. 나는 어제 술집이 즐비한 거리를 혼자 걸어오며 쓸쓸했노라고 고백했다. 술집 안의 사람들이 모두들 함께였거든. s는 오늘은 정말이지 혼자 다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찌찌뽕. s가 씻는 동안 s가 극장에서 얻어온 <지금 가장 핫한 전주> 책자를 봤는데, 엄청 알찼다. 나중에 본 전주시민 M도 인정했다. 결국 s는 전주를 떠나기 직전, 내게 이 책자를 안겨 주었다. 

     






    전날, 고등학생들에게 집을 습격받은 M과의 약속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아 아침커피를 마시러 갔다. M이 이곳을 추천해줬다. 한옥마을이 훤히 내려다보는 곳. 전망이 끝내주는 곳이라 카페 이름이 '전망'. 운 좋게도 창가 자리가 있었다. 풍경이 매달려 있었는데, 바람이 부니 흔들거렸다. 아, 좋다. 몇 번을 말했다. s가 헌책방에서 산 책들을 구경시켜줬다. 나는 내가 찍고 있는 영상을 보여줬고, 세로쓰기의 누렇게 변색된 책을 보며 자연스럽게 넘겨보라고 했다. 영화제 와서 나 나름의 영화를 찍었다.







    M과 만났다. 드디어 만나게 된 우리 셋. 결국 s와 나는 전주에서의 마지막 영화를 취소했다. 우리는 막국수와 떡갈비를 먹고, 걷다가, 시원한 커피를 마셨고, 또 걷다가, 문 닫은 가맥집들 사이를 방황하다 문 연 집을 발견하고 황태포와 맥주를 마셨다. M이 길을 걷다가 이 곳이 은근 예술인들의 거리라며, 예술인들이 자주 오는 술집과 카페를 알려줬다. 다음에 와봐야지. 밤에 와봐야지. 해태바베큐를 가리키며 진짜 맛있는 통닭집, 이라고 말했다. 다음에 와봐야지. 꼭 와봐야지. 곧 영국유학을 떠나는 M에는 나는 어디서든 잘 자라고 목베개와 수면안대를 선물했고, s는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다녔던 초록색 인형반지(캐릭터 이름을 모른다는. >.<)를 선물했다. M이 친구들과의 약속 때문에 먼저 자리를 뜨고, 옆자리 아저씨들에게 테이블 위에 남아도는 병따개를 준 죄로, 우리는 전주의 역사와 역사와 역사에 대해 한참을 들었다. 버스 핑계를 대고 일어났다. s는 집에 가져갈 떡갈비를 샀고, 나는 <지금 가장 핫한 전주> 책자를 얻었다. 한산한 극장 테라스에 앉아 땀을 식혔다. 그리고 말했다. 둘이서 번갈아가며.


    아, 전주 좋았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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