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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
    서재를쌓다 2016. 5. 18. 07:10



       전주에서 이 책이 내게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한옥 숙소에서 불을 끄고 혼자 누워 있다가. 홍대에 있는 카페꼼마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 앞에서는 흠집이 있어 정상 판매를 하지 못하는 책들을 싸게 판매하고 있었다. 그 책들을 둘러보다 발견했다. 김종관 감독의 책. 그렇게 산 책이었다. 한동안 책장에 고이 꽂혀 있었는데, <최악의 여자>를 보고 이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거나 사랑이 아니어서 죽도록 쓸쓸한 서른 두 편의 이야기'. 서른 두 편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에 대한 김종관 감독의 산문이 있다. 그러니까 예순 네 편 모두 김종관 감독이 쓴 거다. 서른 두 편은 모두 사랑 이야기다. 그것도 섹스에 관한. 끈적끈적한 섹스가 아니다. 촉촉한 섹스이다. 읽는 중에 친구를 만나게 됐는데, 이 촉촉한 섹스책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고백했다. 그러니까, 꽤나 감성적인 섹스다.



       "하나의 천장 아래서 오랫동안 나와 함께한 침대도 있었다. 좋은 침대가 아니었고 매트리스도 바꾼 적이 없다. 매트리스를 가끔 뒤집어주기는 했다. 내가 누우면 빈자리가 남지 않는 작은 침대였다. 물론 나 혼자만 누워 지내지는 않았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낡은 침대는 사연이 많아졌다. 나는 그 사연들을 일일이 신경쓰는 성격이 아니지만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천장만 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는 지치지 않았지만 나는 지쳐 있었다.
       어느 날 심기일전했다. 침대가 바뀌었고 천장이 바뀌었다. 전보다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약간 더 큰 침대를 보며 살고 있다. 자주 시트를 갈고 있다. 아직 매트리스를 뒤집은 적은 없다. 창에는 아직 커튼이 없어서 아침이면 창문을 타고 들어온 빛들이 침대를 돌아다니다가 눈을 찡그리게 한다. 그 시간이면 나는 이불 안으로 숨어들거나 잠에서 깬다.
       요즘은 일어나도 한동안 침대에 있고는 한다. 침대에 기대어 창문 너머 풍경 보는 것을 즐긴다. 책을 읽기도 하고 노트북으로 작업을 할 때도 있다. 가끔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그사이 커피를 쏟아서 얼룩이 생기기도 했지만 괜찮다. 침대에 기대어 창문 너머 바람에 숨을 쉬는 나무 이파리들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그리운 침대에 살고 있기를 바라게 된다."
    - p. 56-57


       사실 나는 그를 오랫동안 흠모해 왔다. 미장센단편영화제에서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본 순간부터. 그 뒤로 실제 그를 보기 위해 낙원의 영화관에 가기도 했다. 그의 단편과 중편 영화를 연달아 상영했던 때였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가서 가만가만 그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그때의 느낌은 영화를 좋아하는, 어린시절이 그렇게 풍요롭지 않았던 사람. 단편영화에 많은 애정이 있는 사람. 그 뒤, 많은 시간이 지났고, 그는 한 편의 장편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최악의 여자>가 두 번째 장편 영화. 전주에서 본 영화가 좋아서, 그를 흠모하기 시작했던 예전 생각이 났다. 그러면서 그를 좀더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 왠지 그를 좀더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험의 기회가 생겼을 때, 그 모험에 가담하거나 옆길로 스쳐간다. 때로는 스쳐간 모험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녀와 그 좋은 분위기에서 왜 자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들면서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해보고 진도를 나가보자면, 섹스는 재밌었던 것으로, 관계는 결국 안 되는 쪽으로."
    - p. 153


      하지만 역시, 잘 모르겠다. 당연하게도. 어떤 이야기를 읽고 나서는 알 거 같았는데, 어떤 이야기를 읽고 나서는 도통 모르겠다. 이게 그의 이야기일까, 이 사람이 그일까, 이 감정은 그가 느낀 감정일까. 내내 생각해봤지만, 결론은 알 수 없다는 것. 그래, 당연한 결과였다.


       "시간은 흐르고 무수한 선택으로 우리는 현재를 만났다. 변한 것과 그대로인 것, 선택한 길과 선택하지 않은 길이 남았다. 어둠 속에 가둔 가능성들 속에서 다른 운명으로 흘러간 나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야기들은 가끔 그곳에서 온다. 벽 너머 어둠 속에 잊혀진 기억 몇 개와 선택하지 않은 길들에 상상을 덧대어 다른 세계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나와 다르게 움직이는 거울 속의 나를 보게 되지만 그 환영들이 빛이 닿는 곳에 머물 수는 없다."
    - p. 187


       <최악의 여자> GV에서 들은 것과 감독이 직접 쓴 제작기에 의하면, 김종관 감독은 많이 걷는다고 한다. 걷다가 커피집에 들어가 마시고, 또 걷다가 지치면 어딘가에 들어가 마시고. 그가 하는 운동의 전부이자 유일한 것이 걷기라고 한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보고 이와세 료에게 빠져 그를 캐스팅했고 (그 전에 영화에 관심을 보였던 일본배우는 누굴까), 이와세 료는 감독님이 마시는 걸 좋아해서 함께 엄청나게 마셨다고 했다. (술과 커피, 차를 말하는 듯. 이와세 료는 술을 잘 못 마시다고.) 김종관 감독은 이와세 료라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영화를 핑계로 계속 불러냈다고 했다. 정말로 인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말들을 듣고 시작한 책인 지라, 책을 읽으면서 뭔가 풀리지 않을 때 계속 어딘가를 걸었을 감독을 상상했다. 서울의 이곳저곳, 골목과 골목 사이를 촉촉하게 걸어다녔을 모습을.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눈하트를 날리며 무언가를 마셔대는 모습을.


        "잊고 사는 데 무리가 있다면 잘 살아야 한다."
    - p. 144


       뒤의 이야기보다 앞의 이야기들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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