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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날들
    서재를쌓다 2015. 12. 27. 19:40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그해 읽었던 최고의 소설이었다. 어떤 단편은 세 번이나 읽었다. 그 단편의 어떤 장면이 머릿 속에 계속 맴돌아 다시 꺼내 읽었다. 여자주인공이 늦은 밤 뒷마당에서 혼자 조용히 오열하는 장면이었다. 세 번 읽어도 좋았다. 작가의 이름이 외워두고, 언제 새 책이 나오나 주시하고 있었는데, 지난 9월에 새책이 나왔다. 그것도 장편소설. 출간되자마자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장편은 읽으면서 첫 소설집만큼의 느낌은 없었다. 한 가족의 이야기다.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고, 오빠가 있고, 여동생이 있다. 아빠와 엄마는 오랜 갈등 끝에 이혼을 했고, 오빠는 게이고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있지만 미래에 대한 의욕이 없다. 여동생은 폭행사건에 휘말린 남자친구의 도피를 도와주고 있다. 소설은 이들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챕터에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려 550쪽이 넘는 긴 이야기다. 처음에 좀 심드렁하게 읽다가, 점점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이 가족의 미래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네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형편없었지만, 어떤 면에서 모두 이해가 되는 인물들이었다. 여동생의 남자친구 라자를 포함해서. 왜 이렇게 행동할까 답답하기도 했지만, 내가 그이들이라고 생각해보면 그이들처럼 행동했을 것 같았다.

     

       이 책에 반한 건 마지막 결론때문이었다. 여동생은 멕시코 국경을 앞두고 A와 B라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그녀는 B라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A라는 선택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B라는 길에서 잘 살아나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그 선택은 그녀를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힘들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이 삶이기에 열심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해 하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녀와 라자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리고 내게도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그녀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봤다. 어려운 일이었다. 무척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녀는 선택했고, 후회하지 않았다. 멋졌다. 그애의 이름은 클로이, 아니 앤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이들 가족이 아니라, 막내 클로이의 남자친구 라자이다. 나는 그애한테 한동안 반해 있었다. 라자의 친구로 승이라는 한국계가 나오는데, 좀 비열한 역할이라 읽으면서 마음이 씁쓸하기도 했다.  

     

     

       

    좋았던 구절들.

     

     - 언젠가 N언니가 말했다. 그해 언니가 극장에서 본 영화가 지금까지 살아온 해 중에 가장 많았는데, 그건 외로웠단 증거라고. 그리고 언젠가 시옷의 모임에서 왜 책을 읽느냐고 S가 물었는데, 나는 내 삶이 무료해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라자도 그랬다. 

     

       그때 내 유일한 안식처가 영화관이었어, 라자는 말했다. 그곳에서는 몇 시간이고 날 잊어버리고 주위의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어. 어둠 속에서는 내가 누구고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 상관이 없었으니까. 최소한 몇 시간 동안은 어떤 사람도 될 수 있었지. 그 몇 시간 동안은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프랑스령 유럽 국가로도, 1960년대의 런던으로도, 미주리 동부 평원의 구릉지대로도. 매주 금요일 밤이면 난 혼자서 뉴어크에 있는 달러시네마에도 가고, 주말이면 NYU에서 열리는 영화제나 뉴욕의 엔젤리카 극장에서 하는 특별상영회에도 갔어. 내 영화 공부가 시작된 곳이 바로 거기야. 그는 말했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고다르를 알게 됐지. 

    p. 345

     

    - 가족은 각자의 이유로 모두 외로웠다. 엄마의 이야기. 그녀는 이른 나이에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그녀의 가정은 부유했지만, 계속 행복하지는 않았다.

     

       겨울방학이면 때때로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오곤 했다. 뒤뜰 베란다에 앉아 수영장을 내다보며 맥주를 마시면서 그들은 실패한 연애나 늘어가는 카드빚, 학자금 대출 등에 대해 이야기했고, 동시에 그녀의 집과 수영장과 아이들에 대해, 그리고 너무나 안정되고 어른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감탄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떠나고 나면 그녀는 가슴에 밀려드는 공허함을 느끼곤 했다. 어쩐지 뒤에 남겨진 듯한 느낌. 그다지 원했던 적도 없으나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니 아쉬워진 어떤 삶을 속임수에 빼앗겼다는 느낌.

    p. 386

     

     

      1972년생 미국 작가, 앤드루 포터. 그의 다음 소설도 여전히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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